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이유

어메이징 메리(Gifted)

by 노마 장윤석

가끔 취미가 철학이노라고 말할 때가 있다. 이 영락없는 허세성 발언이 무슨 뜻인지는 나조차 갸우뚱하지만 인생의 반려자로서 꼭 철학을 꼽고 싶은 마음에 내뱉곤 한다. 그럼 철학은 뭘까. 차마 '뭐다!'하고 명쾌히 정의하기엔 철학이 너무 넓다. 조금 좁혀볼까.

"인생은 여정이다. 목적지가 아니라."


언젠가 실존주의 사조에 푹 빠져있을 때 즈음 심금을 울린 명언이었다. '인생'을 '여행'이나 '행복'으로 바꾸어도 성립하는 것 같다. 우리의 사회에서 어디인지 모를 목적지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 나가는 풍경은 충분히 익숙하다. 인서울을 향한 학벌추구의 몸부림부터, 취준생의 행렬까지. 넘쳐나는 불안 속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끊임없이 묻는다. 그러나 철학을 취미 삼아 '감히' 답하자면 그 물음은 틀렸다. '어디로' 가는지보다 '어떻게' 가는지가 중요하다. 영화 <어메이징 메리>를 보며 찬찬히 말해보자.


+스포가득


Screenshot (51).png 메리

<어메이징 메리>의 원제목은 <Gifted>, 처음에는 '선물된'인 줄 알았지만 뜻은 다음과 같았다. 어쩌면 천부의 재능이니, 하늘로부터 '선물된'일 수도 있겠다. 7살 배기 꼬마 소녀 '메리'의 이야기다. 메리는 독일이 유로화를 방어해도 세계 불황이 닥칠 거라 예견하고, 친구들이 1+1을 배울 때 135x57을 암산으로 제곱근까지 구해내는, 그야말로 만 명 중 하나 있을까마나 한 영재다. 메리의 가정사는 복잡하다. 아버지는 한심한 놈팽이고, 어머니 '다이앤'은 비운의 수학천재다. 다이앤은 한평생을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에 매달린 후 오빠 프랭크의 집에 찾아와 메리를 놓고는 자살했다. 프랭크는 다이앤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메리를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여태 메리의 보호자가 되어왔다. 프랭크와 메리는 여태껏 플로리다 해변가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지만, 7살이 되어 학교에 가게 되며 영화는 발단을 맞는다. 메리의 비범함을 알아본 교장은 프랭크에게 메리를 옥스 영재학교에 보낼 것을 권유지만 프랭크는 거절한다. 이때의 대화가 흥미롭다.

Teather "스티븐슨 선생이 아이가 뛰어나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가르치기에는 버거운 재능을 가졌다고요. 공교롭게도 옥스 영재학교 교장이 제 절친한 친구입니다, 전액 장함 금도 드리지요."

Frank "메리를 그런 곳에 보내는 건.. 십중팔구 대부분은 그러겠죠. 옥스는 좋은 학교니까요. 하지만 걔한테 자기가 다르다는 걸 알려줄 필요는 없어요. 자기도 잘 알거든요. 전 메리가 여길 다녔으면 좋겠어요. (...) 그렇게 특별한 아이를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 곁에서 떼어놓으면 콧대만 높아질 뿐이죠. 제안은 고맙지만 메리는 여길 다닐 겁니다."

T "실수하는 겁니다. 우리는 절대 그 아이를 재능에 맞게 교육 못 시켜요."

F "그럼 덜 똑똑하지만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세요."
스크린샷(30).png 아련한 눈빛

그러나 프랭크의 바람은 그의 어머니이자 메리의 외할머니, 에블린의 등장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에블린은 수학계 저명인사로 메리가 영재라는 소문을 듣고 수학 문제를 가득 품은 맥북과 함께 등장한다. 지머(대수학자)의 책을 읽었다는 메리의 영재성에 에블린은 놀라고, 프랭크는 이를 탐탁잖게 보며 메리를 방으로 들여보낸다.


영화의 씬은 플로리다의 한 해변가 카페로 옮겨간다. 7년 만의 모자 재회, 마냥 반갑지는 않다. 프랭크는 에블린을 피해 플로리다로 왔으니 말이다. (그녀의 잔소리는 엄청나다.) 모자 간의 대화는 팽팽하게 흘러간다.

Evelin "아이에게 환경이 엉망이야. 집, 학교 모두 수준 이하지."
Frank "제 생각은 달라요."
E "서로 솔직해지지 않으면 대화가 안돼."
F "저는 솔직해요."

E "좋아. 나는 걔 없이 안 떠나."
F "그럼 플로리다에 오셔야겠네요."
E "잘 들어 프랭크. 이성적으로, 아이에게 뭐가 최선인지를 생각해."

F "다이앤은 어머니가 애를 맡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E "다이앤 생각이 늘 옳지는 않았다."
F "세계 최고 천재 중 한 명이었는데 그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죠."

E "자식이 사는 꼴을 봤다면 어땠을까. 기뻐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F "네. 평범하게 살고 있으니까."
E "걘 평범하지 않아. 이대로 방치하는 건 범죄나 다름없지. 네가 걜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알지만, 그건 얘 앞날을 망치고 있는 거야."
F "그만둬요. 걜 데려가서 가정교사 잔뜩 붙인 다음 무슨 연구소 같은데 빌려줄 거잖아요. 그럼 걘 평생 늙은이들과 아무 의미 없는 숫자놀음이나 하겠죠"

E "위대함을 위해 치는 대가를 네가 이해할 리 없지"
스크린샷(33).png 합리적인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프랭크는 합리적이지 않다는 건가, 오 불쌍한 프랭크

에블린은 수학자답게 논리, 이성, 합리를 중시한다. 문제는 지나치게 확고하다는 거다. 얼마나 확고한지 프랭크가 '제 생각은 다르'다며 자신의 의견을 말하려 할 때도 '솔직해야 대화를 할 수 있다'며 의견으로 취급해 주지도 않는다. 에블린은 '이성적으로' 말하라는 말을 반복하는데, 이 말은 상대가 이성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만 쓸 수 있는 말이다. '아이의 앞날을 생각하렴'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프랭크가 아이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하는 말이다. 저 과한 자기 확신이 놀라울 따름이다.


반면 프랭크는 전직 철학교수답게 생각이 깊고 조심스럽다. 에블린과는 정반대의 말투를 가지고 있다. 에블린의 말은 상대가 틀렸다는 가정하에 내뱉어지지만, 프랭크의 말은 '수많은 의견 중 하나'라는 뤼앙스를 가지고 있다. 단적으로 "I have an opinion. but that's my opinion, and I can be wrong."이라는 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스크린샷(34).png 가장 좋았던 장면, 신이 있느냐고 묻는 메리에게 프랭크는 '모른다'고, 어디까지나 내 의견이고 틀릴 수도 있다고 답한다.

프랭크와 에블린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양육권 분쟁을 치르게 된다. 법정에서는 밑바닥까지 묻어두었던 온갖 이야기들이 나온다. 다음은 그 중 에블린의 양육 이야기다. 에블린은 다이앤에게 스포츠, 걸스카우트, 그 외 어떤 '평범한 것'도 하지 못한 채 수학만을 공부하게 했고, 그것을 문제 삼는 변호사에게 에블린은 분노하며 말한다.

"다이앤은 보통 사람과 달라요. 특출나죠. 특출난 사람들은 특이한 문제와 욕구가 있어요. 걔가 가졌던 능력을 당신은 전혀 몰라요. 십억 분의 일이죠. 당신이라면 그 재능을 다 버리고 잔디 깎던 남자애랑 섹스하게 놔두겠어요?

내겐 모녀 사이를 넘어서는 책임감이 있었어요. 인류의 삶을 향상시키는 위대한 발견은 라듐보다 진귀한 머리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린 아직도 진흙서 뒹굴겠죠. 다이앤은 자기 재능에 책임이 따른다는 걸 알고 회피하지 않았어요.

만약 걔가 있었다면, 변호사 양반, 엄마가 장난감을 안 사줘서 찬란한 미래를 포기하고 목숨을 끊었다는 당신의 빈약한 논리를 반박할 거예요"
Screenshot (41).png 에블린은 아직 다이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 한편, 재능에는 책임이 따를까? 의문이다.

어떻게 보면 에블린이 안쓰럽다는 생각도 했다. 앞선 장면에서, 앨범을 뒤적이며 그 나이 특유의 호기심으로 이것저것 묻는 메리에게 에블린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을 연구하다가 미국으로 오게 된 이야기를 해준다. 여기서 에블린이 왜 그리 수학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에블린이 아이를 가지며 접었던,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 그래서 다이앤에게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투사한 게 아닐까. 어쩌면 에블린이 거론하는 '모녀 사이를 뛰어넘는 책임감', '위대한 업적'과 '인류의 유산' 등지는 욕망을 투영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감추기 위한 가림막일지도 모르겠다.


프랭크로 돌아와, 에들러 측의 변호사는 온갖 이야기들을 꺼내며 프랭크를 몰아붙인다. 변호사는 평범한 프랭크는 천재 다이앤에게 열등감을 느꼈고, 메리를 열악한 환경에서 키움으로서 복수한다는 논리를 편다.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정말 당신이 계속 돌보는 게 그 아이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프랭크는 몇 초간 주저하다가 마지못해 내뱉었다. "네."

Screenshot (45).png 에들러 측 변호인이 참 연기를 잘한다. 즉, 재수 없다.

아이 미래를 가지고 도박을 한다는 변호인의 말에 프랭크는 분노할 만도 하지만, 프랭크는 성찰을 시작한다. 자신이 메리를 맡는 게 진정 그녀의 미래를 위한 것인지 말이다. 변호인의 말처럼 '복수'는 아니지만 부채감으로 메리를 키우느라 그녀의 앞날을 망치는 것은 아닐까 괴로워한다.

'아이에게 최선이거나 내게 애를 기를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내가 신경을 조금만 썼다면 그 아이의 엄마는 아직 살아있겠죠..'
Screenshot (49).png

전반적인 대화와 법원 분쟁을 지켜보며 에블린과 프랭크가 수학 VS 철학처럼 느껴졌다. (물론, 수학과 철학의 넓은 세계를 청팀 홍팀으로 분류하는 건 크나큰 일반화의 오류가 있다.) 에블린은 수학자고, 딱 떨어지는 옷을 입고, 정확한 브리티쉬 말투를 쓰고, 강한 확신이 담긴 어조를 드러낸다. 반면 프랭크는 전직 철학 교수고, 헐렁한 면티를 입고 - 유연한 사고를 상징한다 해두자 - 부드러운 말투에, 끝없이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르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에서는 소크라테스를 떠올렸다.)


수학에는 '다름'이 없다. 옳고 그름만 존재한다. 답이 두 개인 문제는 수학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1 + 1 은 언제나 2를 가리킨다. 이런 '자명함'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에블린은 확고할 수밖에 없고 말이다. 확고함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확고함은 주위와 스스로를 들여다 볼 기회를 앗아간다. 에블린은 '대의'에 대한 확고함으로 말미암아 딸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심지어 딸이 죽고 난 후에도, 그 대의를 버리지 못하고 프랭크와 메리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안타깝지만 '세상'은 옳고 그름만으로는 분류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넓은 우주 가운데 에블린이 말하는 '대의'란 얼마나 하찮은가. 짤막하게 왔다 떠나는 삶을 '대의'에 매이다 떠나는 건 얼마나 미련한가.

Screenshot (54).png 메리와 프레드

한편, 법정에 자신의 친아빠가 증언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메리는 "나에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딸이 있으면 난 보러 갔을 거야" 라며 울기 시작한다. 그리고 프랭크는 그런 메리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한다. 출산실 앞에서 몇 시간을 꼬박 기다린 후 메리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마주한다. 그런 메리에게 프랭크가 던지는 달달한 멘트, "네가 태어날 때도 꼭 저랬어." 메리는 방긋 웃는다. 무척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Screenshot (39).png 웃는 모습이 너무 예쁜 메리

이런저런 상황 속에 재판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판사가 에블린의 손을 들어줄 것 같자 프랭크의 변호사는 '위탁가정'이라는 타협안을 제시한다. 스스로가 메리에게 해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 프랭크는 괴로워하며 타협안을 승낙한다. 메리는 프랭크와 떨어져 위탁가정에 맡겨진다.

Frank, don't leave me

하지만 프랭크는 곧 본인의 실수를 자각한다. 외눈 고양이 프레드를 유기소에서 안락사 직전에 발견하고 위탁가정이 에블린의 속임수였음을 깨닫는다. 프랭크와 에블린 모두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데, (유전인가,,) 프랭크는 메리를 위해 자신의 알레르기를 감수하는 반면, 에블린은 메리를 프랭크에게서 빼오자마자 프레드를 유기묘소로 보내버린다. (진짜 너무하다, 에블린에게 남은 일말의 동정도 다 사라졌다) 에블린은 메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라듐보다 진귀한'메리의 머리만을 원했음이 드러난다. 한편 삼촌이 왜 좋냐는 상담사의 질문에 메리는"삼촌은 내가 똑똑하기 전부터 나를 원했거든요."라고 답한 바 있다.

Screenshot (53).png 우리의 자상한 프랭크는 안락사 위기의 냥냥이 세 마리를 모두 구해낸다. 역시 캣(Cat)틴 아메리카..

프랭크는 냥이들을 집에 둔 채 다이앤의 이름이 쓰인 박스 하나를 차에 싣고 메리를 구하러 출동한다. 아니나 다를까 메리는 에블린이 고용한 가정교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스파르타 강습을 받고 있다. 상처를 입은 메리는 밖으로 뛰쳐나가고 프랭크는 에블린 앞에 박스를 내려놓은 채 메리를 따라가 눈물과 함께 사과한다. 이때의 대사가 참 감동적이었다. "I thought, If Mary is this amazing, smart, sweet human being then I must be doing something right. (메리가 이렇게 엄청나고, 똑똑하고, 귀여운 사람이 되었다면, 내가 뭔가를 하긴 했구나 생각을 했어)"

Screenshot (57).png "내가 미안해", "아냐, 내가 더 미안해."(엉엉)

메리는 다시 방긋 웃고, 프랭크는 에블린과 단둘이 남는다. 프랭크는 에블린에게 다이앤이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에 대한 완전한 증명을 내려놓고는 "What do I do now?(이제 뭐하지)"라고 한 채 자살했음을 들려준다. 평생을 한 문제를 푸는데 바친 다이앤,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자살이었다. 게다가 다이앤이 꼭 에블린의 사후에 이 증명을 발표하라고 말했음도 들려준다. 충격에 빠진 에블린을 뒤로한 채 프랭크는 메리를 태워 떠나고, 홀로 남은 에블린은 다이앤의 글씨를 보며 눈물을 삼킨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에블린이 울음을 삼키는 마지막 장면은, 몇 번을 봐도 모르겠다. 괴로운 걸까. 미안한 걸까. 미안하다면 다이앤에게 미안한 걸까. 프랭크, 혹은 메리에게 미안한 걸까. 확실한 것 하나는 그녀가 여태 보여준 확고함이 와르르 무너졌다는 것일 테다.

Screenshot (58).png 아무리 똑똑해도 7살에 '방법서설'이라뇨..

마지막 장면, 차 안에서 프랭크는 르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메리 앞에 놓는다. "뭐에 대한 거야?"는 메리의 말에 "Existence."하고 답한다. 앞선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프랭크에게도 생각의 변화가 생겼나 보다. 메리가 다이앤의 전철을 밟을까 두려워 메리를 영재로 키우지 않으려 했던 것이 과거의 생각이라면, 이제는 메리가 영재임을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저 책은 메리가 수학만 편식하지 말라는 프랭크의 자상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차에서 내린 메리는 친구들을 향해 뛰어간다. 방긋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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