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봄
『침묵의 봄』을 처음 읽었을 때가 떠오른다. 그녀를 따라 해양생물학자의 꿈을 꿨던 때였다. 레이첼 카슨(Rachel Louise Carson)의 가장 멋진 특색 중 하나는, 생물학, 해양생물학, 생태학에 능통한 과학자이면서도 시적이고 따뜻한 문장을 가졌다는 것이다. 『랩걸』을 쓴 호프 자런처럼 자연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은 사람들이 보이는 문장은 그 무게가 짙다. 과학과 시의 조합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반해버리고 말았다. 한동안 카슨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 노래를 불렀는데, 이번 생에서 가능할까 싶다.
하지만 카슨의 아름다움(?)과 다르게 세상은 점점 위험해져만 가고 있다. 1968년 울리히 벡(Ulrich Beck)의 『위험사회』가 세상에 나왔다. 침묵의 봄이 1962년도에 출간되어 크나큰 반향을 일으켰으니 『위험사회』또한 그 영향을 적잖이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울리히 벡은 서구가 평화롭고 풍요로운 복지사회라는 환상에 젖어 있을 때 앞으로 닥칠 것은 오히려 위험사회라고 주장했다. 낙관과 낭만의 시대에 찬물을 끼얹은 것인데, 지금와 기후위기, 후쿠시마 사건, 지구한계를 바라보면 그의 말이 백번도 더 맞았다. 평등의 이상을 실현해가는 과정에서 위험은 곳곳에서 드러나고 등장한다. 우리의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화두 삼아 『침묵의 봄』을 들여다보면 더 의미깊게 읽을 수 있겠다.
한편, 인간과 자연의 관계라는 측면으로 이 책을 읽어도 그 의미가 심장하다. 존 벨라미 포스터(J.B.Poster)의 『마르크스의 생태학』에는 카슨의 인용구가 종종 등장한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론적 논지의 현실태가 카슨이지 싶었다. 환경에 대해서 저자는 유물론적 접근을 해야함을 역설한다. 과학자의 태도로 생태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생태주의자들은 흔히 ‘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 방식을 강하게 지양하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 인간이 자연과 공진화하는 방식으로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상호작용하고,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환경을 변화시킴을 생각하면, 에코모더니스들의 로켓 쏘고 인공강우로 미세먼지 잡는 식의 방식은 과학이 아니다. 세상을 과학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유심적-낭만적인 시선이 상충되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적·유물론적으로 볼 때, 그 공진화와 상호작용의 관계에 감동과 경이를 느낄 수도 있지 않은가. 카슨처럼 말이다.
‘위험사회’라는 말이 단적으로 드러내듯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분명하게 변했다. 카슨은 아마 그 변화를 처음 포착한 사람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인류는 자신이 만들어낸 해악을 깨닫지 못한다.(37p, 슈바이처의 말)” 울리히 벡의 논지처럼 방사능과 미세플라스틱, 미세먼지 등 이전에 없었던 위험들을 떠올릴 때 이는 분명한 경구가 된다. 인류는 지금까지 일단 저지르고 보는 식이었다. 위험은 문제를 제기하는 측에서 입증해야 했다. GMO논쟁에서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가. 위험이 확실한 것이 아닐 때, 자본은 그게 위험인지 아닌지 밝혀지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리고 위험이 아니기를 믿었다. 인류는 자신이 만들어낸 해악을 깨닫지 못했다.
본말은 어느 순간부터 전도되고 말았다. 카슨은 DDT의 위험성을 열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화학물질은 살충제가 아니라 살생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39p).” 살충제는 해충을 없애기 위함이다. 삶의 편리함을 위함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살충제는 해충을 박멸하는 것을 넘어 인간에게 끔찍한 영향을 가하는 살생제가 되고야 말았다.
한편 ‘해충’이라는 말이 참 어색하다는 생각을 한다. 살충제는 전쟁 후 무기를 팔아먹을 곳이 없어진 썩을 기업들의 재고 팔이 산업으로 만들어졌다. 그전에 과연 해충이라는 게 있기는 했을까. 해충은 만들어진, 구성된 개념이지는 않을까. 기업들의 상술로 ‘해충’이 생겨난 말은 아닌가.
많은 이들이 벼를 갉아먹는 해충으로 고초를 겪었으리라고 으레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곤충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해진 것은 농업이 본격화되고 대규모 농지에 단일 작물 재배를 선호하게 되면서부터이다.(41p)” 카슨은 다품종 소량생산 하던 전통사회에서는 해충으로 인한 피해가 크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해충은 결국 산업농이 초래한 문제이지 않은가. 엥겔스의 말처럼 인간이 자연에 가한 파괴만큼 자연은 인간에게 보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지렁이, 돈벌레, 파리, 모기를 박멸해야 할 존재로 여기게 되었는가. 우리의 타자관이 오염되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동물에 대해 굉장히 무례하다. 무례함을 넘어 잔인하다. 군부대가 그 정점일 터인데, 길고양이는 ‘치워버릴 존재’로 여겨지며 그들은 놀잇감으로 살해당한다. 아프리카 돼지 열병 사태를 쓴 기사들을 보면 돼지를 처리, 처분한다 쓴다. 그들이 대하는 것은 생명이 아니었다. 반도체 공장에서 결격이 생겨 재고처리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 식이다.
가타리의 ‘타자’에 대한 생각이 든다. 혹은 동학에서의 ‘타자’는 어떤가. 타자와의 상호윤리와 호혜성을 자각하고 인지한다면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의 선조들은 고수레를 하고 까치밥을 남겨놓는 이들이었다.
요 근간 나의 화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였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알고 앓았다. 기후위기에 대한 학계의 자료들을 읽노라면, 혹은 곳곳의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노라면 푸르고 광활한 자연은, 우리의 들은 빼앗겨버리고 말았구나 싶었다. 물음은 이어진다. 다음의 봄이 과연 오는가.
카슨의 책이 그 물음에 대한 답처럼 느껴져 묘했다. 살충제 및 화학물질의 무차별적 살표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봄. 우리에게 다음의 봄이란 그런 어두운 것이지 않겠는가. 어쩌면 57년 전의 봄처럼 조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변적이고 이례적인 자연재해(요새는 인재라는 생각이 인다, 아니 이것은 인재가 분명하다)로 하루도 평온할 날이 없고, 전쟁난 것처럼 매일이 아비규환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 이 책을 집어든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지만은, 그래도 홀로 고독한 싸움 끝에 변화의 힘을 만들어낸 카슨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미래는 없더라도 희망을 발굴하는 일이지 싶어 안도감이 인다. 용기를 내보자.
* 2019.12.21, 남일성 교수의 <녹색프로젝트> 서평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