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경제, 생태
2019.9.5.
과학이란 무엇인가. 경제란 무엇인가. 나아가 생태란 무엇인가. 과학, 경제, 생태. 이 세 단어를 어떻게 정의내려야 하는지가 중요한 화두였다. 이들이 맺고 있는 관계가 궁금하기도 했다. 종종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생태는 과학이야. 내가 생태학을 공부하게 된 건 생태학이 과학적이라서 그래.”, “경제는 생태야. 이 자명한 사실을 경제학자들이 망각해서 이 모양이 된 거야.”
사회과학을 배우면서도 ‘과학’과의 관계는 늘 복잡했다. 과학과 기술이 그리도 발전했다는데, 주위를 둘러보면 파국 그 자체이니까. 개-소리를 일삼는 과학자들이 이 세상을 파국으로 치닫게 만든 주범으로 보였다. 핵발전소에 찬성하거나, 로켓 쏴서 태양열 반사판 설치하고, 대기 중에 에어로졸 살포해 지구를 냉각시키자는 해괴망측한 ‘자칭’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이마를 짚지 않을 수 없다.
저번 사회사상사 기말 레포트의 제목은 <데카르트의 주체 및 이원론·기계론적 자연관 비판 – 아르네 네스(Arne Naess)의 근본생태학과 김상봉의 서로주체성을 통한 대안 모색>이었다. 나름의 데카르트와 베이컨의 주체 개념과 기계론에 대한 비판적 시도였지만, 교수님이 좋아하셨을 것 같지는 않다.
몇 개월이 지난 지금 이 레포트에 대한 감정은 양가적이다. 베이컨과 유물론 그리고 생태학이 맺는 관계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지 못하고, 피상적‧일면적 비판을 일삼은 부분이 엄연히 존재함을 인정한다. <마르크스의 생태학>을 읽으며, 유물론적 사유는 필연적으로 생태학적 사유로 이어짐에 고개를 끄덕였던 까닭이다. 존 벨라미 포스터의 견해인, 마르크스의 변증법적‧공진화적 유물론을 지지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양정신 특유의 강박증이자 근대의‧근대적 세계관의 특성 – 총체성/전체성/완벽성을 파악하려 드는 것, 완벽하게 알 수 있다고 보는 것 – 에 문제의 근인이 있다는 생각은 분명히 남아있다.
과연 김진업 선생님의 말대로 과학은 괜찮은데 사회과학이 엉망이라 이 사단이 난 걸까. 일면 동의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이 사단을 설명할 수 있을까.
‘과학적 방법론의 특징은, 자연환경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여 더 많이 착취하게 해주는 지식을 창출하기 위해 자연환경을 도구적으로 취급할 필요를 갖는다는 점이다.’, ‘이 말처럼, 과학적 방법론 자체에 스며든 자연-착취적 요소는 없는가? 근본적으로 유물론에 대한 질문이다. 유물론에 입각해 세상과 자연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어떤 결과를 낳는가. ‘유기체적 전체로서 살아있는 자연 세계’를 ‘생명 없는 차가운 거대 기계’로 인식한 것은 누구의 탓이란 말인가.
인류의 합리적 이성과 고도 과학에 의해 생태위기를 제어할 수 있고, 인간이 생성한 파괴의 문제는 인간 진보의 부산물이기에 과학기술을 통해 극복하면 된다고 여기는 이(Eco-modernist)들의 오만한 자세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근대 프로젝트는 모순과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낳은 게 아닐까.
과학은 자연의 유기체적 특질과 공진화적 토대에 위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자연과 공진화하는 방식으로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상호작용하고,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살아감을 인지해야 한다.
내가 생태학이 과학이라 말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자연을 제대로 관찰하고, 원리를 알 때 생태적인 사유와 실천이 나올 수 있다. 실재론에 토대를 둔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그동안 ‘과학’이라 여겨져 왔던 것들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필요가 있고 말이다.
대표적으로 근대‧주류 경제학의 ‘과학성’신화는 부셔버릴 필요가 있다. 그건 과학이 아니다. 경험적으로 관찰된 패턴을 수학적으로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경험을 일반화 하는 것이 아닌 원인을 밝혀야 하는 것이 과학이라는 말에는 적극 동의를 표한다.
사회과학이 그간 자연과학을 외면해왔던 역사에 대해서는 반성할 필요가 있다. 실증주의에 대한 강한 반발로, 사회는 자연과 관계없는 것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사회는 자연 속에서 구성된다. 경제계가 생태계의 하위인 것처럼 말이다.
풀리지 않는 의문 중 하나는, 철학이 위치해야 하는 곳은 어디인가. 유물론적 사고에서 인간의 정신과 뜻은 어디에 위치할 수 있는가.
맑스의 ‘생산’, ‘생산력’을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노동’을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순환을 매개하는 행위로 보는 시선에 동의를 표한다. 이런 관점으로 맑스를 이해할 때 맑스의 이론은 생태학이 될 수 있다.
노동은 자연과 인간을 매개하면서 동시에 정체성을 형성한다. 물질대사의 순환을 통해 육체가 구성되는 것처럼 정체성 또한 이 물적 토대와 함께 비롯된다.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경제학에서 자연이 자원으로 등장하는 것에 질리도록 환멸을 느꼈다. 자연은 분명한 물적 토대이지만, 환경‧기후 붕괴와 같은 물질대사의 균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토대로만 주어지지 않는다. ‘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 수식으로만 오-만한 모델을 세워놓는 경제학은 생태학이 되어야 한다. 같은 라틴어 어원(Oiko nomos)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는 인간 또한 사회적 생물로, 더 크게 자연적 생물로 이해해야 한다. 경제인(Homo-economicous)은 외계생물일 뿐이다.
경제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잘 먹고 잘 사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찌 자연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숨 안 쉬고 물 안 마시는 경제인이라면 무시하던가.
글쎄요
2019.9.19. 수업
마르크스의 방법론, 유물론적 자연관, 칼 폴라니
마르크스의 방법론이 가지는 의미가 적지 않다. “‘자본’에서 배워야 할 것은 그 방법론이지 결론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방법론은 유물론적‧생태학적 특징을 가진다. 그나저나 맑스를 김진업 교수님처럼 이해하는 경우는 드물다. 여타 수업에서 맑스가 등장할 때, 맑스의 유물론적 자연관이 말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자연의 원인은 우리 행위의 조건이 된다.” 이 명제가 중요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원자도 변한다. 원자조차도 물질대사를 하고 변화를 일으킨다. 에피쿠로스의 불변의 명제다. 인간의 자유는 이 제약 위에서 피어난다.
한편, 칼 폴라니는 “아름다움은 중력법칙을 이겨내고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짓에 있다”고 말했단다. 유철규 교수님이 대답하시길 마르크스와 폴라니의 가장 큰 차이점이 이 문장에서 엿보인다고 한다. 그런가? 맑스는 제약 위에서의 자유를 말했고, 폴라니는 제약을 이겨내는 자유를 말한 것인가? 법칙과 과학, 그리고 인간의 자유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경제를 알기 위해서는 생태계 순환을 이해해야 한다. 모든 경험을, 역사 전반을 아울러 볼 수 있어야 과학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제학을 생태학의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전지구적 물질대사의 균열을 초래한 근대경제학은 그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였다. 외부효과를 망각하여 폐단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경제와 생태의 “두 경계선은 서로 연결되기 때문에 단일한 복잡 사회-생태계로 이해해야 하며, 더 큰 전체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토지는 왜 본원적 생산요소가 아닌가
노동만이 본원적 생산요소인가. 토지는? 가장 깊게 이는 질문이다. “토지는 본원적 생산요소가 아니다”, “토지는 인간이 만들었다.”, “토지는 생산된 자연”이라는 언사에 찜찜‧찝찝함이 남았다.
맑스의 저작에서 토지는 중요하게 사유된 것 같이 느꼈다. 하지만 맑스가 생산요소에 토지를 크게 다루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주류경제학이 생산요소에서 토지를 제외하는 그런 맥락은 절대 아니겠지만 말이다. 생산요소에 토지가 등장하지 않는 것, ‘토지’라는 단어를 선두에 올리지 않는 것이 보고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산은 인간이 창조하는 것인 것처럼 여기게 하지는 않을까. 특히 맑스주의자들의 노동가치론은 가치창조의 본질을 인간의 활동에 한정시킨다. 대전제로서의 자연은 망각되고야 만다. 이제까지 “토지의 독자적인 특성을 인정하지 않고 노동과 자본만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 주류와 좌파 양 진영이 20세기 경제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했지 않은가.
이해는 간다. 교수님의 말대로 인간 자체가 자연이고, ‘노동’에 자연적 속성이 가미되어 있어서, 그것이 ‘생산(창조적 의미의)’이 아니라 자연물을 ‘변형’하는 것이기에 근원적 생산요소는 노동 뿐이라는 것이라면 저 찝찝한 언사들에 눈 질끈 감고 동의할 순 있다.
하지만 나의 크나큰 질문은, 사람들의 ‘빚져있음’에 대한 망각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빌려쓰는 존재임을, 우리가 입고 쓰고 얻는 게 자연에서 왔음을 망각하게 하는 오망방자함의 근원이 어디 있을까 하는 질문이다.
헨리 조지가 그토록 토지를 강조한 것과는 사뭇 대비되어 보인다. 지공주의자들은 토지를 강조하며 대자연이 인간의 생활‧살림에 가지는 지위를 공고히 했으니 말이다.
내가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자연관에 입각한 개념들을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일까? 생산요소에 분명히 토지를 각인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왜 드는 걸까. 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일면적‧인간중심적‧프로메테우스적 지오멘탈리티에 매여있는 것일까?
‘토지’를 변형된 자연(생산된 자연)이 아닌 본원적 생산요소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괄호치기에 대한 비판
기후위기를 대하는 사람들의 방식은, 그것의 심각성을 인정하고서 자신의 삶에서는 괄호치기 해버리는 것이다. 큰일 났구나 하고 말만 한다. 전지구적 물질대사의 균열을 인지하고, 그 심각성이 존재함을 말하면서, 그것을 삶의 영역에서는 괄호쳐도 되는걸까?
물론 교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것에서 생태계 위기의 원인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해야 생태계 위기를, 지금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럼에, 수업의 편의와 원만한 전개를 위하여 부차적인 논의의 맥들을 괄호칠 수 있음을 안다. 그래야 원활하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이해하는데 앞서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와 균열들이 강조되지 않는다면 이 체제는 그냥 ‘있어도 되는 것’정도로 알고 넘어갈 뿐이지 않을까. 자본의 속성에서 필연적으로 발현되는 토대-파괴와 몰자각성, 생태위기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조되어야 삶에 영향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실천 없는 앎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김진업 교수님의 이론은 생태학적이지만 김진업 교수님이 생태적인가 하는 질문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생태 감수성은 여기서 출발한다. ‘인정’하지만 ‘별-관심-없음’에서 드러나는 위치성에 대한 이야기다.
‘이해’라는 목적을 위해 괄호쳐지는 내용들과, 수단으로 등장하는 비유들은 이해를 위해 생략된 것들을 보여준다. 맥락과 내용이 이해간다고 하더라도 비유를 사용하기까지의 그 사람이 서있는 위치와 환경이 보이기에 불편한 것이다. 내용을 이해시키기 위한 도구로 등장한 이야기들은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온 삶을 내건 투쟁의 영역이다. 채식과 청소년 인권, 생태문제에 절박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베이컨이 떠오른다. 나에게 베이컨이 그런 위치에 있다. 분명 베이컨은 유물론적 과학의 등장을 촉발한 인물로 유물론적 생태학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지만, 그 자신의 생태-감수성 부재에 대해 나는 어떻게 바라볼지 모르겠다. 그가 분명 자연에 대한 편협한 인식틀‧마음틀을 널리 퍼트린데도 일조했을테니.
어쩌면 지금까지 사회사상의 역사는 엄격한 이론적 논의에 매몰되느라 ‘태도’와 ‘시선’, ‘위치’에 대한 측면들을 망각해왔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강조되는가. 무엇이 다뤄지고 무엇이 다뤄지지 않는가. 말과 이야기에 있어 비중이 어떻게 되는가. 는 이제까지는 비가시화되었지만 중요하게 다뤄져야만 하는 기준이다.
이는 페미니즘 인식론에서 강조하는 위치성의 강조와도 연결된다. “지금까지 그 엄밀성을 자랑해온 학문이 지고한 남성 사회‧문화에 자리해 왔다면 그것이 객관적이라 말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이다. 이론은 연구자‧학자의 위치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한 탄
19.10.15
쪽글 쓰는 게 재미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시장, 시장경제에 대하여, 다른 역사이해>
“역사적으로 빈부격차가 커서 시장이 시장경제가 되지 않았다.”는 말에 대해서 -> 과거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공빈은? 과거에 빈부격차가 컸는가. 단순하게 왕과 노예의 부 격차만 생각하지 말고, 실제로 격차가 많이 났는가? 그리고 이 격차는 점점 좁혀지고 있는가? 빈곤은 점점 해소되고 있는가?
맑스와 생태주의자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근대’를 이상한 시스템이 자리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하지만 맑스가 근대 자본주의를 거쳐가야 하는 단계로 보았다는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말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맑스주의자들은 역사가 진보한다는 강한 진보의 늪에 빠져있는 듯하다.
김진업 교수의 이야기에서 가장 음? 하는 부분은 역사이해에 있다. 김진업 교수의 역사이해는 근대주의자의 역사이해다. 중세와 그 이전의 세상에 대하여 실제로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 편향적으로 보는 것 같다. 즉 야만인으로 보는 시선, 연구자들이 줄곧 저지르는 한계처럼. 생산력 발전으로 역사를 재단할 때 특히 그런 것 같다.
<교육에 대하여>
한편 교육에 대해 진업쌤이 말한 부분은 참 좋았다. “교육은, 교수와 나의 관계는 무엇인가요? 교수 또한 고용되어 있으니 노동력 상품을 파는 것인가요?”라고 묻자, 교육을 시장에 맡기는 나라가 어딨냐고 답해주셨다. 이 나라에서는 각자도생의 이데올로기가 너무 깊게 자리잡아서 사회가 무엇을 해주었다고 보지 않는다.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전체로 생각을 한다. 사회가 나를 키웠다고 생각을 한다. 교육은 시장시스템에 예외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 대학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대학은 어떠해야 하는가.
<기본소득>
“기본소득은 노동력이 상품화되는 정도를 낮춘다” -> 맑스가 자유의지에 대하여 사유한 부분은 퍽 인상깊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가진 우파적 맥에서 기본소득은 노동력이 상품화되는 정도를 낮추는데 무용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김동춘의 교수의 맑스이해, 동의할 수 없는 점, 그리고 생각. 맑스의 이론에서 유물론을 외면할 때 생기는 오류들
윤호와의 논박. 마르크스 경제학의 한계. 노동은 변화하고 있는데(AI, 빅데이터, 플렛폼 자본주의) 구시대적 노동개념에만 몰두하고 있다. 가치란 무엇인가, 가치는 어떻게 창조되는가에 대해서 답이 미진하다. 가령 엄마의 가사노동은
<유물론에 대한 생각. 유물론적 방법론의 한계가 아닌가.>
유물론적 접근, 과학적 방법론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다. 방향과 감수성에 대해서 부재하다.감수성 부재의 과학이 초래하는 결과에 대하여. 예민하게 포착하지 못하고, 절절하게 느끼지 못하면서 사실들만 나열되어 있다면 그것은 뭘까.
치환될 수 없는 것들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과학의 언어로 트랜스퍼되는 순간, 사라지는 맥이 있다. 인간을 수로 치환하면 1이 되는 것처럼.
데이터를 만든 사람의 위치와 인식틀, 세계관이 그 데이터에 분명한 영향을 준다. 학자들은 그런 자신의 위치와 정치성이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그렇다고 그안 들어갈 리가.
그럼에 그 사람의 위치에 따라서 데이터를 믿기는 어렵다. 객관에 근접한 데이터 일 수는 있으나, 그 신뢰도는 현저하게 낮다고 생각된다.
사회과학에서 영성, 감정, 위치, 기분, 감정은 항상 논외의 대상이었고, 괄호치기의 대상이었으면, 너프하게 별 관심없는 것이었다.
유물론‧과학을 말하는 사람들은 역사를 발전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데 일말의 의심을 하지 않는다. 이런 진보의 연속성에 비판을 가한다..
편향. 우리는 모두 편향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나는 우리의 편향이 분명 존재하고, 특히 그것은 과학에 대한 편향 – 영성에 비해, 그리고 동양에 비해 서양의 편향이 있다고 본다. 세계에 대한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그리고 전체로서 사유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망각한다면 큰일난다. 하지만 으레 사람들이 그러듯이 스스로의 편향을 자각하지 못하고 만다.
합리를 판단하는 기준에 있어 그 질적인 요소(논리의 올바른 전개, 논리학적‧수학적 전개)만 따질 것이 아니라 그 양적인 요소(얼마나 다루어지는지, 무엇이 말해지고 무엇이 말해지지 않는지) 또한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과학의 논증절차는 다분히 수직적이다.
유물론 – 과학에 있어서 나의 지적은, 그것이 사람이 한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편향된다는 것, 그렇기에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해서 논리를 전개해나가기에 앞서 세계관과 인식틀이 어떻게 있는지, 그 사람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지가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단순하게 누구의 로비를 받고, 누구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 - 어떤 강제적인 외압에 의해 굴복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영향을 받았을 때 연구의 방향이 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합리라는 것이 맥락에 따라서 무용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것은 어떤 내용에서의 정합을 따지기 이전에 그 위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수는 중립적인가. 벤야민인가가 한 말이라는데, 수가 중립적이라는 것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수학의 정치적 예속을 벗겨내면 그 중립성을 회복할 수 있는가?
이제 더 이상 과학이 아닌 이야기들은 인정받지 못한다. 과학적 방법에 의거하지 않았을 때 설 자리는 없다. 그런데 그렇다면, 과학적 논리구조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들이 설 위치는 어디인가. 경제학의 비용-편익 계산이 저지르는 한계처럼 말이다. ‘말려들어가는 것’에 대한 생각이 이어진다. 이미 짜여진 판으로 들어갈 때 못 헤어나온다고.
과학은 셀 수 없는 것, 계산되지 못하는 것들을 다루지 못한다. 그는 보편성 – 이 과학의 힘이라 말했다. 보편성 덕에 우리는 과학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 말했다. 수와 보편성과 그 한계들. 수의 폭압 – 수가 객관적이라는 건 개소리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확실성의 세계에서 불확실성을 꺼내고, 과학의 세계에 – 그 오만함과 편협함 – 에 균열을 내고 싶은 것.
<김진업 교수님 수업의 방법론, 비판의 시기와 위치에 대하여>
김진업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수업은) 수학적 체계이다. 기본 개념을 쌓고 쌓아서 다음으로 간다. 맥을 짚기 위해 복잡한 현실을 소거한다. 괄호치기한다. 다 할 수는 없으니까. 시간은 유한하니까.
동의하면서도 그 방식에 의문이 인다. 보수적이라 생각했다. 형질변환의 주입식 교육은 아닐까. 비판의 가치를 주입한다. 혹은 진보사상을 주입한다. 의문은 이어진다. ‘진보’를 표방한다고 진보적인 것인가. 귀를 열어두었다고 공표함에 진보의 가치가 있는가. 마르크스를 말한다고, 학계에서 왼쪽에 서있음이 진보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가. 좀 더 새로운 시도들을 할 수는 없을까.
어쩌면 치열한 토론과 과감한 말들의 오고감을 통해서 학문을 향해가는 수업을 바랐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수업의 분위기들은 다 왜 이리 조용한가. 적극적이지 않은, 생각보다 별 흥미 없는 학생들 탓을 할 수도 있고, 십여년 째 업데이트 없이 같은 내용을 가르치는 교수의 탓을 할 수도 있다. ‘학풍’이 사라진 대학 탓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네 탓 내 탓을 넘어 이론을 공부하고 학문을 논하려는 학생으로써 답답함이 있음을 토로한다.
최신의 담론들을 공부하지 못하는 것은 슬프다. 학교의 이 분위기는 답답하다. 공부할 맛 잘 안 난다. 무너져가는 제도인 것처럼 느껴진다. 일리치가 CIDOC를 10년 만에 축제 속에서 해체한 까닭은 그것일까. 성공회대학교가 진보의 가치를 말해온지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젊고 빨갰던 그때의 교수들은 노년이 되었고, 이야기들은 낡아만 가는 듯하다.
“일단 나를 믿고 따라온 다음에 나중에 비판하세요. 비판은 비교판단. 나를 먼저 이해해야 그 다음에 비판이 있을 수 있어요.”
기본기도 안 되어 있으면서 비판의 날을 가는 것이 어쩌면 실력은 없는데 삐딱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내가 아는 것이 없는 건 맞다. 더 배우고 오라. OK. 하지만 부딪히지 않으면 어떻게 배울 수 있단 말인가. 비판은 비난과 다르다. 비판은 비교판단이란다(다소 과학적). 김진업 교수는 일단 따라오고 나서 비판을 하라지만, 전제부터 의문이 드는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따라갈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왜 가르치는 자들은 왜 다 따라오기만 하라고 하는가. 맨큐를 가르치는 자도 그러고. 마르크스를 가르치는 자도 그러고. 배우는 자로 조용히 묵묵히 배우는 것이 먼저인가. 비판은 나중이고. 질문과 의심과 찝찝과 찜찜은 다 사라질 때 즈음 질문의 기회를 주는가.
다시, 대학은 어떤 공간이 되어야 하는가. 응답할 의향도 의지도 없다면 질문은 망각해야 하는가.
이 쪽글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매번 세운 비판의 날은 턱턱 막히는 기분이다. 문은 열려있지만 아주 조금만 열려있어 실제로는 들어가지 못한다.
애써 쪽글을 쓰는 것이, 단지 내가 배운 것을 정리하는 정도에만 그쳐야 하는 것인가. 쓰면서 허탈하다. 질문들은 늘 생략되거나 괄호쳐지고 끝나버린다. 레파토리는 단순하다. “너가 잘못 이해했어. 그건 아니에요.” “아주 재밌는 질문이에요. 그런데 지금 이 수업에서 다룰 건 아니니까 괄호치기.”
언제까지 괄호만 쳐야 할까.. 이 막막함은 무엇일까. 조국 집회에 다녀왔다. 조국수호, 검찰개혁. 지금은 이게 중요하니까 다른 사회문제들은 일단 괄호치기하자. 이 수업은 김진업 교수님의 강의안을 우리가 소화하는 수업일까. 수학적 체계로 배우는 것에 대하여, 나는 교수와 학생의 거리차를 느낀다. 토론은 되는가? 토론이 가능한가? 적어도 이 수업 다 따고 석박사까지 따야 논쟁이 가능한 것인가? 저는 맑스를 그렇게 읽지 않았습니다. 토론과 의사결정에서의 권력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각설하고, 매 수업을 마칠 때 이는 찝찝함은 무엇일까. 모든 질문이 ‘몰라서’하는 질문으로 취급되는 것 같다. 이건 이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른 의미로 고등학교 수업 같다고 느낀다. 고등학교의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면서, 우리가 배워왔던 주류의 시선이 가득한 편협한 교과서를 비판하고, 붉고 레디컬하고 비판적인 내용을 가르치고 배움에 스스로 자위하며, 비판적‧진보적 태도와 자세와 분위기를 망각하고 보수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나루샘의 생각에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화가 났다. 나루샘에 대해 화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학자와 공부의 면에서 존경을 금치 못하지만, 이 환경과 생태에 대한 시야는 조잡하고 편협하다고 본다. 이전에도 몇 번 부딪혔다. 나루샘의 논지는 늘 한결같다. 녹색진영은 유사과학이고 감성적이라 세상에 대한 실체를 보지 못하고, 감성팔이와 호소할 분이며, 그에 따라 과학을 들이대 팩트를 볼 때에 참된 진실을 볼 수 있다는 것. 게다가, 녹색진영에서 나오는 불안과 감정에 대한 사유는 다분히 감정적이고, 모르는 것에 대하여 ‘불안’한 것은 무지의 속성이기에 알고 나면 불안하지 않다는 것. 그럼에 핵발전소는 지어져야 하고,
무엇보다 나루샘은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며 공산주의로 가기 위해서는 생산력발전(경제성장)이 있어야만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실제로 성장이 지속되지 않고 이 시스템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느냐 반문하였다. 그러나 그건 맑스를 잘못 독해한 것, 맑스의 생산력 개념에 대하여 잘못 이해한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생산’을 말할 때 그렇게 접근할 수 없다.
핵발전소. 다 떠나서, 핵발전소를 말함에 있어서 지금의 산업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탄소 때문에 화력발전소는 안되니, 핵발전소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지금의 산업구조 전반에 대한 조금의 성찰 없이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의 산업구조에 대해서 정말 잘 알고 있는가? 농업 혹은 농민의 위치에서 사유할 때 결과는 어떤가.
GMO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함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과학의 이름으로 보수적 면들을 지지하고, 사회를 파국으로 몰아넣는 환경들에 대하여 정당화 할 때, 나는 그것을 과학이라 부를 수 없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나루샘과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방향의 이 전면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위치의 차이일까. 서울에 환멸을 느끼는 나와 동경을 느끼는 그.
나는 그 보편성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 그 보편성이 지금을 이렇게 만든데 한 몫한 것으로 본다.
가장 막막한 것은 합리의 무너짐이다. 나 또한 편향에 사로잡힐 것이고, 세계관‧인식틀‧멘탈리티에 따라서 논리의 방향이 달라질테다.
<유물론에 대한 생각. 유물론적 방법론의 한계가 아닌가.>
유물론적 접근, 과학적 방법론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다. 방향과 감수성에 대해서 부재하다.감수성 부재의 과학이 초래하는 결과에 대하여. 예민하게 포착하지 못하고, 절절하게 느끼지 못하면서 사실들만 나열되어 있다면 그것은 뭘까.
치환될 수 없는 것들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과학의 언어로 트랜스퍼되는 순간, 사라지는 맥이 있다. 인간을 수로 치환하면 1이 되는 것처럼.
데이터를 만든 사람의 위치와 인식틀, 세계관이 그 데이터에 분명한 영향을 준다. 학자들은 그런 자신의 위치와 정치성이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그렇다고 그안 들어갈 리가.
그럼에 그 사람의 위치에 따라서 데이터를 믿기는 어렵다. 객관에 근접한 데이터 일 수는 있으나, 그 신뢰도는 현저하게 낮다고 생각된다.
사회과학에서 영성, 감정, 위치, 기분, 감정은 항상 논외의 대상이었고, 괄호치기의 대상이었으면, 너프하게 별 관심없는 것이었다.
유물론‧과학을 말하는 사람들은 역사를 발전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데 일말의 의심을 하지 않는다. 이런 진보의 연속성에 비판을 가한다..
편향. 우리는 모두 편향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나는 우리의 편향이 분명 존재하고, 특히 그것은 과학에 대한 편향 – 영성에 비해, 그리고 동양에 비해 서양의 편향이 있다고 본다. 세계에 대한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그리고 전체로서 사유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망각한다면 큰일난다. 하지만 으레 사람들이 그러듯이 스스로의 편향을 자각하지 못하고 만다.
합리를 판단하는 기준에 있어 그 질적인 요소(논리의 올바른 전개, 논리학적‧수학적 전개)만 따질 것이 아니라 그 양적인 요소(얼마나 다루어지는지, 무엇이 말해지고 무엇이 말해지지 않는지) 또한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과학의 논증절차는 다분히 수직적이다.
유물론 – 과학에 있어서 나의 지적은, 그것이 사람이 한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편향된다는 것, 그렇기에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해서 논리를 전개해나가기에 앞서 세계관과 인식틀이 어떻게 있는지, 그 사람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지가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단순하게 누구의 로비를 받고, 누구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 - 어떤 강제적인 외압에 의해 굴복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영향을 받았을 때 연구의 방향이 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합리라는 것이 맥락에 따라서 무용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것은 어떤 내용에서의 정합을 따지기 이전에 그 위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수는 중립적인가. 벤야민인가가 한 말이라는데, 수가 중립적이라는 것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수학의 정치적 예속을 벗겨내면 그 중립성을 회복할 수 있는가?
이제 더 이상 과학이 아닌 이야기들은 인정받지 못한다. 과학적 방법에 의거하지 않았을 때 설 자리는 없다. 그런데 그렇다면, 과학적 논리구조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들이 설 위치는 어디인가. 경제학의 비용-편익 계산이 저지르는 한계처럼 말이다. ‘말려들어가는 것’에 대한 생각이 이어진다. 이미 짜여진 판으로 들어갈 때 못 헤어나온다고.
과학은 셀 수 없는 것, 계산되지 못하는 것들을 다루지 못한다. 그는 보편성 – 이 과학의 힘이라 말했다. 보편성 덕에 우리는 과학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 말했다. 수와 보편성과 그 한계들. 수의 폭압 – 수가 객관적이라는 건 개소리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확실성의 세계에서 불확실성을 꺼내고, 과학의 세계에 – 그 오만함과 편협함 – 에 균열을 내고 싶은 것.
쪽 글
10.17 수업
<자본주의 이해하기>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여러 가래의 논리와 이야기들이 있다. 말 끝에 주의 붙는 것보다 애매모호 한 게 있을까. 복잡한 이야기다.
교수님은 수학적 체계로 차근차근 따라가자는데, 근본 전제에 대하여 의문투성이인데 어떻게 다음 차례를 다질 수 있을까. 사회로 과학 하려는 시도에 요새 의문을 품게 된다. 그래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고등학교 수업 같다는 비판에 대해 교수님은 인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 답한다.
요새 마르크스의 이야기는 확실하고 강하고 본질-파악적이지만, 섬세하진 않다고 느껴진다. 본질적‧원론적 접근은 힘이 강하지만, 그만큼 현실에 붕 떠있다. 노동이 가치의 척도인가.
생산양식‧관계가 사회를 결정하는가.
유물론과 관념론에 대해 생각하자면은 그 둘의 돌고돔에 대해서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물질적 조건에서 형성된 관념이 다시 조건을 형성하는 그 돌고돔. 사회로 말할 것 같으면 경제적 생산구조‧조건‧관계가 사회를 만들고 이는 다시 그 구조에 영향을 주고.
생산에 집중하는 맑스는 교환만 바라보는 고전학파와 비교할 것 없이 뛰어난 경제학자이다.
하지만, 맑스를 생산력이 향상되어야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는 식의 생산력-결정주의자로 보는 시선에는 화가 난다. 이 생산력 지향은 결국 경제성장에 대한 신화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맑스는 막걸리 맛을 몰랐다
10월 24일 수업
사회는 기계인가. 자본주의는 기계인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단순명료함을 위해 소거되고 사라지는 맥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한다.
생산력이란 무엇인가. 두 가지 뜻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생산력은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듯 투입대비 산출량으로 측정되는 힘이다. 생산성이라는 개념이 떨어질 수 없이 붙어있다. 경제성장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인다. 힘에 눈이 멀어버리면 위험하다. 본말의 전도랄까, 원래의 생산력 개념이 있는 까닭을 망각하고 힘의 추구에만 목숨 걸게 된다.
다른 생산력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고찰된 것으로 필요노동의 줄어듦을 말하는 것이자, 더 ‘잘’ 살게 됨을 함축해 의미하는 표현이다. “생산력은 많이 만드는 게 아니야. 적은 노력으로 더 잘 살게 되는거야(김진업).”라고 이야기 한다면 생산력은 이전의 경제성장주의와는 맥을 달리하는 개념이 된다. 경제가 정체되어도 그만이다. 필요 이상으로 과로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렇기에 생산력을 평가하는 지표는 GDP와 같은 국민소득지표가 아니라 섬세한 삶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자연과학적으로 생산력 개념을 이해하면, 지금의 생태계 파괴는 생산력이 하향하고 있는 것이다. 인상적인 이야기다. 제대로 된 과학을 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질문 하나는 수업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져간다. 매번 반박되고, 그 반박에 어느정도 수긍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질문이 시원하게 해소된 적은 없다. 생태학은 유물론적이어야 하는가? 사회로 과학 할 수 있는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언제나 인간들의 사회라는 독자성을 인정할 부분도 있지 않은가.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것을 후회해 본적 없지만 사회과학이 보는 세계는 다소 좁다 생각한다. 물론 나를 포함해 대개의 사회과학자들은 자신의 날카로움과 명석함에 잔뜩 우쭐해있지만.
그럼에 동양과 한국의 사회과학‧철학‧종교(이들은 그리 구분된 것 같지 않다)과 들뢰즈 가타리로 이어지는 포스트모던의 사유들을 궁금해하게 된다. 교수님은 현상학과 포스트모던 철학 등지의 관념론과, 주류의 위치를 차지한 경제학을 단순명료하게 ‘버릴 것’으로 던져놓고 지나가버렸지만, 글쎄 그 맥들이 과연 그렇게 던져버릴 것일까. 맑스의 이야기를 사랑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세상을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핵심은 잘 짚었다, 하지만 사회가 그렇게 단순할까? 베버와 폴라니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특히 그런 생각이 인다.).
그리고 과학철학은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과학적이지 않은 이야기들은, 증명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먹힐 수 있나? 수학의 언어로 이야기되지 않은 것들이 학계에서 통하나? 물론 망나니 종교계는 제외하고 하는 소리다.
- 사회적 경제(유철규)
- 그린뉴딜(이유진)
계급이론의 한계
10월 31일 수업
돈의 추구
화폐는 더 이상 거래적 수단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돈은 지배와 예속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마르크스와 베버, 뒤르켐의 질문이 이와 같았다. 왜 생산을 위한 생산, 축적을 위한 축적을 하느냐, 돈의 추구는 권력의 추구다.
경제성장과 위기, 탈성장
경제성장이 2%인데 왜 위기인가. 자본주의는 성장하지 않으면 붕괴하는가. 자본축적은 자본의 선택이 아닌 필수인가. (물론 속성으로 보아야겠지만), 자본축적은 자본주의 사회의 필수조건인가. 즉, 경제성장 없는 자본주의란 어불성설인가.
생각하면, 인간은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안정적인, 안온한, 평온한 하루라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이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발전된, 성장한, 하루여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위기라고 보는 까닭은 무엇인지 질문해야 하고, 여기에서 탈성장 담론의 초문이 열린다.
마르크스 계급이론의 한계
한편 자본가와 노동자의 구분이 얼마나 유효할지에 대하여 의문이다. 계급의 경계선이 희미해지고 있다.
계급이론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마르크스의 계급론 - 프롤레타리아/자본가의 이분적 계급이론 - 은 누가 노동자인가, 누가 자본가인가 하는 질문을 마주하고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더 이상 생산수단의 소유여부로 착취와 비착취를 나눌 수는 없다.(그게 중요한 기준인 것은 부정하지 못하면서도) 그도 그럴것이, 그의 예측대로 자본주의 사회구조는 점점 더 고도화되고 정교해지고 비가시화되고 첨예해져, 착취와 소외구조가 쉽사리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착취자이고 피착취자인지도 마찬가지로 잘 보이지 않는다. 하층은 이 못난 사회에서 쌓인 스트레스와 분노를 어디에 풀지 몰라 장애인‧여성‧소수자에게 화살을 돌린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흘기는 격이다. 그들은 누구에게 맞았는지 모른다.
베버의 계급이론은 유효할까. 시장상황과 노동상황에 맞추어 계급을 구분짓는 베버의 이론은 마르크스의 계급론에 비해 현대의 착취-피착취 경제구조를 잘 설명하는 듯 보인다. 경험적으로 더 유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노동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시대에 그 유효성도 점차 희미해진다. 계급의 경계선이 희미하다는 생각은 점차 강해진다. 처음 소지의 목적 – 착취와 피착취의 가시화 - 을 이루고 있지 못해 보인다.
세부적으로 접근하면, 누가 자본가인가. 누가 노동자인가. 라이트(Wright)의 신마르크스주의 접근으로 기능적 자본가 개념을 차용하면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분적 구분은 그런대로 가능하지만, 주식과 금융이 복잡해짐에 따라 애매해지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주식을 사는 것은 생산수단의 소유인가. 그렇다면 몇 주를, 얼마나 가지고 있어야 자본가인가. 펀드매니저는 노동자인가. 고용여부는 프리랜서가 차고 넘치는 이 시대에 주요한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문제는 글로벌 경제에 있다
11월 7일 수업
<이윤율저하법칙에 왜 생태위기는 고려되지 않았는가>
이윤율 저하법칙에 대해 고민한다. 뭐이 경향은 시대마다 공간마다 다르겠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니까. 왜 일어나는가. 단기 정태적으로는 자본가들의 경쟁이겠지만 장기 동태적으로는 환경오염에 의한 생산비용 증가가 아닌가? 김진업 선생님이 그린 장기 이윤율 저하 법칙은 두 가지 변수로 움직인다. 하나는 잉여가치율, 다른 하나는 자본구성. 현실의 이윤율 저하법칙과는 다른 것도 안다. 실험적 가정이니까. 하지만 현실의 이윤율 저하 경향은 생태위기로 인한 생산비용 증가가 많은 몫을 차지하고 있지 않나?
마르크스의 생태학을 읽으면서, 마르크스가 일찍이 외부 모순(생태균열)을 자각한 학자였음을 알았다. 그러나 왜 그는 물질대사 균열로 인한 생산비용 증가가 이윤율을 저하시킨다고 말하지는 않았는가. 자본구성과 잉여가치율 말고 ‘생태위기로 인한 생산비용 증가’가 변수로 포함되어야하지 않은가.
<문제는 글로벌 경제에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계속 생각해보게 된다. 기술과 경제를 연이어 생각하게 된다. 기술수준의 발전을 말할 때 계속 간과하게 되는 것은, 한의 법칙 등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무한한 기술수준 상향, 성장이 가능할 것을 전제하게 된다는 점이다.
알프 호른보리는 대부분의 과학자, 정치가, 기업인들이 기술 진보에 기대를 거는 경향이 있다며, 하지만 기술(테크놀로지)는 마술 지팡이가 아니고, 엄청난 돈이 들고, 다른 분야들로부터 노동력과 자원을 빼돌려야 함을 강조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존립방식은 미래를 꺼내쓰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래서 생긴 문제를 지금의 거대하고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인(가치적 측면에서) 체제를 그대로 두고 새로운 기술의 투입으로 해결하겠다고?
“오늘날의 세계화된 경제가 자연의 한계를 존중할 수 있게 하려면, 우리는 모든 교환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한계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된다(84p).” 한계를 감수하지 않고, 기술에 모든 걸 내맡기는 류의 에코모더니스트들은, 성장추구로 모자라 다른 행성에서 자원을 가져올 생각이나 하고 앉았다. (탄소포집)
호른보리는 질문한다. “갈수록 커저가는 경제를 재생에너지로 감당할 수 있을까?” 기후변화라는 문제가 엔지니어들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깨려한다. 경제성장, 확대를 가정한
기술은 단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술이라는 아이디어 그 자체는 자본축적, 불균등 교환, 그리고 화폐와 불가분리적으로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86p)” 그럼으로 기술수준의 상승은 만능치료가 될 수 없다. 멘체스터의 공장은 대서양 삼각무역 없이는 건설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근대적 기술이 단순히 자연의 사실들에 대한 발견의 산물이 아니라 세계적 규모의 물질대사의 산물임을 알 필요가 있다.
“기술적 진보와 자본축적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나 세계무역에 있어서의 물질적 불균형은 주류파 경제학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사는 돈의 흐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기술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맑스주의 이론가에게도 해당된다. 그들은 유물론자들이라고 자처하고, 스스로 사회정의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인데도 그렇다. 맑스주의 이론과 정치는 흔히 그들의 반대자들이 기술적 진보에 대한 프로메테우스적인 믿음이라고 일컫는 쪽으로 가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정의에 대한 관심은 산업노동자의 해방에 집중되어 있지, 산업기계의 유지에 필요한 자원의 세계적 흐름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호른보리 교수의 맑스주의자의 기술에 대한 신앙 비판은 일견 유효해보인다. 기술적 진보와 자본축적이 동전의 양면임을 명시하는 것이 중요해보인다.
수의 폭압, 내재적 비판
11.14 수업
<수학, 과학, 수의 폭압, 주류경제학의 전제>
수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 늘 궁금하고 미심쩍은 게 많았는데 명쾌하게 들을 수 있었다. 김진업 교수님의 지론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수학은 하나의 약속이고 수학만이 과학적 방법론은 아니다. 이어지는 주류 경제학 비판은, 그들은 (근대)물리학을 흉내내고 있고, 따라서 온갖 수식으로 경제현상을 설명하지만(규칙성의 함수를 사용함으로), 물리학이 수학을 쓰는 것과 경제학이 수학을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경제학자들의 예측이 하나마나한 것은 되지도 않는 걸 수학으로만 표현하니까 맨날 틀리는 것이다. 우리는(사회과학도)는 수학을 쓸 수 없는 대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수학을 쓰면 과학이고 아니면 과학 아니라는 것은 헛소리다.”
자연을 기계적 자연과 유기적 자연으로 설명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물리학과 생물학의 방법론적 차이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경제계에 물리학적(그것도 고전 근대 물리학적)방법론을 적용한다는 것은 명명백백 오류이자 오만이라는 것이다. 경제계는 생태계의 하위 계에 불과하고, 기계적 구조도 존재하지만 유기적 생물적 요소가 주를 이룬다.
내가 ‘수의 폭압’이라고 이르는 것과 맞닿는 이야기이다. 세계를 수로 재편할 때 소거되고 사라지는 맥들을 생각한다. 특히 경제학도로서 고전파·신고전파의 이론을 접할 때 그렇다.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기초해 한계이론을 접목해 경제계를 선형적이고 1:1대응적인 함수계로 옮기는 것이 낳는 폐혜에 대해 생각한다. 이 (자신들을 과학이라 이르는)이론은 두 가지 전제를 대표적으로 보이는데, 하나는 ‘다른 모든 것이 같다면, 세테리스 파리부스’, 다른 하나는 수학적 인과관계(확실성의 인과)가 성립하지 않으면 이론화·모델화 할 수 없음, 이다. 이 두 전제가 확고히 자리할 때, 자연은 배제되고 인간은 외계인이 되어있다. 나의 업은 이 전제를 부수는 일인 것 같다.
경제학은 사회학과 생태학의 분과학문이다. 명심!
<내재적 비판>
“비판은 내재적이어야만 비판이야. 그게 과학의 기본정신이야. 사회과학의 한계는 상대주의의 늪에 빠져서 그래. 상대의 논리로 상대의 모순을 찾아내야 해”
비판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늘 고민이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내재적 비판’의 방법론으로 정치경제학을 조목조목 쓰러뜨렸다. 아마 이윤율저하법칙에 ‘생태계 물질대사 균열’변수가 없었던 까닭도, 그들(정치경제학자)의 아이디어에 자연(맬서스, 리카도의 자연이 아닌)이 존재하지 않았던 까닭일 것이다(추후전개).
외재적 비판은 쉽다, 고 말해진다. 김진업 교수는 “외재적 비판은 사실 비판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건 비난이에요.”라 말한 바 있다. 외재적 비판은 피상적이고 일면적이고 단상적인 비판이라고 여겨지고, 그런 질문(비판)들에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제대로 읽고와.”, “오독이야.”, “쓸데없는 질문이야(괄호치기).”
내재적 비판은 학문 분과 안에서의 비판이다. 그러나 외재적 비판은 다른 세계관과 다른 학문분과에서의 비판이다. 사회과학의 이론에 영성적 관점(신학, 종교학)의 비판이 가해진다 하자. 사회과학자는 코웃음을 칠 것이다. “뭣도 모르면서”
내재적 비판이 전문가주의를 강화시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그 체계에 익숙하지 못하거나 전공자처럼 알지 못하기에. 내재적 비판을 수행하려면 완벽하게 익히고 와야 가능한가? 주류 경제학을 비판하려면 그들의 논리를 완벽하게 꿰뚫고 있어야만 비판의 자격이 주어지는가? 그것이 전문가주의자들의 (조금 비약하자면) 가스라이팅이 될 여지는 없는가.
학문의 발전이 외재적 영향과 개입으로 이루어졌음을 떠올리면(페미니즘의 균열내기, 자연과학의 분과 영향), 외재적 비판이 어느 정도의 보이지 않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이윤율저하와 생태위기, 장기 이윤율 저하경향에 대해서>
내가 전하고자 하는 요지가 잘 전달되지 않은 듯하다. “아마 이윤율저하법칙에 ‘생태계 물질대사 균열’변수가 없었던 까닭도, 그들(정치경제학자)의 아이디어에 자연(맬서스, 리카도의 자연이 아닌)이 존재하지 않았던 까닭일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하의 기업들이 외부비용을 감안하지 않고 생산을 해왔기에, 지금까지는 생산비용에 외부조건(자연조건)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간의 균열적 생산이 기후변화라는 피드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는 최근의 다보스포럼 및 각 경제계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적 논의를 시작하는데서 엿보인다. 기업의 위험요소로 ‘기후변화’가 1위에 꼽힌 바 있다.
따라서 생산비용의 증가가 일어난다. 예를 들어 (델몬트) 예측불가능의 기후로 오렌지 생산이 망했다던가, 수질악화로 인해 더 이상 지하수를 채수할 수 없다던가. 국가적 규제를 제외하더라도 말이다.(주류경제의 논리에서는 각종 규제도 생산비용의 증가를 일으키는 요인이지만 / 그보다 원래 치러야 할 값을 치른다는 것으로 봐야할테다)
그러므로 (현실의)이윤율 저하 경향은 생태위기로 인해 그 속도가 가속된다. 혹은 이윤율 저하 경향은 생태위기로 인해 발생한다.
나의 자그만 불만은, 맑스가 물질대사의 균열을 사유했던 학자라면, 이론적 이윤율 저하 법칙에도 자본주의의 필연적 오염·균열로 인한 생산비용증가를 말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신성>
“물신성 개념의 맥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 같다”
- 돼지열병,
- 화폐물신주의,
- 맑스 물신성 개념에 대해서,
- 물신성과 소외는 어떻게 다른가.
참고자료 : ‘문제는 글로벌 경제에 있다, 호른보리 교수, 녹색평론’
참고자료 : 김상봉, 서로주체성의 이념, 홀로주체성의 현실태, 자본,
참고자료 : 생태적 지혜연구소, 신승철, 그 많던 조개껍데기 화폐는 왜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10번 째 쪽글
11월 21일 수업
<물신성>
“우리는 물신성 이야기는 안 했죠. 이윤은 노동에서부터(궁극적으로) 오는 거잖아요. 왜 돈이 돈을 벌어요. 돈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상태까지 와 버렸다(주식). 섭리라는 말의 의미는 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되나봐. -> 과학은, 신의 뜻은 없고 지상에서 움직이지 않고z, 자연은 분명히 어떤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 신의 섭리, 자연의 섭리 다 물신성이야. 모르거나, 알아도 행동하지 않으면 물신성이지. IMF물신성이야. 미국이 알아서 해주겠지. 그런 마인드. 사대주의도 물신성, 우리는 정치에 대해서도 물신성이에요.“
교수님의 말은 과학적이지, 합리적이지 않은 것은 다 물신성이라는 것인가.
<이윤율저하와 생태위기, 장기 이윤율 저하경향에 대해서>
내가 전하고자 하는 요지가 잘 전달되지 않은 듯하다. “아마 이윤율저하법칙에 ‘생태계 물질대사 균열’변수가 없었던 까닭도, 그들(정치경제학자)의 아이디어에 자연(맬서스, 리카도의 자연이 아닌)이 존재하지 않았던 까닭일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하의 기업들이 외부비용을 감안하지 않고 생산을 해왔기에, 지금까지는 생산비용에 외부조건(자연조건)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간의 균열적 생산이 기후변화라는 피드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는 최근의 다보스포럼 및 각 경제계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적 논의를 시작하는데서 엿보인다. 기업의 위험요소로 ‘기후변화’가 1위에 꼽힌 바 있다.
따라서 생산비용의 증가가 일어난다. 예를 들어 (델몬트) 예측불가능의 기후로 오렌지 생산이 망했다던가, 수질악화로 인해 더 이상 지하수를 채수할 수 없다던가. 국가적 규제를 제외하더라도 말이다.(주류경제의 논리에서는 각종 규제도 생산비용의 증가를 일으키는 요인이지만 / 그보다 원래 치러야 할 값을 치른다는 것으로 봐야할테다)
그러므로 (현실의)이윤율 저하 경향은 생태위기로 인해 그 속도가 가속된다. 혹은 이윤율 저하 경향은 생태위기로 인해 발생한다.
나의 자그만 불만은, 맑스가 물질대사의 균열을 사유했던 학자라면, 이론적 이윤율 저하 법칙에도 자본주의의 필연적 오염·균열로 인한 생산비용증가를 말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11번째 쪽글
11월 28일 수업
<통화제도, 국제관계>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개별국가가 아니라 세계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흥된 역사를 관찰하면 그것이 일개 국가의 기획이 아닌 자기-조정 시장의 확대를 위해 자유무역을 수반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애초부터 세계적 차원 – 제국주의 – 의 기획인 것이다.
국제통화제도에서 정치권력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즉, 정치와 경제는 분리되지 않는다. 미국이 인플레이션 잡는 법이 한국에 imp한번 터지면 인플레이션 다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통화가치의 안정을 전쟁과 같은 외부 변수로 꾀한다는 것,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폐지할 수는 없을까? 대안은 무엇인가“
한편 닉슨독트린과 신자유주의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인플레이션이 계급투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왜 그런가.
화폐에 계급적 성격이 있다는 것에 대해 더 듣고 싶다.
<집값과 물가지수>
한국은행은 소비자 물가지수 통계를 잡을 때 임대료만 포함하지 집값은 포함하지 않는다. 어려운 지점이다. 두 가지 사회심리가 존재한다. 하나는 사람들이 모두 집을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내집장만욕구), 이는 불안정한 사회환경에서 기인하는 심리로 보인다. 둘은 한국에서 집은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집이 아니라 부동산이 되어버린 까닭에 투기가 발생해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2018년 pir 11.6)
그래서 집값을 소비자 물가지수에 연동시키는 것은 위험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투기폭이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은 필수재다. 자동차 같은 사치재가 아니다. 지수에 포함해야한다. 약간의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찌해야하는가.?
<마르크스 화폐론>
마르크스 화폐론에 대해서 얼핏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맥에서 존재하는 화폐론인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다. 생태지혜연구소에서 작성한 MMT에 대한 글(그 많던 조개껍데기 화폐는 왜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 MMT(Modern Monetary Theory)와 기본소득)을 가져오면 마르크스의 화폐론은 두 가지 가래로 나뉜다. ‘자본’의 상품화폐론 – 리카도의 화폐론을 그대로 차용하여 내재적 비판-, 과 정치경제학 비판요강에 나오는 신용의 화폐론으로 말이다.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아래 인용문을 첨부한다
“칼 맑스(Karl Marx)의 『자본』에서의 논의는, 상품에 내재된 가치론에 기반하여 전개된다. 즉, 사회적 유용성으로서의 사용가치(utility value) 개념과 교환가능성으로서의 교환가치(exchange value)가 바로 상품에 내재한 ‘가치의 이중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품의 가치론의 구도는 ‘의미화=가치화=자본화’의 구도를 그려내는 이론의 실험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인지자본주의 하에서는 “~은 ~이다”라고 의미화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자본화가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의미화는 자본화로 수렴된다. 그러나 맑스는 『자본』을 쓰기 전에 서술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에서 가치론의 외부에 있는 화폐에 대한 단상을 얘기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색다른 사유의 접근경로는 『자본』에 짓눌려서 부각되지 못했다.
자본주의 하에서 화폐는 가치를 자본과 상품의 시각에서만 의미화하는 질서로 획일화된다. 그러나 고유성과 유일무이성을 가진 사물, 생명, 기계, 자연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화폐는 다기능적이고 다의미적인 매개체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화폐는 가치를 자본과 상품의 시각에서만 의미화하는 질서로 획일화된다. 그러나 고유성과 유일무이성을 가진 사물, 생명, 기계, 자연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화폐는 다기능적이고 다의미적인 매개체 역할을 한다.
가치론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방법일 뿐이다. 즉, 자본화가 바로 의미화이자 가치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치화와 의미화 영역의 밖에 화폐의 지도화(cartography)가 위치한다. 화폐는 가치화되어 자본의 영역에 빨려드는 하나의 경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도화를 통해서 다기능적으로 사물과 사물, 생명과 사물 등을 연결할 수 있는 이음새이자 매개체이기도 하다. 바로 부채신용을 기반으로 화폐를 자본의 영역으로 끌어당기는 방향성이 의미화=자본화=가치화의 영역이라면, 공공금융을 통해서 화폐를 시민의 영역으로 향하게 하는 방향성은 지도화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맑스의 『자본』에서의 가치론의 방향성에서 의미화된 화폐와, 『요강』에서의 n분절로 지도화된 화폐론의 방향성은 완전히 상반된 영역에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는 겉으로는 복잡하고 기능 분화된 사회시스템이지만 동시에 획일적인 하나의 뚜렷한 모델링에 따라 이루어진 사회 시스템이다. 바로 ‘가치화=의미화=자본화’가 획일화된 모델링의 정체이다. 즉, 자본주의 하에서는 가치를 자본과 상품의 시각에서만 의미화하는 질서로 획일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유성과 유일무이성을 가진 사물, 생명, 기계, 자연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화폐는 다기능적이고 다의미적인 매개체 역할을 한다. 화폐는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에 이르기 위해서 무수한 다기능성과 다성음악적인 영역을 필요로 하는 지도화의 영역이자 여러 모델과 의미를 넘나드는 메타모델화(meta-modelization)의 영역에 있다. 즉, 단순하지만 다양해질 수 있는 것이 통화주의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돈을 자본과 시장에게 주는 것이 ‘의미화=가치화=자본화’의 방향성이라면, 돈을 시민에게 주는 것은 ‘지도화=메타모델화=다기능화’의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본』이 자본주의를 객관주의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했다면, 『정치경제학비판 요강』은 혁명적 전략 속에서 자본주의에 접근하였다는 점에서 화폐론에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혁명전략 속에서의 가치 생산은 돈을 찍어내어 시민에게 주는 것 자체일 수 있다는 점에서, MMT는 부각된다.
열두 번째 쪽글
12월 5일 수업
화폐
화폐란 뭘까. 결국 이 질문에 마주치지 않고서는 못 넘어가겠다. ‘화폐와 금융’ 수업을 들으며 주류의 화폐론에 대해서 공부했고,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에서 폴라니의 화폐론을 읽었으며, 거시경제학 수업도 듣고, 그린뉴딜러(그린뉴딜 활동가)로서 전환의 재원에 대한 논의로 현대화폐이론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런 맥에서 화폐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교수님의 설명과 어긋나는 부분이 몇 있는 듯하다.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화폐는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재산권 확립으로 인해 등장한 것인가. 화폐가 등가교환이 성립하기 위한 사회적 요구에 의해 등장했는가.(조별토론 중 교수님의 말을 이렇게 이해 이해한 친구가 있었다.)
김진업 교수의 설명은 시장의 확장으로 모두에게 교환의 지평이 열렸고, 그 매개체가 화폐였다는 설명. 그리고 이 화폐의 출현은 등가교환을 통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자유주의)과 재산권 확립의 역사와 밀접했다는 설명이다. 그런가?
마르크스 화폐론에서 화폐는 어떻게 말해지는가. ‘의미화=가치화=자본화’의 구도에서, 인지자본주의 하에서 “~은 ~이다”라고 의미화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자본화가 이루어지고, 화폐는 가치를 자본과 상품의 시각에서 의미화하는 질서로 획일화된다고 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화폐는 가치를 자본과 상품의 시각에서만 의미화하는 질서로 획일화된다. 그러나 고유성과 유일무이성을 가진 사물, 생명, 기계, 자연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화폐는 다기능적이고 다의미적인 매개체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화폐는 가치를 자본과 상품의 시각에서만 의미화하는 질서로 획일화된다. 그러나 고유성과 유일무이성을 가진 사물, 생명, 기계, 자연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화폐는 다기능적이고 다의미적인 매개체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만으로는 위의 인용문에서 말해지듯이 화폐의 다른 성격 혹은 다른 역할이 묻히는 것은 아닌가.
화폐가 문제의 본질인 것은 자명하다. 금본위제, 그리고 영·미의 헤게모니가 낳은 세계적 문제들과 전쟁들을 생각하면, 화폐가 무엇인지, 화폐는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하는지는 지극히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나, 기후위기의 극도로 심각한 상황을 직시할 때, 총체적 전환을 위해 화폐개혁·금융개혁은 필수적이다.
큰 질문은 남는다. 다수, 민중을 위한 은행, 민중을 위한 화폐는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 달러의 헤게모닉지배가 존재하고, 중앙은행의 양적완화는 상위계층에게 역낙수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중되는 양극화에 자본주의의 화폐·금융·중앙은행·화폐(주류)경제학의 책임은 분명 존재한다.
한편 교수님께 드리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지금준비율을 어떻게 보는가? 둘째, 왜 파시즘이 나왔다고 생각하는가. 파시즘의 원인을 무엇으로 보는가(이 부분에 대해서 폴라니와 하이에크는 해석이 정반대이다) 맑스는 파시즘의 원인을 무엇이라 보았을까.
* 김진업 교수의 <자본주의의 이해>수업 쪽글 모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