한국의 반지성주의 연구

– 신세대의 반여성주의‧물신주의‧학벌주의를 중심으로

by 노마 장윤석

< 목 차 >

Ⅰ. 서론

Ⅱ. 선행연구 검토

1) 미국의 반지성주의 – 호프스태터, 모리모토

2) 한국의 반지성주의 – 이라영, 강준만, 김수아

Ⅲ. 연구설계 : 연구대상 및 조사방법

1) 연구대상

2) 연구질문

3) 핵심연구내용

4) 연구설계 및 조사방법

Ⅳ. 반지성주의의 이론적 모색

1) 지성이란 무엇인가

2) 반지성주의란 무엇인가

Ⅴ. 신세대의 반지성주의

1) 반지성주의와 반페미니즘

2) 진지충과 반지성주의

3) 반지성주의와 물신주의

4) 반지성주의와 학벌주의

Ⅵ. 결론

Ⅶ. 참고문헌



Ⅰ. 서론


1.

세상이 말세다. 언제는 아니었겠느냐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다. 뉴스를 보거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답답한 때가 잦다. 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반지성주의’라는 낱말을 통해 이해해보려 시도한다. 착잡한 기분이 가라앉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제20회 퀴어퍼레이드에 참석할 때였다. 시청역 앞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광장으로 향하는 길, 둥둥거리는 북소리가 퍼레이드의 열기를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아뿔사, 이 북소리는 반-퀴어(반-동성애) 집회의 것이었다. 기독교단체, 해병대 전우회, 보수우파, 태극기부대, 보수 대학들이 총출동해 맞불을 놓고 있었다.

사실무근한 정보가 떡하니 포스터와 플랭카드에 적혀있는 것을 보고 머릿속에 떠오른 건 ‘반지성주의’였다. 태극기와 성조기에 이어 이스라엘기와 핀란드기(이건 뭔지 모르겠다)까지 등장하는 걸 보며 이걸 반지성이라 부르지 않으면 무얼 반지성이라 불러야 하나 싶었다. 직관적인 낱말이지 않은가. ‘반지성주의’. 이해할 수 없는, 눈앞에 보이는 저들을, 저 현상들은 반지성적이다.

가히 혐오의 시대다. ‘혐오’라는 말이 곳곳에서 들려온지는 꽤 시간이 되었다. 혐오다 혐오가 아니다 여성혐오다 남성혐오다 식의 일련의 논쟁을 관찰하면서 한남(반-페미니즘 성향의 남성을 이른다)들의 말.말.말을 보아왔다. 지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최근에 힘을 얻어가고 있는 각종 온라인상의 댓글들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반지성주의가 뭉실뭉실 떠오른다. 댓글들만 본다면 하버마스가 믿었다는 민주주의의 공론장은 붕괴(?)한 게 틀림없다. 하버마스가 말했던 건설적인 공론장과 이를 위한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제적으로 시야를 넓혀보자. 트럼프의 당선은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혐오 발화자에 부동산 투기꾼, 시장 잡배같은 인물이 어떻게 대통령의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싶지만, 이미 벌어졌다. 그의 행보는 기가 막힌다. 지구온난화를 부정하며 파리협약에서 탈퇴했다. 아래는 그의 망언이다.

“이 매우 비경제적인 지구온난화 헛소리는 멈춰야 한다. 우리 지구는 얼어 죽을 지경이고, 기온은 기록적으로 떨어졌으며, 우리 지구온난화 과학자들은 얼음 속에 갇혀 있다(Twitter, Donald J. Trump, 2014.1.2.).”

“강력하고 긴 찬 바람이 모든 기록을 깰 수도 있다 - 지구온난화에 무슨 일이 일어나건 말건?(Twitter, Donald J. Trump, 2018.11.22.)”

기후변화의 심각성이 나날이 대두되는 시점에 트럼프의 행보는 기이하기 이를 데 없다. 인류세 담론이 한창인, 인간의 힘이 지구 시스템 전체의 기능을 교란하고 있다는 심각한 우려가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나오는 시점에 트럼프 외 그의 지지자들은 사실을 ‘통째로’ 부정한다. 유사과학 및 비이성적 믿음에 정치가 움직인다.

이는 인류에게 해악이다. 우리는 선대의 선대의 선대에 빚지고 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간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와 여기까지 왔다. 과학적 방법론에 따라 쌓여온 지식들을 총망라해 부정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우리의 행보가 반지성적 경향에 의해 후퇴하는 건 아닐까 되물을 필요가 있다.


2.

동생을 보면서 나는 의문에 시달렸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책을 보지 않고, 어떤 학식·정의에 존경을 가지지 않고 하루일과가 온통 게임·유튜브·페이스북·인스타그램·아프리카TV로 가득찬 것 모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건 돈도 없는 녀석이 bj에게 몇 만원 몇 십 만원의 별풍선을 쏜다는 것. 왜? 왜 실물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일면식 한 번 없는 bj에게 별풍선을 쏠까. “그 돈이면 기부를 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동생이 특이한 게 아니라 10대의 대부분이 그랬으니까. 팬덤 현상도 마찬가지고. 독서 시장에서 10대 남성의 구매력은 밑바닥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녹색당원은 만 명이지만 아프리카‧유튜브 BJ 철구의 구독자는 100만 명이다. 슬픈 진단이지만 현재 대부분의 페미니스트 남성들은 10대 남성을 설득할 수 없다. ‘정의’가 먹히지 않는 까닭이고, ‘논리적’사고가 먹히지 않는 까닭이다. “빨래하는 페미니즘 읽어봤냐. 책 좀 읽어와”라고 말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웃는 소리로 논리는 무논리를 이길 수 없다고 혹자는 말한다.

신세대가 보여주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렵다. 섣불리 ‘나 때는 안 그랬다 이거야’하고 말할 수도 없다. 혐오. 넷페미 논쟁. 일베. 이 현상들의 공통점은 모두 젊은이들에게서 그리고 온라인에서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온라인·SNS는 소통의 간편화·간결화를 넘어 이제는 모든 사회현상과 문화전반의 갈등과 논란을 선도하고 있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전자기기와 밀접했던 젊은 세대가 이의 중심인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즉 신세대를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3.

‘반지성주의’라는 단어에 매료된 것은 맞다. 넘실거리는, 도무지 ‘이해 가지 않는’ 현상들을 설명해주리라 믿는다. 하지만 사실 ‘반지성주의’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위에 기술한 갖은 현상들을 모두 ‘반지성주의’라는 낱말로 묶어내도 되는 걸까? 그렇다면 반지성주의는 ‘빨갱이’처럼 마법의 단어가 될지도 모른다. 맥락을 고려 않고 쉽게 스테레오타입화해 묶어버리는 것의 위험성을 경계한다. 다만 현상들 사이에서 관찰되는 어떤 흐름, 경향이라 이를 수 있는 것을 조심히 섬세하게 묶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반지성주의’를 이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열쇳말로 내걸었지만, 한계에 직면하지 않고 글을 이어갈 능력이 내게는 없다. 반지성주의는 자칫하면 엘리트주의로, 혹은 근거의 부족에 대한 변명과 투정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농후한 단어다. 반지성주의를 말하며 나의 언어가 ‘지성’인 것처럼 말한다면 반지성주의는 위험한 단어가 된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대상에 대해서 ‘반-지성’이라 이름 붙이는 것은 관찰-연구자인 내가 ‘지성인’임을 전제하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엉킨 실을 풀어보고자 한다.



Ⅱ. 선행연구검토


1) 미국의 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란 명료한 개념이 아니다. 확정된 개념은 더더욱 아니다. 다양한 현상을 설명하는데 주요하게 사용되지만, 그 정의가 뚜렷하지는 않다. 이 용어는 리처드 호프스태터(Hofstadter)의 『미국의 반지성주의(1963)』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는 반지성주의를 “‘반지성적’이라고 일컫는 태도나 사고에 대한 공통되는 감정은 정신적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이며, 또한 그러한 삶의 가치를 언제나 얕보려는 경향(25p)”이라 정의한다.

호프스태터의 연구는 건국기부터 1950년대 지식인이 표적이 되었던 매카시즘까지의 역사 전반에서의 폭넓은 분석을 통해 반지성주의의 연원을 복음주의, 평등주의, 실용주의에서 찾는다. 이는 각각 이성보다 신앙을 우위에 두는 ‘종교적 반합리주의(religious anti‐rationalism)’, 기득권 세력과 지식인의 반평등 우월의식에 비판적인 ‘인민주의적 반엘리트주의(populist anti‐elitism)’, 친자본주의적이면서 실용적 지식을 선호하는 ’무분별한 도구주의 (unreflective instrumentalism)로 분류된다(Rigney ; 1991, 강준만 재인용).

하지만 『반지성주의 - 미국이 낳은 열병의 정체(2015)』의 저자 모리모토 안리는 반지성주의가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라 주장한다. 흔히 ‘반지성주의’란 ‘반反지성’, 즉 지성적인 모든 것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원래는 지성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부수되는 ‘어떤 것’에 대한 반대로, 사회의 불건전함보다는 오히려 건전함을 나타내는 지표였다고 한다. 반지성주의는 자기성찰이 결여된 지성에 대한 반대, 지성을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특권계층에 대한 반감이자 반발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개신교도의 건국, 복음주의, 평등주의를 반지성주의의 배경으로 짚는 것까지는 호프스태터의 연구와 같다. 다만 해석과 관점이 사뭇 다를 뿐이다.

모리모토는 ‘긍정적 반지성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미국의 초월주의-초절주의 자연철학자 랠프 월도 애머슨(Ralph Waldo Emerson)과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를 예로 든다. 애머슨의 사상에서 나타나는 근대적 지성 -근대과학과 계몽주의- 에 대한 반발이 반지성주의의 한 갈래라 설명한다. 고로, 모리모토의 반지성주의 분석은 지성 자체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지성이 세습적인 특권계급의 독점적 소유물이 되는 데에 대한 반감이고, 세대를 초월해 특권이 고정되지 않고 새로운 세대에도 평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이로부터 도출된다. 미국의 특수한 경우에서 지식인이 수행해온 역할을 반지성주의가 수행해 왔다며 반지성주의가 가진 ‘반권위주의’로서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한다.

“지성의 지배에 대한 반역은 이처럼 평등이라는 이념을 원동력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반지성주의는 단순히 지적인 것이나 지적인 사람에 대한 반발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가가 가진 예로부터 전해지는 지식이며 권위에 대한 반역이었고, 그 반역에 의해 새로운 지식의 가능성을 개척할 힘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반지성주의는 지성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모리모토 : 261p).”

그러나, 호프스태터는 다르다. 그는 반지성주의가 반합리주의(anti-rationalism)라는 철학상의 교리와 동일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모리모토가 예로 든 에머슨-소로우의 사조는 ‘반지성주의’가 아니라 ‘고상한 척하는 교양인의 반합리주의’이고, 모리모토의 ‘예로부터 전해지는 지식과 권위에 대한 반역’으로서의 긍정적 ‘반지성주의’는 ‘반권위주의’가 된다. 논의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모리모토가 말한 반지성주의의 긍정적 측면은 제외하도록 하겠다. 그것은 호프스태터의 말대로 ‘반합리주의’와 ‘반권위주의’에 가까운 것 같다.

분명 미국이라는 독특한 토양에서 탄생한 ‘반지성주의’는 다양한 맥락을 가지고 있으나 서론에서 제시한 현상들을 해석하는 개념으로서의 반지성주의는 호프스태터의 정립에 발 딛는 게 맞겠다.

한편 모리모토는 반지성주의가 지극히 미국적인 현상이므로 일반화‧개념화하여 세계적인 현상과 연결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말한다. 분명 호프스태터의 ‘반지성주의’개념은 미국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가 역사학자인 까닭에 기독교적 근원에 기반하여 피어난 평등주의, 원시주의, 복음주의 등 역사적 맥락에서 드러나는 흐름을 ‘반지성주의’에 담았고 미국적 특수성이 다분히 담겼다. 사회학적 개념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 개념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맞는가 하는 의문은 남는다. (호프스태터는 역사적 분석의 목적으로 반지성주의라는 개념을 썼기에 그런 수준의 정의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2) 한국의 반지성주의

하지만 그런 미국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호프스태터의 ‘반지성주의’개념이 가지는 의미는 짙다. 김동춘은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오늘날 한국 사회를 성찰해 볼 수 있는 거울과 같다”며, 저자가 강조하는 현대 미국의 반지성주의가 미국뿐 아니라 20세기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나타났고, 20세기 중반 이후 일부 유럽을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들이 자본주의적 물질주의, 실용주의 길로 나아갔음을 말한다. 미국의 특수한 기독교정신-복음주의에 대해서는 공통되었다고 말하기 어렵겠지만, 생각하면 한국의 보수 기독교와 극우세력은 호프스태터가 분석한 복음주의-반공주의의 반지성주의와 참 닮지 않았는가?

김동춘은 미국 복음주의 선교사들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한 한국 개신교와 미국처럼 교육이 거의 신앙이 되었으나 그 교육이 출세주의와 세속주의라는 동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극우 반공주의와 국가보안법이 만들어낸 흑백 이분법의 정치문화의 역사가 있다는 점에서 한국이 미국의 복사판에 다름 아니라 말한다. 생각하면 오늘날 한국만큼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나라가 없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겠다.

하지만 한국의 반지성주의 연구는 호프스태터의 연구 이후 50여년간 연구가 이어진 미국과 비교할 때 아주 적다. 국문 단행본 중 반지성주의가 제목에 등장하는 책은 이라영의 『타락한 저항 - 지배하는 ‘피해자’들, 우리 안의 반지성주의』뿐이고, 그마저도 출간된지 얼마 되지않은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이라영의 책은 반지성주의라는 낱말을 빌려 최근의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현상들을 설명했지만, ‘반지성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답해주지 않는다. 이론화 영역에서는 공백이 크다. 아래의 연구에서 ‘반지성주의’는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조작적 정의가 되는 게 대부분이었다. 아쉽게도 한국의 ‘반지성주의’를 체계적으로 정립한 시도는 없다.

이라영의 책에서는 반지성주의를 ‘알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로 이름 붙인다. 혐오 발화자들이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을 모르면서 – 알려하지 않으면서 – 규정하려 하는 경향을 지적하면서 남성이 역차별을 받는다거나 ‘귀족노조’ 때문에 기업이 힘들다거나, ‘종북’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거나,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창궐한다거나 하는 믿음을 예로 든다. ‘기존의 질서를 움켜쥐기 위해 알기를 거부하는 현상’이 반지성주의 실현태다.

저자는 바야흐로 충(蟲)의 시대가 도래했다며 이전의 고고한 가치들은 매도되고 혐오는 극화되는 현실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박근혜 정권 시기 벌어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발로 탄생한 '나꼼수' 현상, 그리고 최근 한국 사회의 가장 주요한 논란으로 꼽히는 여성 혐오 사태 등 각기 보수 우파, 중도 우파, 진보 좌파 진영에서 벌어진 일들을 짚음으로써 진영을 막론하고 벌어지는 공통의 상태를 말한다.

이라영이 반지성주의라는 낱말로 작금의 한국 사회에 벌어진 사건들을 예술사회학 연구자만의 날카롭고 섬세한 언어로 꿰어냈음에 존경을 표하는 바지만, ‘반지성주의’를 사회학적 개념으로 차용해 설명한 것은 아니고, ‘반지성주의’의 정립을 시도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반지성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분명 반지성주의는 여타의 정치 현상 뿐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신자유주의의 등장과도 밀접하게 맞물린 면이 있다. 저자의 책에서 드러나는 날카로운 지점들과 화두들을 연구에서 이어나가려 한다. 필자는 이라영의 책에서 받은 실마리로 그의 화두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점에서 감사할 따름이다.

강준만(2019)의 「왜 대중은 반지성주의에 매료되는가? - 설득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본 반지성주의」는 이라영의 연구에서 부재했던 ‘반지성주의’의 개념화를 시도하고 ‘반지성주의’를 가치 중립적 개념이자 특정 언행에 적용하는 미시적 개념으로 쓸 것을 제안한다. 더불어 반지성주의를 지성의 유무나 정도가 아니라 지성의 작용방식을 기준으로 ‘이성적·합리적 소통을 수용하지 않는 정신상태나 태도’로 정의하면서 그 3대 요소로 신앙의 확신, 성찰 불능, 적대적 표현을 제시한다. 반지성주의의 사회적 배경으로 평등주의, 물질주의, 지성의 자기소외를 지적하는 동시에 개인적 차원에서 다섯 가지의 인지적 편향 –1) 행동 편향 2) 가용성 편향 3) 확증 편향 4) 부정성 편향 5) 이야기 편향을 지적한다. 이 편향들이 소통의 과정에서 반지성주의를 유발하고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다. 이는 반지성주의의 작동방식에 한 걸음 더 들어간 소통연구방식으로서 더욱 정교하게 반지성주의의 원인을 관찰할 수 있다. 다만 저자도 언급했듯이 확산되어가는 반지성주의의 경향을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후속 연구의 과제로 남는다. 또한 본 논문은 반지성주의를 유발하는 거시적 환경에 대한 연구라기보다 그런 환경을 기반으로 이뤄지는 개인적인 소통의 문제를 짚어냈기에 전자의 연구는 공백으로 남아있다.

김수아의 「남성 중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페미니즘 주제 토론 가능성 – 역차별 담론 분석을 중심으로(2019)」는 온라인 집단에서의 반지성주의의 문제를 짚는다. 역차별 담론의 성공은 현행 한국 온라인 공간에서 합리적 토론이 어려운 이유를 보여주는데, 본 연구는 온라인 공간의 담론 구성 과정에서 확증 편향적 공유 집단 서사가 구성되고, 이 때문에 다른 경험에 열리는 개방성이 낮은 특성이 반지성주의적 태도와 연결됨을 가정한다. 그리고 온라인 공간의 문제가 남성 경험을 절대시하는 사고방식과 그에 대한 성찰성의 부재에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흥미로운 것은 남성 약자 내러티브가 반지성주의와 연동되는 방식으로서, 우치다 마쓰루의 개념처럼 ‘무시간성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남성 약자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들은 집요하게 ‘지금, 여기, 나’ 즉 20대 남성에 집중한다. 자신들의 평균 임금과 20대 여성의 평균 임금을 비교하며, 과거의 차별은 현재에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사회 전체를 상상하거나 바라보는 시점은 요구되지 않는다(김수아, 2019 : 32p).” 김수아는 ‘지금, 여기, 나’를 벗어나는 기획은, 주체와 성찰성의 문제로 차이에 대한 사고를 요구한다 말하며 ‘성찰성’에 방점을 찍는다.

필자가 서론에서 ‘반지성주의’라 이름 붙인 현상들이 온라인 공간의 특수성과 맞아떨어졌던 점을 관찰할 때,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인터넷의 발달과 미디어의 보급과 관련이 있다. 반지성주의적 태도는 한국의 온라인 공간에서 공론장의 구성을 불가능하게 한다. 김수아(2019)가 공론장의 구성을 방해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의 요인으로 반지성주의를, 이의 가장 큰 속성으로 ‘성찰성의 부재’를 짚는 것은 인상적이다. 호프스태터의 연구가 역사 중심으로 기술되어 사회적-정치적 맥락을 짚고 있는데 반해 강준만과 김수아의 논문에서는 미시적 의사소통과정 – 공론화 과정을 다룸으로써 반지성주의 경향을 날카롭게 포착해낸다

앞서 말했듯 반지성주의에 대한 개념의 애매함을 덜 필요가 있다. 강준만(2019)은 한국의 현실은 ‘반지성주의라는 비판을 받는 사람이 반지성주의를 비판하고, 진보와 보수는 각각 상대편을 반지성주의라 비판하고, 페미니스트와 그 비판자들도 각각 상대편을 반지성주의라 비판하고, 감성주의를 반지성주의로 간주하는 등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말했다. 진흙탕 싸움에서 좀 젠체하는 ‘욕’이 되어버렸을 뿐이다.

이를 위해 Ⅳ장에서 미약하나마 ‘지성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을 필두로 반지성주의의 이론화 작업을 시도하고, 본 선행연구검토에서 확인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반지성주의가 한국에서 어떻게 유형화 될 수 있는지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Ⅲ. 연구설계 : 연구 대상 및 방법


1) 연구대상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크게 두 집단으로 그 모습을 보인다. 7080(구세대)의 반지성주의와 1020(신세대)의로 전자의 대표로는 태극기 부대를 꼽을 수 있고 후자의 대표로는 20대 한국 남성을 꼽을 수 있다. 이 두 집단은 ‘말말말’로 한국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고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으나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무척이나 상이하다. 전자가 보수주의, 기독교주의로 드러나는 반면 후자는 성장주의, 물질주의로 그 원인이 드러나는 듯 보인다.

필자는 이 연구에서 1020집단(신세대 집단)만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같은 나라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상이한 시간을 살아온 두 집단이 다른 분석대상임은 자명하다. 움직이는 매커니즘 또한 다소 대조적이다. 무엇보다 필자의 위치에서 7080집단의 역사‧문화적 맥락은 이해가 어렵다.

‘1020세대’라 함은 2019년 기준 90년생이 한국나이 기준 서른이므로, 폭넓게 90년 이후 출생자라 이를 수 있겠다. 이후에서는 편의를 위해 ‘신세대’라 칭한다.


2) 연구질문

연구질문이 좀 크다. ‘한국의 반지성주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그 작용방식과 원인은 무엇인가?’라고 잡았다. 질문을 세분화하면 1) 반지성주의란 무엇을 말하는가 2)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어떻게 드러나고 어떻게 작용하는가 3) 그렇다면 이 반지성주의 경향‧현상‧태도‧상태의 원인은 무엇인가, 로 나눌 수 있겠다.

질문을 자세하게 잡는 것이 깊은 연구의 출발점이라는데, 그 점에서는 실수를 범했다. 거시적인 이해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다소 염려되지만, 무엇이 1020세대의 반지성주의 에 영향을 주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전반적 이해를 시도하려 한다.

질문 1, 2를 Ⅳ장에서 보고, 3을 Ⅴ장에서 본다.


3) 핵심연구내용(가설)

한국의 1020세대에서 반지성주의 경향이 드러날 것이라는 전제 아래, 반지성주의 경향·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생각한다. 반지성주의의 원인으로는 여러 키워드가 맴돈다. 기독교 근본주의, 반공주의, 학벌주의, 물신주의, 소비주의, 집단이기주의, 20대 저급화 현상, 테크놀로지의 발전, 신자유주의의 대두, 전자기기로의 라이프스타일 변화,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구를 진행한다. 가설을 염두에 두고 검토했던 변수들은 다음과 같다.

‣ 남성(X) → 반지성주의(Y)

‣ 테크놀로지 변화양상(X) → 반지성주의(Y)

‣ 신자유주의/자본주의(X) → 반지성주의(Y)

‣ 기독교 근본주의(X) → 반지성주의(Y) : 호프스태만의 연구처럼, 기독교 근본주의가 반지성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경제성장/경제근본주의(X) → 반지성주의(Y)’ : 미국이 경제적으로 판을 치던 때에 반지성주의가 출몰했다. 경제성장과 반지성주의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 반지성주의 – 성찰성 : 반지성주의는 성찰성과 짙은 관계를 가진다.

이 중 신세대의 반여성주의, 물신주의, 학벌주의를 중점적으로 연구해보려 한다.


4) 연구설계 및 조사방법

‘반지성주의’는 선행연구검토에서 말했듯이 명확한 개념이 아니었고. 선행 연구자들이 반지성주의를 사용하는 맥락이 상이한 까닭에 섣불리 조작적 정의 및 개념화를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히려 연구를 하면서 반지성주의가 무엇인지 감을 잡아가게 되는 측면이 있었다. 일상적‧용례적 ‘반지성주의’는 지성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 없이 사용된다. 때로는 강한 반대와 멸시의 표현, 이해 안 가는 대상에 대한 꼬리표로 사용된다. 따라서 섬세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고민이 많았다. 양적 연구를 하기에는 ‘반지성주의’와 ‘성찰성’이 조작화하기 까다로운 개념이라는 것을 말해본다. 양적연구를 위해서는 조작적 정의는 필수인데, 그게 참 어려워 패스했다.

질적 연구로 동생 인터뷰를 통해 신세대에서 드러나는 반지성주의 경향을 파악해보려 했으나, 동생을 인터뷰 하려면, 동생이 ‘반지성주의자’라는 것을 전제하고 인터뷰를 해야했다. 연구를 위해 관계를 파탄내는 것보다는 연구방법을 바꾸는 것이 나았다.

내용분석기법을 활용해보고자 했다. 내용분석은 사람들의 의사소통 내용기록에 대한 분석이다. 김수아(2019)의 연구처럼 반지성주의는 사람들의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 하에서 분명하게‧극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사람들의 의사소통 내용기록을 분석하는 내용분석(content analysis)은 반지성주의 분석에 있어 최적일 수밖에 없다.

원래대로라면 표집과 코딩이 필요하지만 실체를 잡기 위해서는 다양한 변수의 상호작용을 연구할 필요가 있어 유사 내용분석적으로 접근했다. 잠재적 자료분석 기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기사와 각종 자료를 분석했다.

‘1) 반지성주의와 반페미니즘’에서는 기존 통계자료의 분석을 통해 근거의 빈자리를 보완하였다. 특히 <시사IN>과 한국리서치가 조사한 여론조사 통계는 핵심적으로 쓰였다. 그 외 통계청과 각 사이트에서 통계를 이용했다.

호프스태터의 연구가 반지성주의적 태도가 보이는 사례를 열거하며 시작한다는 점에서 인상을 받았고, 각종 뉴스나, 들려오는 이야기, 자료, 사건, 현상 등을 열거하고 논의를 전개해나가는 사례연구 기법을 참조하려 했다.

3) 진지충과 반지성주의에서는 미약하나마 기호학적 분석을 해보려 노력했는데, 최근 온라인 상에 등장한 단어들이 어떤 경향을 포착할 수 있게 해주는 단초가 되리라 생각했던 까닭이다. 푸코의 서술에서 활용되듯 사용하는 언어의 미시적 심층적 분석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의미가 분명 있다.

전반적으로 조사방법과 연구설계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조사방법론 교재에서 말하듯 ‘관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와 자료가 결핍된 주장은 한낱 사변에 불과’한데 사변만 주구장창 늘여놓은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이론이나 주장은 사회조사를 통해 뒷받침되고 검증되어야 하는데, 이론이나 주장을 꺼내는 것만 해도 벅찬 일이라서 그랬지 싶다. 깊이보다 폭을, 나무보다 숲을 보려했지만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Ⅳ. 반지성주의의 이론적 모색


1) 지성이란 무엇인가

선행연구검토에서 ‘한국의 반지성주의’에 이론적 정립의 필요성을 느껴 부족하나마 시작해보려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반지성주의가 무엇인지, 지성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분석으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반지성주의를 말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다소 이론적 시도가 될 테다.

그렇다면 반지성주의가 무엇인가 논하기 전에 먼저 지성에 대한 원론적 검토를 해보자. 자, 지성이란 무엇인가. 일단 지성과 지능을 구분해서 살필 필요가 있다. 이에 유의하자.

그렇다면 지성이란 무엇인가. 지성(intellect)과 지능(지적능력, intelligence)개념의 일반적인 어법을 살펴보자(세간의 편견을 이해하려면 우선 일반적인 어법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지적 능력은 아주 좁고 직접적이며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적용되는 두뇌의 우수함을 가르킨다. 반면에 지성은 두뇌의 비판적이고 창조적이고 사색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지적 능력이 어떤 사안을 파악하고 정리하고 조절하는 것인 데 비해, 지성은 음미하고 숙고하고 의문시하고 이론화하고 비판하고 상상한다(호프스태더, 1963 : 49).

호프스태터가 지성에 대한 깔끔한 정리를 해주었다. 이에 따르자면 양적, 질적 구분도 가능해 보인다. 지능이 똑똑함의 척도(IQ) 혹은 지식의 양에 대한 맥락에서 사용된다면 지성은, ‘비판적이고 창조적이고 사색적인’ 측면이다. 그러므로 지성은 태도와 자세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지성은 ‘똑똑한’게 아니라 숙고의 차원을 가지는 것이다.

다음으로 모리모토의 논의를 보자. 그 또한 지성과 지능을 구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성의 중요한 속성을 드러낸다.

‘반지성주의를 말하기 위해서는 ‘지성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두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자. 지성(intellect)은 지능(intelligence)과 다르다. 지능은 인간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다. 지성적인 동물이나 기계는 없다. 즉 지성은 인간만이 가시고 있는 능력이다. 이처럼 분명한 용법의 차이는 지성이 단순히 무언가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자기반성 작업을 포함한다는 점일 것이다. 지성은 그 능력을 행사하는 행위자, 즉 인간이라는 인격과 자아의 존재를 시사한다. (중략) 지성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반지성’의 의미도 단순히 지식 작용 일반에 대한 반감이나 멸시는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중략) 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이 아니라 지성의 자기반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지성이 부지불식간에 월권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권위를 부당하게 확장해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것을 민감하게 확인하고 견제하자는 것이 반지성주의다.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애초에 지성에는 그런 자기반성 능력이 수반되므로, 그렇지 않은 지성은 지성이 아니며, 따라서 결국 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어느 쪽이든 반지성주의란 지성의 유무가 아니라 지성의 작용방식에 의문을 품는 것이다(모리모토 안리 : ).

모리모토가 언급한 ‘반지성주의’의 긍정적인 측면을 제외하기로 했지만, 지성에 대한 모리모토의 견해는 참고할 만하다. 지성에 자기반성 능력이 수반된다고 말한 점은 지성의 속성에 ‘성찰성’이 자리한다는 뜻이다. 반지성주의의 현상 – 남성 중심 온라인 공론장을 분석한 김수아가 ‘성찰성의 부재’를 지적했던 것을 상기하자.

‘노자의 사상처럼, 지성은 아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지성주의는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으며, 이미 안다고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단순하고 교조적 지식만을 그 구성원이 피할 수 없는 지식으로 만들어 정의의 경계선을 낮추려 하는 노력은 그래서 인권 침해를 일으키기 쉽다(Cohen, 2000/2009 : 김수아 재인용).’

지성의 속성은 본질적으로 겸허하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말했다. 반면 반지성은 안다고 강하게 ‘확신한다.’ 지성은 무엇을 모르는가에 대한 자기-진실성이자 자기 객관성,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성찰성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지성을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에 기반해 지성이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임을 유의하자. 지성의 작용은 본질적으로 생산적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의 지점을 톺아보며 숙고하는 지성의 속성은 필연적으로 정의와 자유, 평등의 개념으로 이어진다. 자기 안의 그릇을 넘어 공적인 그릇으로 이어져야 한다. 초역사적으로 지성의 역할이 건설적이라면 말이다.

지성의 역할은 자신의 위치성을 객관적으로 자각하고, 공정함을 보편자의 위치에서 생각하도록 한다. 대개의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과 살아온 환경, 그리고 삶의 맥락에서 사유하지만, 지성은 그 차원을 한층 넘어서 타자의 입장에서, 타자의 고통에서 사유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한다.


2) 반지성주의란 무엇인가

앞에서 지성이 ‘비판적이고 창조적이고 사색적인 측면’임을, 자기반성적‧성찰적 능력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반지성주의는 무엇인가. 반지성주의를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물론 이 분류는 엄격하지 않다. 반지성주의가 느슨하게 혹은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는 측면이 있는 까닭이다. 세 가지로 드러난다. 이 양상의 상호작용으로 반지성주의가 나타난. 반지성주의 경향·현상·태도·상태는 다음을 말한다.

첫째, 반지성주의는 지성, 지식, 지식인, 전문가에 반(反)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는 호프스태만의 정의에 기반을 둔다. ‘정신적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이며, 또한 그러한 삶의 가치를 언제나 얕보려는 경향’이다. 지식인에 대한 환멸. 전문가에 대한 환멸. 검증된 지식보다 경험이 앞서는 현상 또한 이곳에 포함된다.

둘째, ‘사실을 들이대도 인정하지 않는, 팩트체크를 아무리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현상으로 ‘이성적·합리적 소통을 수용하지 않는 정신상태나 태도’이기도 하다. 이는 인지편향과 깊은 관계가 있다. ‘편향에 갇혀 사실 혹은 팩트에 대한 인식이 어려운 상태이지만 그러면서도 팩트에 대한 동경은 있다. 반지성주의는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지성의 유무나 정도와 관련된 개념이 아니라 지성의 작용방식을 가르키는 개념이다. 반지성주의의 지성 작용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팩트에 대한 집착이다(강준만 : 43p).’ 완고한 벽이 그들로 하여금 지성의 작용을 가로막는다.

셋째, 앞서 톺아본 ‘지성’에 반(反)하는 의미로서 자신의 영역 내에서만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고, 그 경계 바깥의 약자·소수자에 대해서는 혐오·환멸의 태도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라영의 “알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는 혐오, 막말 현상에서 보이듯이 약자·소수자에 대한 환멸과 증오로 이어지는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Ⅴ. 한국의 반지성주의


1) 반지성주의와 반페미니즘

<시사IN>에서 <20대 남자, 그들은 누구인가>를 제목으로 질문 숫자가 208개에 이르는 여론조사를 진행했다(20대 남녀 500명, 그 외 연령 500명 조사, 조사 요청대비 응답률 8.1%, 조사 참여자 대비 응답 비율 76.7%). <시사IN>과 한국리서치의 공동 기획으로 진행된 이 초대형 여론조사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신세대의 현주소를 아는데 매우 귀중한 통계자료를 제공해준다.

본 조사는 ‘20대 남자 현상’을 이야기하며 최근 곳곳에서 범람하는 논쟁들과 혐오의 원인을 알고자 했다. 이에는 보수화 가설도, 공정세대 가설도, 시험 공화국 가설도, 반(反)페미니즘 가설도, 여성혐오 가설도, 세대갈등 가설도 어느 하나로는 마땅치 않다는 가정을 한다.

반지성주의 연구도 마찬가지다. 무수한 요인들이 교차되고 얽혀서 ‘현상’과 ‘경향’으로만 드러날 뿐, 어느 하나의 인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중 반페미니즘이 큰 요인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먼저 20대 남성에 초점을 맞추어 통계를 분석해보자.

1-1. ‘여성 차별 문제 심각한가?’ 문항에서는 20대 남성의 60.8%(전혀 심각하지 않다 23.8% + 별로 심각하지 않다 37.0%)가 심각하지 않다고 응답했다.

1-2. 반면 ‘남성 차별 문제 심각한가?’ 문항에서는 20대 남성의 68.7%(대체로 심각하다 38.2% + 매우 심각하다 30.5%)가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2-1. ‘노동시장에서 남녀 취업 기회는 공정한가?’ 문항에서 20대 남성은 45.9%가 “공정한 편”, 29.2%가 “남성에게 불리”라 답했다. 전체 응답자의 “여성에게 불리”가 49.1%임에 비하면 매우 격차가 크다.

4-1. ‘남녀간에 법 집행이 공정한가?’ 문항에서 20대 남성은 54.6%가 “남성에게 불리”하다 답했다. 20대 여성도 30.1%가 “여성에게 불리”하다 답했을 뿐인데 말이다.

1-1, 1-2에서 보이듯이 20대 남성은 성차별 및 성별 격차를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2-1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노동시장에서 남녀의 취업 기회는 공정한가?’에 대하여 2018년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성격차지수(Gender Gap Index)'에서 한국은 144개국 중 118위로 뒤에서 찾는 게 차라리 빠른 순위를 기록했다. GGI 지표 중 ‘경제참여 및 기회(121위)’는 경제활동참가율, 유사업무 임금성비, 추정소득, 관리직 비율, 전문직 비율에서의 성 격차를 측정함으로써, 노동시장에서의 공정성을 나타내는 지표다. 명백한 격차가 분명함에도, 20대 남성은 이를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세 명 중 한 명 꼴인 29.2%는 “남성에게 불리하다”는 답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들이 얼마나 인지편향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20대 남성이 성차별 및 성별 격차를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남성 마이너리티 자의식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기존의 ‘역차별’이 남성 우위 구조를 전제하고 쓰였던 말이라면, 20대 남성은 이제는 ‘정말로’ 남성이 약자라 의식한다. 이것은 현실구조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어렵고, 자기 경험적 맥락에서 유추할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강준만(2019)의 분석처럼 ‘가용성 편향’과 ‘확증 편향’ 등을 통해 해석할 수 있다.

‘가용성 편향’은 어떤 문제나 이슈에 직면해 무언가를 찾아서 알아보려고 하기보다는 당장 머릿속에 잘 떠오르는 것에 의존하거나 그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말한다. 즉, 자신의 경험 혹은 자주 들어서 익숙하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Kahneman 2011/2012, 191 : 강준만 재인용)

대한민국이 성평등이 이루어진 국가인지 아닌지, 성차별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미안하지만 통계청 들어가면 나온다. 하지만 20대 남성들은 통계청에 들어가지 않는다! 자기 세계에서 자기의 경험에 철저히 근거한다.

다음을 보자.

5-1. ‘페미니즘은 남녀의 동등한 지위를 추구한다.’ 문항에 20대 남성의 62.3%(전혀 동의 않함 44.5% + 별로 동의 안함 17.8%)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5-2.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다.’ 문항에 20대 남성의 78.9%(매우 동의 59.0% + 약간 동의 19.9%)가 동의한다고 답했다. 20대 남성은 페미니즘이 남성 차별을 만들어낸 주역이라 의식하고 있었다.

5-3. ‘페미니즘은 한국 여성의 지위 향상에 기여해왔다.’ 문항에 20대 남성의 64.8%(전혀 동의 안함 41.6% + 별로 동의 안함 23.2%)가 동의 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5-2와 5-3의 응답결과는 다소 모순적이다. 페미니즘이 여성 우월주의라면 여성의 지위 향상에 기여한 게 당연하지 않은가. 많이 기여했기 때문에 불만인 것이 아닌가. 하지만 리서치 결과는 다르다. 분석을 총괄한 한국리서치 정한울 연구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반(反)페미니즘이랄까, 그런 인식이 강력하게 내재화되어서, 어떤 질문을 받더라도 그걸 기준으로 일관되게 답하는 집단이 20대 남성 중에 두드러져 보인다. 20대 남성의 응답이 튀는 젠더 관련 문항 대부분은 이 집단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20대 남성 집단에서 어떤 질문을 받더라도 ‘반(反)페미니즘’에 입각해 응답을 한다는 것은, 애초에 사회에 대한 객관적인‧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론조사가 졸지에 심리조사가 되어버렸다.

<시사IN>은 여섯 개의 페미니즘 문항에 모두 ‘강한 반대’를 표한 응답자 (페미니즘 찬반 점수가 –12점인 응답자)를 표집했다. 일관되게 극단의 응답을 내뱉는 응답자는 대개 없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본 조사에서는 무려 25.9%가 나왔다. 20대 남자 넷 중 하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무엇을 물어도 ‘강한 반대’를 한다. -6에서 –11 사이의 반대자들까지 포함하면 58.6%라는 수치가 나온다.

이 ‘신념형’ 20대 남성을 분석하면 결과는 놀랍다. 이들은 1) 젠더에 관련된 모든 사안에 반대하고(“여성의 소득이 낮은 이유는 성차별 때문이다”에 신념형 20대 남성은 95.7%가 반대했다), (“남녀의 소득이 비슷한 사회가 공정하다”라는 당위적인 질문에도 58.3%가 동의하지 않았다) 2) 남자인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주장하는 수준을 넘어있으며 3)공정에 대한 집착이 있는 특징을 보인다. (객관식 채점이 아닌 평가자 주관에 의한 평가는 신뢰하기 어렵다”라는 문장에, 20대 남자의 76.1%가 동의했다)

이 ‘20대 남성 현상’은 반지성주의와 여려 면이 겹친다. 20대 남성의 반페미니즘은 반지성주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앞서 보았듯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인지편향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반지성적이라 볼 수 있다. 젠더에 관련된 어떤 문항을 줘도 다 부정적으로 응답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편, 독서시장에서 남성의 구매량이 급감하고 있다는 통계를 보자. 예스24에서 발표한 <성‧연령별 판매 권수 점유율> 통계실태를 보면 그 차이가 확연이 드러난다. 1020대 여성의 점유율은 1.8%(2014) → 1.7%(2015) → 2.2%(2016)로 소폭이나마 상승하고 있지만 남성은 큰 변화 소폭 하락한다. 결국 2016년에는 두 배 가까이 점유율 차이가 생긴다. 경향신문 기사에서 언급한 한 출판 관계자 말을 인용하자면 “출판시장에 2030 남성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한 온라인 서점의 통계에 따라 일반화를 내릴 수는 없지만, 출판시장의 동향을 관찰하는 마케터들, 특히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중심으로 최근 들어 “책 읽는 젊은 여성, 책 안 읽는 젊은 남성”이라는 언급이 계속 나오고 있다.

독서량이 적어진다고 해서 반지성주의 경향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식-지성에 대한 수요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이를 반지성주의 경향과 무관하다 말할 수는 없다.


2) 진지충과 반지성주의

언어적 분석을 해보자. 시니어 워프 가설에 잠시 기대자면, ‘사용하는 언어‧단어‧표현이 사람의 인지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사용하는 언어가 사용하는 사람의 심리를 반영함을 넘어 형성해나간다는 것이다.

‘진지충’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가히 인상적이다. 이라영(2019)은 오늘날 말끝마다 충을 붙이는 언어적 습관이 나치가 유대인을 벌레로 묘사한 것과 같이 ‘혐오하는 대상에 대한 비인간화 전략’이며 혐오하는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한다고 말한다. 그 중 ‘진지충’은 사회적 위치와 역할, 정체성, 출신 성분 등으로 혐오의 대상이 된 다른 ‘충’들과 달리 태도로 인해 혐오를 받는다며, 생각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고 말한다(이라영 : 8p).

진지함의 가치가 왜 매도당하는 것일까. 진지함은 ‘참되다, 솔직하다, 신중하다’의 의미이지 않은가. 진지함에 대한 불편함을 우리는 불편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진지충’이라는 언어는 이 사회의 지성이 처한 경계인의 위치를 보여준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그것을 생각하는 일은 피곤하다. 독설, 조롱 혹은 감정에 극도로 호소하는 신파가 더 쉽다. 이런 분위 속에선 생각의 범위뿐 아니라 감정의 영역도 협소해진다(이라영 : 10p).

진지함이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되면서 지성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을 향한 조롱과 경멸이 점점 만연해가고 있고, 이를 우리는 반지성주의 경향이라 부른다.

작금의 난상토론을 보면 진지한 검증과 논의는 쇠락하고 조롱과 혐오만 오고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유는 피곤한 일이고, 잘 먹히지도 않는다. 감정에 호소하고 조롱으로 상대를 매도하고 낙인찍는 게 더 쉽다.

사이버 세계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널리 쓰이는 용어가 바로 ‘입진보’와 ‘선비질’인데, 상대를 이런 용어로 규정해버리는 순간 소통은 사실상 불가능해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입만 살아 나불거리는 사람으로 폄하해버리는 상황에서 그 어떤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이런 행동 편향은 위선에 대한 과도한 혐오를 수반한다(강준만 : 2016)

‘씹선비’는 전형적인 지식인 혐오를 드러낸다. 주로 유튜브 온라인 공간에서 이 경향은 두드러진다. 논리는 중요하지 않다. 진지한 태도도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문장에 ‘ㅋ’을 쓰지 않으면 돌아오는 반응은 “왜 정색하냐”다. 1020이 축을 이루는 온라인 공간에서는 날마나 끊임없이 유행어가 터져나온다. 진지함에 대한 멸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근래에 등장하는 언어들은 지성을 작용을 멈추게 하는 판옵티콘의 역할을 한다. 오글거린다는 말이 나오자 사람들에게 감성이 사라졌고, 선비라는 말이 나오자 절제하는 사람이 사라졌고, 나댄다는 말이 나오자 용기있는 사람이 사라졌고, 설명충이라는 말이 나오자 자신의 지식을 나누려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3) 반지성주의와 물신주의

신세대의 반지성주의를 말할 때, 물신주의는 꼭 나오는 이야기다. 물신주의는 돈을 우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를 이야기함에 앞서 7080의 반지성주의를 생각해보자. 광화문 거리에서 형형색색의 국기를 흔드는 노인들에게서는 마치 어떤 믿음이 보이는 것 같다. 이 믿음은 사유와 지성의 작동보다 훨씬 앞선다. 퀴어퍼레이드에서 반-동성애 집회를 여는 시위대의 피켓에는 과학계에서 자명하게 사실이 밝혀진 거짓들이 적혀있었지만, 그들은 그 피켓을 굳은 믿음으로 들어 올렸다. 보수 기독교가 움직이는 매커니즘이 이와 같다. 이 믿음의 근원은 무엇일까. 믿음의 뿌리를 파다보면 그 안에 ‘우상’이 있다. 그들은 박정희 혹은 목사라는 우상을 섬기고 그 우상이 그들로부터 하여금 지성의 작용을 멈추도록 한다.

본질적으로 신세대도 우상을 섬긴다. 신이 죽은 시대이기에 신을 섬기지는 않지만 그들은 돈을, 물질을 섬긴다. 돈이 많으면 명예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행복을 모두 거머쥘 수 있다. 2012년 첫 방송 후 매년 인기를 끄는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쇼미너머니를 보자. 그 이름부터 Show me the ‘Money’다. 래퍼들의 가사는 모두 돈을 극찬‧동경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SNS를 통해 스포츠카를 자랑하고 금목걸이를 흔든다. 신세대에게 성공의 상징은 쇼미더머니 우승자다. 혹은 건물주거나. 이에 홀려 수많은 이들이 오디션에 지원한다. 학교의 교실에서는 어느새 모자를 눌러쓰고 돈이 최고니 다 꺼져버려 어쩌고저쩌고 랩을 흥얼거리는 ‘힙질이’들이 넘쳐난다. 도덕과 윤리는 식상하고 구시대적인 것으로 전락했고, 돈에 대한 욕망은 한치도 비판받지 않는다.

이렇게 자리한 물신주의는 다른 가치들을 파괴하고야 만다. 타자를 지배하는 수단으로 자본이 역할을 하게 되면 가장 먼저 파괴되는 것은 지성이다.

‘소비로 비판 욕구를 없애버리는 체제가 일차원적 인간을 양성한다. 이 ‘기만적 자유’속에서 느리게 흘러가는 ‘사유의 습관’이 점차 낯설어진다.(이라영 : 13p)

비판 욕구는 소비 욕구로 대체된다. 지식인의 몰락이 이루어진다. 이라영은 정치의 팬덤화를 예로 든다. 더 이상 날카로운 단어들로 시대를 관찰하고 분석해내는 지식인에 대한 갈망은 없고, 유명인사 - 이를테면 유시민, 강신주 – 같은 ‘스타’들만 선호하기 때문이다. 비평과 비판은 진영 논리에 가로막혀 그 힘을 잃는다.

물신주의가 팽배한다는 것은 모든 사고방식이 비용 편익 분석(Cost-benefit analysis)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손익을 철저하게 계산하고 그 결과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당성을, 정의를 보장한다.

한 예로, 성공회대학교에서는 올해 3월 학내 복사실 문구점과 계약해지 및 입찰공고를 통보했다. 입찰에서는 타 인쇄기업이 임대료에서 점수 차로 낙찰되었다. 몇 년간 학내에서 일해온 사장님 부부는 갈 곳을 잃었다. 필자는 복사실 문구점 지킴이로 활동하며 학우들 연대 총괄을 맡았다. 사회융합자율학부 학생회와 미디어컨텐츠융합자율학부 학생회는 적극 연대했다. 애초에 진보성향을 두드러지게 보이고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이 ‘필수’로 여겨지는 분위기라 당연한 결과였다. 문제는 인문융합자율학부 학생회와 IT융합자율학부 학생회였다. (이들을 사회의 보편 20대 표본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적당히 사회참여적이지만, 크게 관심은 없는 수준의) 이들은 복사실 문구점 문제에 연대를 철회했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나.

그들은 ‘룰의 공정성’과 ‘법치주의’를 말했다.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 없는 공정한 경쟁 절차에 따라서 진행된 입찰이 어째서 문제냐는 논지다. 무엇보다 그들은 새로 들어오는 업체가 신설설비를 들여놓고 낮은 단가로 장사를 한다면 더 좋지 않냐고 주장했다. () 인문 학생회는 이렇게 돌아섰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권보다 절차이며, 당위보다 손익이다. 그들을 설득해내기 위해서는, 기존의 복사점이 있는 게 어째서 더 금전적으로 유리하고 더 이득인지를 말해야 했다. 쫒겨나는 사장님, 갈 곳 없는 사장님, 총무처와 학교의 기만, 약속 어김, 공동체의 훼손 같은 말들은 한낱 ‘감성팔이’일 뿐이었다. 지성이 약자와 소수자에게 향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지성이 타자에게 공감하는 능력으로 이어지는 능력이라면 이 사례는 반지성의 사례다.

이는 여타 대학 학생회의 기조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2012년 3월 고려대 학생대표자회의에서 시간강사와 청소노동자 노조의 투쟁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안건이 학생대표 57명 중 31명의 안건으로 통과 되었다. 이들의 논조는 ‘시간강사의 강의의 질이 떨어지고, 학내 비정규직의 임금이 올라가면 등록금이 올라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2019년 2월 서울대학교에서 시설관리직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학내 3개의 건물의 기계실 문을 걸어잠그고 임금 현실화의 요구를 하였고, 중앙도서관의 난방이 그 가운데 중지됐다. 그러자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학습권을 근거로 ‘파업대상에서 중앙도서관은 제외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에게는 사회가 없다. 하종강 교수의 말처럼 ‘다른 나라에서는 청소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사람들이 쓰레기를 모아서 시장 집 앞에 버리는 운동을 한다’. 서울대 총학생회의 입장은 파업하는 청소 노동자들에게 우리 집 쓰레기만 치워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더 이상 정의에 호소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어떤 가치들은 퇴색되었고 죽었다. 이는 지성의 작용을 어렵게 할뿐더러, 물신주의가 전면적으로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어느새 우리에게 경제성‧효율성은 자명해졌다.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따라 모든 것이 경제화 되는 세계적 흐름 속에 우리가 있다 하지만 지성은 효율적이기도, 경제적이지도 않다. 지성은 경제만능주의‧물신주의의 폭주를 멈추는 최후의 보루역할을 해야한다. 나아가고 있는 길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야한다.

5) 학벌주의와 반지성주의, 맹목적 교육

2000년대 초부터 학벌 사회라는 비판은 곳곳에서 터져 나왔지만, 『학벌사회』의 저자 김상봉의 말처럼 ‘정권과 나라가 바뀌어도 100년 넘게 굳건한 온상을’지키는 게 학벌주의다. 전반적으로 학벌주의와 물신주의 모두 권력을 좇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지성의 본거지인 대학이 한심한 취직소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터져나온지는 꽤 시간이 흘렀다. 대학을 CEO가 운영하며 그 안에는 효율성의 원리가 자리 잡는다. 대학이 더 이상 지성의 공간으로서 자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은 지성의 상아탑 자격을 박탈당한지 오래다. 대학은 취업의 관문으로 전략해버렸다.

‘지식’조차 실용적 지식만 각광받고 있다. 경영학이 무려 전체 학과개설 과목의 30%를 차지한다. 정부 기조에 힘입어 대학의 학과들은 ‘돈 잘 버는 학과’로 재편성, 구조조정 된다. 스펙은 본질적으로 실용주의적이다. 쓰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가치가 평가받는다는 것은 오래간 인문학 전공자의 한탄에서 드러나왔다. 이를 통해 실용주의의 흐름이 반지성주의의 흐름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실용학문에의 관심은 자신의 안위에 대한 고민만을 강화할 뿐 그것이 소명과 역할을 다함을 말하지는 않는다.

학벌주의는 비판의 자격을 ‘SKY’에게만 준다. 한편에서는 ‘전문가’의 의견조차 신뢰하지 않는 반지성주의가 있는가하면, 한편에서는 ‘SKY’가 아니면 자격이 없다며 자격론을 들이민다.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는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정통법 위반 구속 사건에 대한 20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미네르바가 내놓은 경제예측이 정보통신법 위반이라며 검찰이 그를 구속한 사건에 대해 한 20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솔직히 전문대 출신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가 말한 것이 전문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사실상 증명된 것 아닌가요? 표현의 자유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건 분명하죠. 하지만 비전문가가 전문가 행세를 할 표현의 자유가 전적으로 주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당당했다면 왜 처음부터 본인의 학력을 밝히지 못했나요? 지금의 많은 젊은이들이 ‘당당해지기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오찬호 : 60p)”

학벌주의가 이렇게 작동한다. 경쟁원리, 즉 공정성의 틀에 모두 동감하고 있는 한편 학벌은 ‘당당한’ 수단으로 언급된다. 이는 지금의 신세대들에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인, ‘룰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은 삼가지만 룰의 적용형평성(이걸 형평성이라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에 대해서는 극도로 예민하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

앞서 본 복사실 문구점에 사태에서 두 학생회가 ‘절차’를 를 강조한 점을 떠올려보라. 이 ‘공정성’에 대한 민감함은 이를테면 정유라의 입시 부당행위나, 기업의 입사 특례-부정 채용에 대해서는 잘 드러났다. 신세대들은 극도로 분노하지만, 그 이유가 ‘룰이 공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학벌사회 등 계급구조의 불합리나 채용에서의 본질적 부조리 때문이 아니다. 구조적 불합리에 대해서는 ‘원래’ 있었던 것이므로 쉽게 순응한다. 군대도 다르지 않다. 남성들은 징병제가 가지는 불합리성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는다. 만약 성재기를 비롯한 남성연대가 사회구조에 대한 조금의 식견이라도 있었더라면 군가산점으로 통탄할 것이 아니라 모병제 전환운동이나 장병처우개선운동을 했을 것이다. 구조적 착취와 불합리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사유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약자-소수자에게 화살을 돌리는 몽매한 방식이 여기서 시작한다. 이 사고방식이 우리에게 크게 낯설지 않은, 오히려 ‘일반적’이라 부를 수 있는 대상의 것이라는 걸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제도가 정당한가 묻지 않는 무사유성 말이다. 입시체제의 정당성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지만 세월호 특례 전형에 대해서는 “꿀빤다”고 배 아파하는 모습 말이다. 이 모습이 꼭 맞다. 개인화된 사회에서 공적이 가치에 대해 무관심한 모습이 안타깝다.

‘개인이 사회적 원인으로 고통 받는 상황이 늘고 있다는 게 현재 이십 대가 처한 상황의 한 특징이라면, 이를 사회적 원인에서 비롯된 문제로 이해하지 않는 것 역시 지금 이십대가 지닌 특징의 하나로 보인다.(오찬호 : 90p)’

학벌로 층위를 나누고 입시지옥에서 모두가 경쟁에 몰두할 때 지성은 어떻게 작용할까. 확실한 것은 ‘경쟁’은 더 이상 불가침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앞서 본 <시사IN> 여론조사를 떠올리자. (객관식 채점이 아닌 평가자 주관에 의한 평가는 신뢰하기 어렵다”라는 문장에, 20대 남자의 76.1%가 동의했다) ‘경쟁’에 대한 세대‧성별을 막론한 광범위한 지지를 볼 수 있었다. 설문조사의 결과처럼, 경쟁원리가 이토록 내면화되어 있다.

입시경쟁에서 생각의 숙성은 소거된다. 시간 관리와 시간 강박, 자기계발의 강박만 남는다.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자신을 되돌아볼 틈은 없다. 지성이 성찰과 숙고에 많은 부분 기대어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 경쟁이 보편화되면 삶의 속도가 빨라진다. 경쟁 원리의 추구는 우리 삶의 속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신자유주의 자기계발 원리에서 삶의 속도는 빨라진다.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특히 그렇다. 삶의 속도와 지성 또한 관계가 있다. 다음 실험을 보자.

일리노이 대학 심리학과의 린다 스캇 과 연구자들은 2002년 논문 Disposit-ions, Scripts, or Motivated Correction?에서 흥미로운 실험결과를 보고한다. 후천성 면역결핍증(AIDS) 환자의 치료비를 공공이 도와야 할까? 보수 성향의 응답자들은 그 환자가 성폭행이나 수혈 등 외부 원인으로 감염되었을 경우에만 돕는 데 찬성했고, 진보 성향의 응답자들은 자신의 책임으로 감염된 환자들도 도와야 한다고 응답했다.

흥미로운 것은, 실험자들은 응답자에게 실험실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높낮이를 판단하는 과제를 주었다. 질문과 상관없는 일에 신경을 쓰도록 주의를 분산시킨 것이다. 응답자들은 그 과제를 하면서 동시에 같은 질문에 답을 했다. 그러자 보수·진보 양쪽 다 공공의 치료비 보조에 반대 응답이 올라갔다. 공정의 문제를 판단할 때 다른 과제로 인지 부담을 주면, 응답자들이 덜 섬세해지고 더 단호해진다.

간단하게 생각을 전개하자면, 지성은 차분한 여유 속에서 피어난다. 심사숙고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느림의 미학 속에서 지성은 발동한다. 곰곰이, 고심해서, 심사숙고해서, 숙고해서 사유하는 것이 지성이다.

입시경쟁은 이 느림의 미학을 파괴한다. 수능이라는 전쟁을 위한 속도전이고, 이 ‘속도경쟁이 생각하기를 방해한다. 속도 경쟁 속에서 다른 것은 다르게, 복잡한 것은 복잡하게, 모호한 것은 모호하게 생각의 숙성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이라영 : 15p) 수능 국어지문을 푸는 걸 상상해보자. 비문학 지문이 조금만 길어도 불평이 그윽하다. 요약하고 축약해서 요점만 빠르게 파악해야한다. ‘긴 글’에 대한 거부감은 점점 상승한다.

삶의 속도는 지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경쟁 원리가 내면화되어 자기계발의 강박에 매일을 쫒겨 사는 이에게 지성이 작용할 리 없다. 학벌주의가 반지성주의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까닭은 그 자체로 맹목성을 낳고, 대학을 지성의 전당에서 계급장으로 전락시키며, 내면의 경쟁원리를 자극해 삶의 속도를 강박적으로 빠르게 만드는 데 있다.



Ⅵ. 결론, 맺음말


반지성주의는 크게 세 가지 태도로 드러난다. 1) 지성, 지식, 지식인, 전문가에 반(反)하는 태도 2) 사실을 들이대도 인정하지 않는, 팩트체크를 아무리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 3) ‘지성’에 반(反)하는 의미로서 자신의 영역 내에서만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고, 그 경계 바깥의 약자·소수자에 대한 혐오·환멸의 태도.

이를 염두에 둔 채 신세대에서 드러나는 반지성주의의 원인을 찾아보려 했다. 정리하자면 1)반여성주의 2)물신주의 3)학벌주의에 그 적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셋은 기본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원리가 같다. 시공간의 특수성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 보일 뿐이다. 더하여 이 ‘주의’들은 성찰성의 부재와, 인지 편향 등에 근원적인·심리적인 원인을 두고 있다. 원인이라기보다 상호관계라 볼 수도 있겠다. 구조는 늘 재생산하는 주체와 구조의 적용성을 바탕으로 순환하므로.


‘어쩌면 이 빠름과 요약을 권하는 시대에 부응하지 않으려면 더욱 불친절하고 느리게 생각하는 태도를 고집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제 생각의 지도를 스스로 작성하면 길을 잃지 않는다(이라영 : 16p).’


우리는 이런 시기일수록 더욱더 수고로운 일들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손으로 글을 쓰고, 고전을 들여다보고. 정보의 홍수에서 의연하게 자기 생각의 둑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마법으로 얻은 것들은 쉬이 사라지기 마련이니까.’라는 대사처럼. 모든 것이 숨가쁘게 흘러가는 변화의 시대에서 느리고 쉬이 변치 않는 것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보고서를 쓰는 내내 이 지난한 과정을 통해 자기성찰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반지성주의’라는 낱말을 빌려 게으른 사유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낱말을 쓰면서 이해할 수 없는 대상과 현상들을 ‘반지성주의’라 이름붙이고, 나는 그 속에 있지 않은 ‘지성인’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특히 인지 편향에 대한 참고문헌을 읽을 때에는 가슴이 뜨끔뜨끔했다. 가용성 편향, 즉 뇌피셜, 무언가를 찾아보려 하기보다 내 머릿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라던가, 이기적 편향, 자신의 부정적인 행동이나 사건에 대해서는 상황적·환경적 요인으로 돌리는 반면, 자신의 긍정적인 행동이나 사건에 대해서는 자신의 내부적 요인으로 돌리는 경향이라던가. 내가 이 편향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반지성주의자가 아님을 확증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작년에 썼던 ‘한남의 심리’보고서에서는 ‘도대체 한남들이 왜 그렇게 사고하는가?’하는 질문으로 출발했었다. 이번 보고서에서 반지성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그 해답에 점점 가까워지는 듯하다.

이 연구는 한국의 반지성주의를 개괄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깊이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없다. 다음 연구에서는 각 목차들의 빈 공백들을 채워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Ⅶ.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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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3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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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서울대 ‘난방 파업’이 보여준 우리 사회의 민낯. 2019.02.12



* 2019.6.23 김동춘 교수의 <정치사회학> 기말레포트로 제출한 글입니다.

* 한글문서의 각주가 불러오지 않아 그냥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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