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섬세하다’ ‘유해졌다’는 말이 나에게 최고의 칭찬이 되었다. 여행서 만난 친구가 “Noma, you are so sensitive.”라 칭찬해 하루 종일 싱글벙글 웃었다. 몇 달 전만 해도 ‘탁월하다’ ‘치밀하다’를 최고의 찬사로 여겼는데, 급격한 변화다. 논리적이고 명석한 것보다 사려 깊고 유연한 게 끌린다. 경제학이 특히 유연하기 어려운 학문이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나름(?)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경제를 지향했건만, 그래도 학문이 가진 속성이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 변화에는 페미니즘 공이 큰데, 특권을 향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 후 입보다 귀를 열려 나름의 노력을 하게 해주었다. 그래도 가장 큰 공은 바이칼에서 만난 '비실이'에게 돌리겠다.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18학번이라 스스로를 소개한 그 친구는 빻은 말을 굉장히 논리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동틀 때까지 시달린 후, 나는 공감력 없는 논리충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이 좋았다. 딱딱하고 뻣뻣한 것과는 극명히 대조되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맛. 단어 하나하나, 마침표 하나하나마저 섬세함을 쏟아부은 것만 같은 책이다. ‘다만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는 겸손 세심한 '작가의 말'에서 감동 팍팍 받았다.
사회과학의 속성은 ‘규정’과 '분석'이라 해야 할까. 대안을 내놓기 위해서라도 현상을 ‘규정’하고 이를 ‘분석’하는 것은 필수적으로 보인다. 가끔 한계를 느낀다. 세월호 희생자가 ‘304’라는 숫자로 치환되는 데서 느껴지는 그런 한계. 신형철 평론가가「작품 해설」에서 인용한 벤야민의 말이 인상적이었다.‘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통해 많은 불행들을 전해 듣지만 그 불행들은 상투적인 표현들로 이차 가공되면서 그 단독성을 상실하고 일정의 정보들로 추락하고 만다. (179쪽)’불행이 식상한 정보 따위로 변해버리는 것은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다. 당장 ‘기후변화’나 ‘지구온난화’ 같은 단어들은 인류의 미래를 재단할 위기를 나타내는 중요하디 중요한 단어임에도 식상함의 극치처럼 여겨지지 않나. 섬세한 손길로 식상하지 않게 살려내고 싶은 마음이 인다.
2.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모두 버리지는 않을까. (104쪽)’ 건축과 친구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내가 가본 모든 나라에서는 수백 년 된 건물에도 사람이 멀쩡히 사는데 – 유럽 아무데나 봐도 백 년 넘은 집들이 즐비한데 – 왜 우리나라에서는 30년만 되면 재건축을 하는 거야? 실제로 오십 년만 지나도 무너질 것처럼 낡아버려.” 박정희 탓으로 이 이야기는 결론 지었지만, 우리에게 낡아서 소중한 것을 낡았다고 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늘 최신과 혁신만 좇고 있는 우리는 과거를 함부로 대하고 있다.
낡음을 혐오하는 분위기는 종종 느껴진다. 우리의 정책 입안자, 도시 설계자들이 특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일이 없어도 일을 만들어 내야하는 토건국가 현상도 한몫한다. 4대강 개발을 왜 했겠는가. 판자촌을, 용산을 왜 밀었겠는가.
오무사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낡은 전구 서랍은 어떻게 하는지 은교가 물을 때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할아버지가 죽고 나면 전구는 다 어떻게 되나. 그가 없으면 도대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까.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모두 버리지 않을까. (...) 재고가 없고 나니 같은 전구를 필요로 하는 수리가 부쩍 늘어나서 여 씨 아저씨와 나는 이상하다고, 드는 자리는 몰라도 나는 자리는 이렇게 표가 나는 법이라고, 모든 게 아쉽다고, 말을 나누는 일이 종종 있었다. (105쪽)'
글에서 나온 곳은 세운상가라지만, 나는 문래동을 상상하며 읽었다. 매일 학교를 오가며 마주치는 익숙한 풍경이라 그럴 테다. 문래동은 구로공단이 있던 곳이다. 현재의 경제 10위 대국 어쩌구의 휘황은 이 곳이 짊어매고 왔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문래동은 사냥이 끝나 구워진 사냥개 신세처럼 초라하게만 남아있다. 드문드문 보이는 쓸쓸한 표정의 할아버지들은 어림으로 아흔 남짓, '곧 이곳도 사라지겠지.'라는 생각이 안타깝게도 들고 말았다. 송기연 작가의 사진을 한 장 소개할까 한다. 낡은 건물이 즐비한 문래동의 물웅덩이로 커다란 빌딩이 보이인다. 이 기묘한 대립을 작가는 ‘환타지’라 이름 붙였다. 복잡한 감정이 인다.
낡은 건물이 즐비한 문래동의 물웅덩이로 커다란 빌딩이 보인다. 이 기묘한 대립을 작가는 ‘환타지’라 이름 붙였다. 송기연 작가
3.
또 하나 좋았던 문장. ‘그런 것(빚)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조금 난폭하게 말하자면, 누구의 배도 빌리지 않고 어느 날 숲에서 솟아나 공산품이라고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알몸으로 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18쪽)’ 두 해 전 김상봉 선생님에게 전화걸어 '개인의 자유'만 늘여놓던 나를 포함해서 세상의 꽤 많은 사람들이 '자유 = 참 트루 마이웨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빚진거 하나 없이 맘대로 멋대로 살고 그래로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걸 힙하다 생각하는 게 문제다. 사람에 대한 빚도 빚이지만 지구에 빚진 거 잊고 사는 사람들이 참 밉다. 여름에 에어컨으로 남극을 만드는 누군가에게 지구 어쩌고 얘기를 꺼내다 이런 답을 들었다. “어차피 멸망할 거 X나 누리다 가면 안 돼?” 연을 끊었다. 아래는 따뜻이, 위는 시원한 게 좋다고 에어컨과 전기장판을 동시에 켜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도 연을 끊었다.
빚을 졌으면 갚으란 말야. 이자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사람들이 부채감에 시달렸으면 좋겠다.
4.
백의 그림자 속 ‘사랑’. 으으, 가장 다루기 싫어서 맨 뒤로 뺐다. 이러면서도 은교와 무재의 알콩달콩 큐티깜찍 사랑 이야기는 발 동동 구르며 읽었다.
은교 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백의 그림자 - 39쪽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다면서 ‘은교 씨는 그렇지 않아도 좋으니 좋은 거죠.’ 라니. 아오! 좋네(ㅋ). 이토록 경건하고 낭만적이고 순수한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 신형철의 말따라 저자는 시스템의 비정함에 대조시키기 위해 무재와 은교의 사랑을 더욱 선량하게 나타내었을진대. 요근래 비포 삼 부작(before sunrise, brfore sunset, before midnight)을 정주행하며 낭만의 끝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아름답고 풋풋하게 쌓아 올린 낭만의 끝이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은 나에게 난제다. 그래서 생각하려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사랑이야기가 나오면 이 멘트를 자주 뱉는다. ‘차라리 사차방정식에 적분을 넣어서 풀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