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뿌리뽑힘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떨리는 지남철 이야기를 종종 떠올린다. 흔들리다 못해 비틀거리곤 할 때, 이 방황의 끝이 올바른 방향이라는 믿음을 부여잡을 수 있는 까닭이다. 확신이 없을 때마다, 이 방향으로 가도 되는지 모르겠을 때마다, 흔들리고 비틀거리는 스스로를 바라보고 마음을 굳힌다. 이 방향 이 길을 걷기를 마음먹는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는 리 호이나키의 삶 전반을 돌이키는 글이다. 그는 모순의 시기를 보냈다. 미국사회에 불의와 부도덕이 만연해지던 때였다. 호이나키가 1928년 생이니 대공황, 2차 세계대전, 냉전체제, 핵무기확산,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전지구적 자본주의화 가운데 있었다. 그는 이 속에서 흔들리며 견디어가다, 도망쳐 새로운 삶을 모색해가곤 했다. 종종 우리사회가 미국화 되어가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 가운데, 그 모순의 전철을 재탕하고 있구나 하면서 공감의 눈초리로 책을 읽었다.
이 책 전반을 아우르는 단어를 하나만 꼽자면 ‘근대’를 뽑을 것이다. 근대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호이나키가 ‘데카르트적 오류’라고 칭했던 것을 보자. “이 대답(대학 교육의 목적 은 서구의 사유개념에 입각하여 비판적으로 사유하기)은 불충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데카르트적인 오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감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역사와 사유하는 사람 자신이 자리잡고 있는 장소를 떠나서, 그 인간 전체를 떠나서, 추상화되어 독립적으로 혹은 어떤 종류의 고립 속에서 일어나는 사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43p).”
데카르트는 골방에서 홀로 사유했다. 근대철학의 전통이다. 코기토 에르고 숨. 역사적 단절 속에서 자신만의 지평을 열어버린다. 이어온 전통적 맥은 낡았다는 명목으로 소거시키고, 앞으로의 역사는 고려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현재만이 생각된다. 이는 이윤과 자본, 효용의 논리로 이어진다. 자기의식도 지금 여기의 나 뿐이며 주체성도 지금 여기 나의 주체성 뿐이다. 철학자 김상봉은 이를 홀로주체성이라 불렀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지금 자신의 행위가 몇 세대 뒤의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였다고 한다. 아메리카 대륙의 토착민들은 순환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면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을 자손들로부터 잠시 빌려서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아가 자신들이 선택한 일의 결과가 일곱 세대 이후의 자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심사숙고했단다. 이는 비단 비서구 원주민의 사고방식만은 아니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삼림 관리 대장에는 장차 보수하거나 재건축할 건물들에 쓰일 나무들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처음 건물을 세울 때 사용된 목재의 수명을 고려하여 동종의 어린 나무를 미리 학교 어느 곳에 심어 수백 년 이후를 대비해 놓곤 했다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보면, 우리의 사유가 얼마나 단절적이고 한정적인지 통렬히 알 수 있다. 특히 지금 당장 기후위기로 당장의 몇 십 년조차 불투명한 것을 상기할 때 우리의 사유들이 조각났음이 분명해진다.
“이제 나에게는 사람의 비판적 능력의 실천은 그의 심장, 정서적 삶, 그리고 그가 처한 육체적·문화적·역사적 장소에 깊게 닻을 내리고 있지 않아서는 안될 것처럼 보인다. (중략) 정신과 심장의 삶은 … 통일되고, 뿌리박힌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조각난 단편들이 다시금 결합되고, 머리와 가슴과 삶터 사이의 역사적 분리는 치유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45p).”
호이나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어떤 윤리성의 회복이었지 싶다. 그가 관찰한 근대는 토착적 윤리를 말소해가는, 뿌리내려 살고 있던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뿌리뽑는 프로젝트였다. 이반 일리치, 칼 폴라니, 마하트마 간디, 함석헌과 같은 20세기를 살았던 사상가들에게서도 같은 시선이 드러난다. 이들은 이 모순의 시기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통렬하게 슬퍼했다. 이 철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역사에 진보는 없다는 시선을 바탕삼아 세계 각지에서 뿌리뽑혀가는 역사의 일면을 포착했다.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다. 근대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근대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아직도 절절히, 절실히 필요하다. 한 켠에서는 포스트 모던의 시대도 지나갔다고 동시대미술contemporary art(동시대 미술) 이야기를 한다는데,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째서 아직 근대이며 근대를 극복하지 못했는가. 이곳저곳을 둘러봐도 근대의 가치와 구조가 전부라 버겁기만 하다. 근대를 비판했던 책들과 맥들이 아직도 뼈저리게 유효한 것을 느낀다. 나는 그럼에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을 들으면 성을 낸다. 아직 근대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미완이라고. 근대를 극복하려는(그것이 넘어서는 것이던 돌아가는 것이던) 시도는 절박하게 필요하다고.
우리는 계속 뿌리뽑히고 있다. 엊그제 식탁에서 나눈 대화를 몇 자 옮겨 보자면 물음은 다음과 같았다. 요새 콩을 편식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던데, 우리 부모 세대에서 편식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나? 심지어는 아예 채소를 편식하는 이들도 있지 않던가. Z세대(98년도 이후 출생자로 가정, 실질임금 하락과 구조조정으로 인한 고용유연화로 비정규직 증가, 맞벌이의 시작)는 대부분 도시에서 자라났다. 그래서 이들은 장수풍뎅이가 숲이 아니라 백화점에 사는 줄 안다. 농경문화를 접하지 못했고, 자연에 대해 무감각하다. 어떤 경외심 혹은 연결성에 대한 자각이 없다. 고로 쌀 한 톨 귀한 줄 모른다. 쌀이 마트에서 얼마인지 가격표는 잘 알고 세일기간도 번뜩이며 알지만, 그 쌀이 한 해에 걸쳐 햇빛을 받고 농부의 손길로 자라나는 것은 모르거나 머리로만 얼핏 알 뿐이다. 그래서 음식을 남기는데도 거리낌이 없다.
우리의 부모의 부모 세대는 비거니즘은 몰랐지만 식단의 9할은 채소로 채워져 있었다. 장날 혹은 잔칫날만 고기를 먹었다. 그들 중 콩을 편식하는 이가 있었을까. 콩투리를 까먹고 깨를 털어본 경험이 식습관과 문화 전반을 좌우한다.
농경사회로부터 뿌리뽑혀 콘크리트 아파트에서 피자치킨을 시켜먹으며 살아온 우리는 음식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알지 못한다. 밭에서 씨앗을 심고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도미노피자 1577-3082 혹은 배달의 민족에 주문하면 오는 게 음식인 줄 아는 것이다.
호이나키의 단어 중 이 ‘뿌리뽑힘’은 계속 인상에 남는다. (시몬 드 베이유의 책 제목이기도 하니 아마 호이나키가 베이유에게 많은 지적 영감을 받았지 싶다) 한국의 현대사는 급격한 뿌리뽑힘의 과정이었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으로부터 비롯된 조국근대화 프로젝트는 세계 유일한 최고의 경제성장률과 세계 최악의 자살률을 달성했다. 물질적 풍요, 그마저도 소수의 물질적 풍요를 위해 이전까지 간직했던 뿌리박음의 고요와 풍요를 상실했다는 것은 안타까움을 넘어 참혹하다.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세대는 아닐까. 뿌리뽑힘이 확 와 닿았던 것은 이 단어로 사회에 만연한 소외와 무력을 설명할 수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불안과 두려움, 소외감, 괴리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사람들의 심리적 무력성은 어쩌면 외생적인 요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당장 내 옆의 정신과 약과 심리치료를 달고사는 친구들의 막막한 고민을 듣노라면, 나는 pir(price income ratio, 소득대비 주택 가격 비율), cpi(consumer price index) 의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무력감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어떤 박탈감을 보게 된다. 현대인들의 불안과 정신질환을, 특히 서울의 병과 우울증, 그리고 자살률을 단순히 경제적, 사회적 지표로만 나타낼 수는 없다. 이것은 ‘뿌리뽑힘’이다.
그렇다면 다음 물음을 이렇다. “무엇에서 뿌리뽑혔는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가고 발굴해 가보자. 물리적으로 흙과 멀어진 것은 틀림없다. 호이나키의 말처럼, “농부는,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그가 예전에 즐겼던 습관적인 친밀성, 흙과 공동체에 대한 친밀성으로부터 갈수록 멀어지는 상황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육체적 접촉의 상실은 또다른 상실을 허용하고, 초래하였다. 즉, 일정한 리듬 – 계절의 리듬, 이웃사람들, 자기자신의 몸, 우주의 리듬 – 속에서 살고 있다는 감각의 상실, 요컨대, 우리가 하나의 피조물로서, 엄격한 한계 내에서 살고 있다는 감각의 상실이 그것이다(89p).” 트랙터의 도입으로 사람의 흙에 대한 관계가 뿌리부터 흔들렸고, 이는 공동체와의 친밀성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시몬 베유(Simone Adolphine Weil)는 이를 ‘균형의 상실’이라 표현하였다. “자연 –타자, 간단히 말해서, 실제(reality)는 오직 친숙함을 통해서만 우리가 존경할 수 있다. 우리는 농경사회로부터 멀어짐으로서 자연과의 친숙함을 잃어버린 것이다.”
분명히, 관찰되지 않은 전쟁이 있었다. 이는 “자급의 삶에 대한 전쟁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땅에 발붙이고 서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공격하는 전쟁이었다.(83p)” 수많은 통계자료들은 성공을 증명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잘못된 척도로 계산되는 지표는 때로는 전쟁과 수탈과 착취를 합리화할 뿐이다.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노동착취·소외의 고발에 지금의 가장 빈곤한 하층노동자도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귀족보다 더 풍요롭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 증거로 GDP상승곡선을 의기양양하게 내민다. 이 레퍼토리는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빈민층에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문화, 삶, 정신, 심리 어떤 존재 전반의 변환에서 오로지 화폐 단위로 측정될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논하는 것은 편협한 계산방식이라고밖에 이름붙일 수 없다(K. Polanyi).’
결국 경제다. 경제를 말할 때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경제’와 사람들이 실로 살아가고 있는 살림살이에는 어떤 모종의 간극이 존재하는 듯 보인다. 폴라니는 이를 실체적 경제이자 선물경제라 칭했다. 호이나키의 글에서 이 실체적 경제에 대한 풍부한 증언이 등장한다.
“마침내 나는 나와 내 이웃들 사이의 교섭은 무한히 풍부한 교환관계, 상호 증여의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행동들은 빈번히 일어났고, 다양한 시간과 장소의 분위기에 따라 많은 다양한 형태와 빛깔을 띠고 일어났다. 숫자를 생각하고, 계산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짓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셈과 계산의 세계가 아니었다. (중략) 나는 희소성의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로 온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일을 돕기 위해서 서로서로에게 아낌없이 시간을 내주는 모습에 놀라움을 느꼈다. (중략) 나눔과 베품이야말로 그들의 삶터에서 삶을 유지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본질적 요소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중략) 그들은 시장경제학에서는 배제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물론, 누구나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고, 또 모든 사람이 꼭 같이 관대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비경제학적’ 행동이 늘 우세하였다. 눈만 뜨고 있으면 언제나 그러한 모습이 보였다(79p).”
(시장, 주류, 근대)경제학의 보편틀에 속하지 않는, 예외라고 말하기에는 전부에 가까운 이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앞서 이야기 한 무언가의 박탈과, 잃어버림, 공허함, 뿌리뽑힘은 이 살림살이가 사라질 때 비롯하는 것이 아닌가. 호혜성을 바탕으로 한 경제를 만들 수 없을까. 뿌리뽑힘의 경제가 아니라 뿌리내림의 경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회적 경제를, 우리의 민초들의 두레 경제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 고민은, 정의를 지향점으로 삼는 것에 대한 고민이다. 근대를 넘어서는 것과 돌아가 회복하는 것에서의 고민이기도 하다. 지금 세상에 중세 수도사의 꼿꼿한 윤리관이 먹힐까? 도덕과, 선, 윤리, 정의에 알레르기반응을 일으키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생각할 때 단연 고개를 젓개 된다. 호이나키의 책에서 엿보이는 토착적 가치들을 되살리고 회복하는 것이 이 윤리가 말소된 사회에 아주 중요한 대안이라 생각하면서도, 근대성과의 일정한 조화를 꾀하는 방도와 구도 또한 고려해야한다는 생각이 한 끝에 남는다.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현재를 살피고, 앞으로의 길을 역사를 바탕으로 모색하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만은, 기술의 변화와 인간존재양식의 변화는 어떻게 동시에 생각해야 하는가.
흔들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듯하다.
* 2019.12.21, 남일성 교수의 <녹색프로젝트> 서평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