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문제의 근원을 찾아서, 지오멘탈리티와 커머닝의 재구상
Ⅰ서론
1. 무언가 잘못되었다
어쩌다 사는 ‘곳’이 사는 ‘것’이 되어버렸을까.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손낙구 선생이 우리 사회를 ‘부동산계급사회’라 이름붙인 후 열 해가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지금의 사태와 부동산 정책을 보면 한결같다.
사태는 심각하다. 열 명 중 네 명은 단 한 줌의 땅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데, 맨 위의 한 명은 전체 땅의 6할을 독점하고 있다. 심각한 통계들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PIR(소득대비 주택가격 비율)은 10으로 세계 4위다. 10년 간 한 푼도 쓰지 않고 저축해야 중위 소득의 주택을 한 채 살까 말까다. 한국의 가계부채는 세계 3위에 올랐다. 이 통계들은 한국의 극심한 불평등과 왜곡된 경제구조의 대부분을 설명해준다. 불로소득이 발생해 성실한 노동과 정당한 소득이 천대받고, 부동산 불패 신화가 만들어져 사람들은 돈이 모이면 그 돈을 부동산에 바친다. 기업은 생산에 투자하지 않고 땅 투기를 한다. 법과 제도, 정부의 주택 정책, 부동산학자와 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작은 투기를 뒷받침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현실의 진단은 이정도로 하고 그렇다면 왜 이 사단이 났는가. 문제의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대안을 제시할 것인가. 문재인 정부 들어 여러 번의 부동산 대책이 있었고, 얼마 전에는 12.16 대처가 있었는데, 진단도 대처도 아리송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지 못했을뿐더러 개혁적 실효성도 없다. 한심하다는 말만 해두고 일단 넘어간다.
2. 관점 전환의 필요성과 힌트들
그럼에 부동산 문제를 대하는 근본적인 관점 전환의 필요성을 느낀다. 지금까지는 부동산 문제를 불평등의 문제로만 치환하여 불로소득 추산과 불평등 통계에만 집중하였다. 무척 유의미하고 필수적인 작업이었으나, 이는 ‘경제주의’적 관점의 한계를 가진다.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 소유에 초점을 두다보니 그 외의 문화적 심리적 양상들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손낙구 선생을 비롯 토지+자유연구소의 연구에서 아쉬움이 있는 부분이다.
부동산 문제를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로 축소시켜버릴 때 사회 심리적 영역 혹은 공동체의 해체와 박탈감, 소외감을 놓치게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나는 힌트를 윤홍기 교수의 지오멘탈리티(Geo-mentality)라는 개념에서 찾았다. 지오멘탈리티는 사람들의 마음속(무의식 수준)에 오래도록 자리하고 있는 ‘땅을 보는 마음틀’을 이른다. 땅은 자연의 한 번 굳어진 ‘마음틀’은 무의식화 되어 있어 바꾸기가 쉽지 않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묻기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한 번 만들어져 자리 잡은 지오멘탈리티는 논리에 바탕을 두지 않는 까닭이다. 부동산 문제를 집값을 기준과 지표로 삼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리적 측면에 주의하여 살피는 것이 어떤가.
또 다른 힌트는 ‘커먼즈-커머닝’이론이다. 안새롬 연구자의 대기 커먼즈 연구 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대기와 토지같이 인간이 만든 것도 소유할 수도 없는 자연은 커먼즈를 넘어 커머닝의 시선으로 접근하여야 한다. 토지공개념, 지공주의는 분명 커먼즈 이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테지만 헨리 조지를 필두로 한 토지공개념은 어느 정도는 토지와 인간의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근대적 오류를 저지른다. 이하의 경제주의적 오류 또한 이 곳에 기인한다. 그럼에 땅을 포함에 땅과 공동체가 맺고 있는 관계에 주안점을 두어 살펴보자. 토지공개념을 한 단계 넘어가는 이야기다.
마지막 힌트는 다산에게 얻었다. 근본적인 개혁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우리 역사상 가장 명석하고 급진적인 다산의 이론에 기댄다. 왜 이 땅의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맑스와 헨리조지만 들여다봐야 하는가. (물론 헨리 조지 사랑해요) 헨리 조지와 칼 폴라니 맑스의 사유를 이 땅에 적합한 모델로 모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한국의 지공주의, 경자유전의 사상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다산 정약용의 토지론을 들여다보면서 개혁의 요건과 가능성을 살핀다.
3. 새 기획, 세 기획
새 기획이 필요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 연구에서는 세 기획을 준비했다. 첫째, 커먼즈-커머닝 이론을 확장하여 부동산 문제가 집값을 넘어 사람들의 피드백·작용과 관련있음을 밝힌다. 둘째, 지오-멘탈리티의 담론을 확장하여 부동산 문제의 심리적 측면을 들여다본다. 셋째, 정약용의 토지론을 통해 대안의 가능성과 아이디어를 얻는다. 이상의 기획을 통해 부동산 정책과 연구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한다.
부동산 문제는 집값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공간의 문제다. 삶을 지속할 공간의 박탈의 문제이고,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 드는 오만의 문제다. 급진적인 것은 근본적인 것이다. 급진적이라 불리는 아이디어로 현실의 전환을 이룰 안을 제시한다.
Ⅲ 지오멘탈리티
내 땅 내 집 마음대로 한다’는 극단적인 부동산관, 사유재산 제일주의가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본질입니다. 부동산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의 ‘마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이 ‘관(館)’을 ‘지오-멘탈리티(Geo-mentality)’라 부릅니다. 이 ‘마음틀’은 사람들의 마음속 무의식 수준에 오래도록 자리하고 있어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도 하지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묻기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한 번 만들어져 자리 잡은 지오-멘탈리티는 논리에 바탕을 두지 않습니다.
부동산 계급사회의 주범은 땅을 사고 파는 ‘재화’로 보는 시선입니다. ‘집’이 아니라 ‘부동산’으로,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으로 여기는 지오-멘탈리티가 문제의 본질입니다.
이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옛날 사람의 생각은 동서양을 말할 것 없이 그렇지 않았다. 깊은 윤리관 위에 서있었다. 그들은 엄격하고 고상한 윤리적 질서 밑에 우주 만물을 통일하고, 인간 스스로가 책임을 지고 그 중심에 서는 것이었다(710쪽).”
1854년 인디언 추장 시애틀은 땅을 팔라는 미국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간디도 말합니다. “땅은 우리 모두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만 단 한 사람의 탐욕도 만족시켜 줄 수 없습니다.”
칼 폴라니(Kal Polanyi)는 토지는 노동·화폐와 마찬가지로 판매를 위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므로 상품으로 거래되는 시장경제의 원리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 말했습니다. 적어도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 하늘과 땅, 인간은 더불어 함께 공존해왔고, 소수가 독점적으로 소유하거나 사고파는 대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재산권‧소유권은 오만하기 그지없습니다. 땅을 소유할 수 있다니요. 산을 가질 수 있다니요. 본인이 만든 것도 아니면서. 우리는 모두 왔다가 돌아가는 ‘빌려쓰는 존재’일 뿐입니다. 자연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 그 바탕이 있습니까. 토지에 내 것이라고 가격표를 붙이는 것은 누구의 소행입니까.
Ⅴ 우리철학 돌아보기 - 다산 정약용의 토지개혁
1) 들어가기 앞서 – 한국철학의 현재성과 실학자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
들어가기에 앞서 한국철학의 현재성에 대해 몇 가지 말을 붙인다. 다산의 토지사상을 봤을 때 그 신선함과 우직함에 놀랐다. 그런데 어째서 주목받지 못했는가. 토지공개념을 공부하면서 이곳저곳을 배회했건만 살펴봤는데 연구가 너무 편중되어 있다. 다산의 토지론을 연구한 사람이 드물 뿐더러, 현재의 부동산 문제에 대한 대처로서 이어지는 연구는 있지 않다.
한국 학자들의 사대성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당연한 것이 되었지만 이는 충분히 분노할 문제다. 주체성을 상실한 학문은 힘이 없다. 수입된 이론만으로 구성된 대안은 이 땅에 적합하지 않다. 현실에 뿌리박고 학문을 하는 자라면 마땅히 이 땅의 역사와 생각들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사회가 점점 서구화 되가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수입만 해서 되겠는가. 하물며 첫째와 둘째 키우는 법도 다르다는데, 이 땅에 영미의 학문이 과연 그대로 들어맞을리가 있겠냐 말이다. 헨리 조지의 이야기를 우리의 맥에 맞게 번역하고 소화해야 처방을 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부동산 정책이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학자·연구자·정치가를 막론하고 실제 이 땅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책상놀음만으로는 부동산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투기가 미친 듯이 일어나는 까닭을 살펴야 하고, 주거 빈곤층의 목소리를 생생히 들어야만 한다. 공간에서도 생각에서도 괴리된 진단과 처방은 무용하기 이를 데 없다.
조봉암 선생의 토지개혁을 보면, 분명한 꼿꼿함이 있었다. 그는 토지개혁을 하기 위해 누구의 책을 밑줄 쳐가며 읽었을까. 우리의 헌법에 경자유전의 원칙을 뚜렷이 할 때, 어느 철학자의 이야기에 바탕을 두었을까.
실학자들의 실학사상에 있는 사회개혁사상의 특징에는 ‘탁고개제’의 방법이 있었다. 옛날 사람들의 도를 빌어 현실개혁을 실행하는 것으로, 실학파의 전제(田制)개혁이 모두 주나라의 정전제에 많은 빚을 진 것이 그렇겠다. 이 탁고개제의 방법이 지금 우리 사회에 너무나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 사회역사적 배경 이해(17~19세기)
정약용의 토지개혁에 앞서 당대의 사회·역사적 조건을 살피자. 조선 후반기(17~19세기)는 조선 봉건사회가 급속한 쇠락기를 걸었던 시기이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인구는 6분의 1내지 7분의 1이 줄어들었으며, 토지도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1603년 전국에서 경작할 수 있는 토지의 결수는 겨우 31%에 지나지 않았고, 경상도는 그 정도가 심하여 경작토지는 전쟁 전의 16%에 불과하였다(289p).’
20여년 후 겨우 복구에 성공했지만 또다시 두 차례의 호란을 겪는다. 세 차례의 전쟁과 그 과정에서 봉건통치자들의 잔혹한 약탈이 겹치면서 조선사회는 쇠락의 길을 걷는다.
17세기 후반부터는 완연히 회복을 되찾는다. 농업생산이 회복되고 발전되며 인구도 증가한다. 한편 수공업의 상품화되고 상업적인 농업 출현, 대외무역의 활성화로 화폐의 유통이 활발해지고, 계급분화가 격렬하게 진행된다.
“조선 후반기에는 이와 같은 사회·정치·경제적 상황과 계급관계의 변화로 인하여 사회의 여러 모순을 해결하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요구가 절박해진다.(294p).” 하지만 조선 봉건통치자들은 토지겸병과 권력쟁탈에만 급급하였고, 주류학문인 정주학은 하수인 노릇을 하며 학문으로서의 본분을 잊고 타락한다. ‘사문난적’이라는 죄목으로 조금이라도 다른 성향을 하는 학파와 해석을 단죄하는 것이 정주학자들의 일이였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 하에서 실학이 등장한다. 이들은 정주학이 실제에서 벗어나 공리공담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며 실제 생활에 쓸모있는 것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청담공론이 아니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실사구시를 학문연구의 방법으로 견지하고 실용지학을 학문 연구의 대상과 내용으로 하며, 경세치용을 학문연구의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다(290-302p)
3) 실학자들의 토지개혁
당시 지주계급과 양반관리들의 토지겸병은 도를 지나쳤고, 실학자들은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사회개혁안을 내놓는다. 토지를 건들지 않고서는 백약이 무용한 것을 실학자들은 알고 있었다.
17세기 중엽에 유형원은 ‘균전제’를 내용으로 하는 ‘과전제’를 제기하였고, 토지개혁을 실학의 중심과제로 삼았다. 18세기 전반기의 실학자 이익도 토지문제의 해결과 ‘균전제’의 실행을 실학의 중심문제로 삼았다. 18세기 말의 실학자 박지원의 「한민명전의」에서 논의된 전제개혁사상과 19세기 초의 실학자 정약용이 제기한 ‘여전제’등은 모두 토호 양반관료의 토지겸병을 방지하고 토지를 무토지 농민에게 분배함으로써 농업생산을 발전시키고 국가의 재정수입을 증가시켜, ‘부국유민’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여망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반영하는 것이었다(316p).
이들의 토지개혁은 민본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유형원은 부국안민의 근본이 토지제도의 개혁에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균전제를 내용으로 하는 과전제를 실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자는 밭도랑을 연이어 소유하고 가난한 자는 송곳 꽃을 땅도 없으니 이 때문에 부자는 점점 더 부유해지고 빈자는 점점 더 가난해진다(325p).”
박지원도 토지문제의 해결을 민생문제 해결의 근본으로 삼아, 토지의 균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전법을 제기하여 대토지 소유자의 토지겸병을 방지하고 나아가 빈부차별을 해소하려 하였다. 박지원의 소국과민의 이상은 그의 소설 『허생전』에 잘 드러나있다(326p).
홍대용도 사·농·공·상의 평등을 실행하려면 반드시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토지국유화의 기초 위에서 토지균등을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정약용은 이러한 실학자들의 이론을 집대성해 민본적 민주평등사상을 완성시켜 가고 토지개혁의 안을 제시했다. 백성의 민주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토지제도를 개혁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토지공유와 ‘농자수전’의 기초 위에서 공동노동·공동수확 및 노동에 따른 분배를 실행하는 ‘여전제’를 주장하였다. 이 농자수전의 구호는 훗날 경자유전의 토지강령에 큰 영향을 미친다(327p). 하지만 여전제의 이상적 측면으로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날 기미가 없자 다산은 ‘정전제’로 토지개혁안을 수정한다.
4) 다산 정약용의 토지개혁사상
다산 정약용의 사회이론을 짚어보자. 다산은 조선후기 체제 모순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 번째 모순은 노동을 하는 사람과 노동의 산물을 향유하는 사람의 분리이다. 그는 백성들이 피폐하고 곤궁한 것은 일부 특권계층이 노동하지 않으면서도 노동의 산물을 독점적으로 향유하는 까닭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두 번째 모순은 지배계층이 통치이념으로 민본사상을 주장했음에도 민은 정치와 국가 사회운영에서 배제되었다는 점이다(이명호, 80p).
즉 다산은 이 진단에서 토지개혁론과 위민사상을 이어낸다. 민본(위민)을 기초로 평등사상을 말하며 누구나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 함을 역설한다. 신분에 관계없이 욕구를 인정하며, 노동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양식이다. 정약용의 사회이론에서 민은 교화되어야 하는 수동적인 인간상이 아닌 (노동을 통해) 자기 스스로 행위하고 책임지는 주체적인 인간이 된다. 주자학적 인간이해를 넘어선 다산의 인간관은 노동을 통한 사회구조를 주문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다산은 이상적인 전제 개혁안으로서 여전제(여전론)를 내세웠다. 이 여전법은 농사짓는 사람만이 토지를 소유해야 한다는 경자 유전(耕者有田), 토지는 공유하여야 한다는 토지 공유(土地公有), 토지의 경작은 공동으로 하여야 한다는 공동 경작(共同耕作), 생산물은 공동 수확한다는 공동 수확(共同收穫), 노동량에 따른 수확물의 분배 등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아래를 보자.
“지금 농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토지를 얻고, 농사를 하지 않는 사람은 토지를 얻지 못하도록 한다. 즉 여전(閭田)의 법을 시행하면 나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여전이란 무엇을 일컬음인가. 산계(山谿)와 천원(川原)의 형세를 따라 획정하여 경계를 하고, 경계의 안을 이름 하여 여(閭)라고 말한다.【주나라 제도에는 25가(家)를 1여(閭)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그 이름만을 빌려서 약 30가(家) 내외로 하되, 가감이 있으니 또한 반드시 일정한 율은 아니다.】 여(閭) 셋을 이(里)라 한다.【『풍속통(風俗通)』에는 50가(家)를 1리(里)라고 하였으나 지금 그 이름만을 빌려서 반드시 50가(家)는 아니다.】 이(里) 다섯을 방(坊)이라고 한다.【방(坊)은 읍리(邑里)의 이름이다. 한나라에 구자방(九子坊)이 있었는데, 지금 우리나라 풍속에도 역시 이것이 있다.】 방 다섯을 읍(邑)이라고 한다.【주나라 제도에 4정(井)을 읍(邑)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군(郡)⋅현(縣)의 소재지를 읍이라고 한다.】 여(閭)에는 여장(閭長)을 둔다.
무릇 1여의 토지는 1여의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으로 경작하게 하고, 내 땅 네 땅의 구분 없이 오직 여장의 명령만을 따른다. 매 사람마다의 노동량은 매일 여장이 장부에 기록한다. 가을이 되면 무릇 오곡의 수확물을 모두 여장의 집【여중의 도당】으로 보내어 그 식량을 분배한다. 먼저 국가에 바치는 공세를 제하고, 다음으로 여장의 녹봉을 제하며, 그 나머지를 날마다 일한 것을 기록한 장부에 의거하여 여민들에게 분배한다.
가령 추수하여 공세와 여장의 녹봉을 제한 양곡이 천곡이고【10두를 1곡으로 한다】 장부에 기록된 노동일 수가 2만 일이라면 매 1일에 대한 분배 양곡은 5승이 된다. 한 농부가 있어 그 부부와 자식의 기록된 노동일 수가 모두 800일이라면 그 농부가 분배받는 양곡은 40곡이 될 것이다. 기록된 노동 일수가 10일인 농부가 있다면 그가 분배받는 양곡은 4두뿐일 것이다.
노력한 것이 많은 자는 얻을 양곡이 많고, 노력을 적게 한 자는 받을 양곡이 적을 것이다. 노력을 다하지 않고서 분배받는 것만 높을 수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노력을 다하면 땅은 그 이득을 최대로 내게 된다. 토지에서 이익이 생기면 백성의 자산이 부유해지고, 백성의 자산이 부유해지면 풍속이 도타워지고 효(孝)와 제(悌)가 세워진다. 이것은 토지를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정약용,『여유당전서』제1집 제11권 문집, 논, 전론3)”
여전론은 모든 토지의 사유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만 토지의 점유권과 경작권을 부여한다. 그리고 공동경작으로 설정되었다.
이는 여럿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먼저 봉건 지배층의 토지를 몰수해 공동의 소유와 공동의 경작지로 만들 수 있었다. 이는 불로소득의 대부분이 지대에서 발생함을 감안할 때 여전제 실시를 통해 불로소득 원천이 완벽하게 차단된다. 즉, 투기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진다. 다음으로 공동경작을 통해 농촌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할 수 있었다. 본래 농사가 혼자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공동경작은 건강한 마을에서 자생적으로 피어났다. 우리의 두레경제가 그것이다.
하지만 여전론은 그 급진성으로 말미암아 현실적 개혁이 어려웠기에, 다산은 실현가능한 대안으로 정전제를 말한다. 정전론은 본래 중국 고대 하(夏)⋅은(殷)⋅주(周)의 제도로 토지를 ‘정(井)’자로 9등분하여 8호의 농가가 각각 한 구역씩 경작하고, 가운데 한 구역은 8호가 공동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조세로 바치는 토지제도였다.
결국 다산의 토지개혁안은 실현되지 못했고, 폐단의 악화는 농민들의 민란으로 이어진다. 동학농민운동이 그것이다.
5) 덧붙이는 말 : 근대적 이해가 아닌 민초적 이해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정약용에 대해서 『한국철학사상사』의 저자들의 저지른 한계 및 유물론적 역사관에 대한 비판을 하고자 한다. 저자들은 정약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그는 사회역사적 조건과 계급적 한계로 말미암아 자본주의의 역사적 필연성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사회개혁의 실현을 위해서는 농민의 투쟁에 의존해야 함을 깨닫지 못하고 통치계급의 양심과 이성에의 호소를 통해 사회개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의 실학사상은 비록 봉건제도를 폭로하고 비판하였지만, 봉건사회를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하고 새로운 사회의 방향을 제시할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그가 제기한 사회개혁 방안은 공상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401p)”
하지만 이는 매우 협소하고 매몰적인 이해가 아닐 수 없다. 저자들은 서문에서 한국철학사상사를 역사적 유물론의 방법론으로 서술하겠다고 한 바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적 유물론을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에 한정지어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미 진행된 서구 근대화에 비추어 한국의 근대를 해석하려 드는 것은 치명적인 사대성이 아닐 수 없다. 사회·역사적 조건에 토대를 두어 철학의 맥을 짚고, 사상과 기득권과의 관련을 통해 그 사회성, 지배성을 보겠다는 것은 좋으나, 이는 한편으로는 매몰적인 한계를 낳고야 말았다.
이명호(2018)은 실학과 정약용에 대한 평가를 세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 근대지향적이라는 이해. 둘, 왕권 강화와 관련된 개혁안. 셋째, 사회적 모순은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지만, 시대적·계급적 한계를 극복하자 못한 개혁안이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평가들은 근대라는 개념을 기준으로 이루어진 협소한 이해이다. 정약용은 경세가 이기보다는 경학자이다. (중략) 위의 평가들은 말에 의지해서 정약용을 평가하고 있는 셈이다. 이 관점에서 정약용은 서양에 근거한 소위 보편사로서의 ‘근대’와의 거리가 아니라, 그를 배태한 조선사회, 좁게는 조선후기사회에 기초하여 이해되어야 한다(73p).”
이와 같이 다산의 맥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우리 역사의 맥에서 그의 위치를 살피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된 역사적 유물론이지 않을가.
* 2019.12.21, 김은규 교수의 <한국철학과 그리스도사상>기말레포트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