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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Jan 16. 2020

기후계급, 착취와 피착취를 가르는 새로운 경계선

- 수직적 수평적 계급이론

목 차     


1. 서론

위기

사라지는 계급

등장하는 기후운동

기후계급의 모색     

2. 기후운동      

고전적 계급이론 검토 

기존의 계급이론들의 한계점

마르크스 계급이론

두 마르크스

정통마르크스주의 비판

생태학적 마르크스 

베버의 계급이론

자연조건의 괄호치기     

3. 위험사회          

4. 기후계급

폴라니의 계급이론

이중적 계급, 이중적 운동

폴라니 계급론의 특징

역사적 과정에서의 계급

E.P톰슨의 형성론

폴라니와 톰슨

5. 기후계급     

6. 결론     

참고문헌     


Ⅰ 서론

     

“강한 바람이 강한 해류를 만날 때 바다는 평온할 수 없다. 이미 전개되기 시작한 두 개의 상반된 경향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명세계가 곧 직면하게 될 사회문제의 중대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 헨리 조지     


1. 위기, 기후위기


길을 걷다 우두커니 멈추어 설 때가 있다. 밀려오는 막막함과 착잡함에 대해 곰곰히 생각한다. 감정에 휩싸여, 혹은 불안에 사로잡혀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눈을 감고 신중히 생각해본다. 아무래도 사태가 심각한 것 같은데 고개를 저어 발 딛고 있는 현실로 돌아오면 어제와 같다. 이 평범함을 어떻게 감내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백으로 글의 서두를 열자면 기후우울증을 앓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것을 기후우울증이라 이름 붙여도 되는가 싶다. 북극곰이 죽어가는 것에 괴로워할 만큼 나는 섬세하지 않다. 기후변화를 한낱 날씨 변화로 생각하거나, 북극곰이 멸종하고 빙하가 녹아서 수영장 물 높이 높아지는 걸로 생각하는 이들은 무지의 소치고, 이것은 공멸에 대한 이야기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미래의 시나리오를 앞에 두고 있다. 그동안 번영이라고서 쌓아올린 모든 사회정치경제 인프라는 잠겨버리거나 세계대전 직후와 같이 잿더미로 변해버릴 것이다. 어느 쪽이든 파국은 그 크기를 짐작키 어렵다.    

요 근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화두를 품고 살았다. 더 이상 푸르른 대지는 볼 수 없고, 다음의 봄은 불투명하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하고 묻는 것은 얼핏 회의적인 물음처럼 들릴 수 있다다. 맞다. 사실 이미 늦었다. 지금부터 세계가 거듭 반성하고 쇄신하여 탄소를 1그램도 배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후변화는 일어난다. 그람시(Gramsci)의 말, "지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서 낙관하라" 을 새긴다. 애써 희망을 부여잡고 의지로 낙관하는 중이다. 이성이 공멸(共滅)을 가리키더라도.     

바야흐로 인류세(Anthropocene)다. 이는 지난 1만 년 동안 안정적이었던 ‘홀로세(Holocene)’가 저물고 지질학적으로 인간에 의해 좌우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뜻한다. 한 켠의 몰자각한 이들 – 예로 에코 모더니스트(eco-modernist) - 은 드디어 인간이 자연의 노예로부터 벗어났다며 자유란 이름으로 무절제한 방종을 일삼지만, 아쉽게도 기뻐하기 전에 다 죽게 생겼다. 인류세가 시사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이다. 더 이상 생태계는 안정적인 순환을 하지도,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인류세는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는 능력이 더는 인류에게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이며, 이는 현대의 종말을 뜻한다."

위기라는 단어를 재차 강조한다. 문명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2018년 IPCC에서는 이례적으로 특별보고서를 제출했고,「지구온난화 1.5℃에 대한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근시일내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을 1.5℃ 이하로 제한하지 못할 경우 사태는 심각해진다. 2040년 전후 지구평균 온도가 1.5℃ 상승하는데, 이 무감각한 숫자를 넘어서면 이 변화가 초래할 국면에 대해서 경악을 금할 수 없다. 2015년 파리기후협정의 목표치인 2.0℃가 3년 만에 안일한 목표치였음이 확고해진 것이다. 심지어 IPCC의 예측과 제안조차 사태를 과소평가하고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호주 국립기후복원센터에서 발표한「실존적인 기후 관련 안보 위기 – 시나리오적 접근」에 의하면 2030년에 지구는 이미 1.6℃ 상승에 도달한다. 갈림길에 도달하기까지 IPCC는 20년, 호주 국립기후복원센터는 10년 남았다고 예측하는 것이다. 돌이킬 수 있는 임계점이 지나버리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적게는 10년, 많게는 20년 남아있다.

문제는 기후위기의 속성이다. 기후는 연속적이고 다차원적인 속성을 가진다. 이는 생태계가 상호연결을 그 속성으로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 이는 위기의 번짐-전가를 뜻한다. 이를테면 가뭄과 산불의 야기가 농작이 어렵게 하고, 이는 식량, 물, 에너지, 환경, 보건 등 기반 사회 전체로 확장되어 기존의 위협을 배가시키고 불안정을 촉진시켜 사회정치적인 분쟁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기후위기는 평등하지 않다. 탄소배출은 기성세대에서, 북반구에 위치한 선진국들에서 이루어졌지만, 피해의 몫은 앞으로를 살아갈 미래세대와 사회안전망이 열악한 남반구 국가들에게 지워진다. 배출의 책임은 기업에게 있는데, 폭염의 피해는 야외노동자와 주거 빈곤층에게 집중된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책임이 공평하게 있지 않음에도, 위험은 모두에게 닥쳐온다.

머릿속에서는 8년 1개월의 시계가 흘러간다. 조급하지만 신중하여야 해서 고민이 깊다. 허무주의에서 벗어나기가 쉽지는 않다. 미증유의 위기를 인식했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각했지만, 파국을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반향은 적고 파동은 얕다. 대게의 사람들은 '날씨'와 '기후'를 혼동하는 듯하다. 날씨가 매일 변하듯 기후도 변한다는데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이에 조천호 박사는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날씨는 기분이고 기후는 성품이기에 날씨는 변해야 하고 기후는 지속해야 한다. 날씨가 변해야 우리는 살아갈 수 있고 기후가 변하면 우리는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가 기후변화를 막지 못한다면, 인류는 전인미답의 새로운 기후에서 생존해야 하므로, 과거는 미래의 안내자가 되어주지 못할 것이다."     

폴라니는『거대한 전환』에서 파시즘의 출현에 대해서 썼다. 유토피아 자기조정시장의 도입은 사회를 극단적인 두 힘의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고, 금본위제가 붕괴하며 간신히 지탱하던 백년평화가 붕괴하자 어느 각지라고 할 것 없이 파시즘이 집권하기 시작했다. 위기라는 두 글자가 주는 안온함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바라보면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모든 것이 고통과 비참함 곁에 놓인다는 것 아닌가.

많은 것이 1930년대 그 때와 닮았다. 『거대한 전환』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밀려오는 공포를 느꼈다. 다시 또 한 번의 거대한 전환이 시작되려 하는가. 양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각 국에서 보수파 정당이 득세하며, 사회를 이루는 단단한 조직들이 무너지고 있다. 사회적 스트레스와 긴장은 점점 팽팽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곧 전쟁이 터진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마는, 몇 개 나라에 머물지 않고 세계대전이라 부를 수 있는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진단이다.  

꿈을 바꾸기로 했다. 학자를 꿈꾸었는데, 지금은 방 한 켠에서 하고 싶은 공부나 연구를 할 때가 아닌 것 같다. 목수가 되기로 했다. 온 세상이 물(혹은 불)에 휩쓸릴테니 방주를 만들어야겠다. 지금도 나는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널빤지 조각을 다듬고 있는 것이다.           


2. 사라지는 계급, 무효한 계급이론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응집성의 파괴를 거론하며 계급이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말했다고 한다. 전쟁의 징조로서 그 이전까지 유지되고 있는 사회체제와 그나마 공통의 이해관계가 해체되는 것을 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계급의 해체는 위기를 예고한다. 공동체의 붕괴 뿐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관계망이 해체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이 위험은 새로운 유형의 사회-정치동학을 지닌 초국가적이며 비계급특정적인 지구적 위해를 낳는다. 한편 산업사회는 어제, 오늘, 그리고 전 미래에 대해 계급 또는 계층사회와 같은 의미에서 확장된 집단사회로서 계획된다. 다른 한편 계급들은 사회계급의 문화들과 전통들의 유효성에 의존하는 채로 남아 있다. 그리고 전후의 발전과정에서 이 문화와 전통들은 그 전통적인 성격을 잃어가고 있다(Ulrich Beck, 1986 : 44p)."     

제러미 코빈이 이끄는 영국 노동당은 총선에서 참패했다. 전통적인 노동계급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신호다. 이는 영국이 대처수상 이후 생산시설을 국외로 이전시키며 금융화에 몰두해온 결과이기도, 점점 악화되는 경제 상황 속에서 사회의 최하층과 중하층이 우경화된 것을 말하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한국은 98년 IMP 이후 노동조합이 약세를 보여왔다. 연대감은 상실되었고 계급의식은 약해졌다. 그나마 지금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동조합이 과연 사회적 연대의 가능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노동조합의 연대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빠져있고, 노동조합은 사회의 최약층을 위해 투쟁하는 기구에서 점점 기성체로 자리를 옮겨가고 있다. 점점 사회적 관계망의 붕괴 속도가 빨라진다고 진단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계급이론들은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 유효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마르크스의 계급론 - 프롤레타리아/자본가의 이분적 계급이론 - 은 누가 노동자인가, 누가 자본가인가 하는 질문을 마주하고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더 이상 생산수단의 소유여부로 착취와 비착취를 나눌 수는 없다. (그게 중요한 기준인 것은 부정하지 못하면서도) 그도 그럴것이, 마르크스의 예측대로 자본주의 사회구조는 점점 더 고도화되고 정교해지고 비가시화되고 첨예해져, 착취와 소외구조가 쉽사리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누가 착취자이고 피착취자인가. 하층은 이 못난 사회에서 쌓인 스트레스와 분노를 어디에 풀지 몰라 장애인‧여성‧소수자에게 화살을 돌린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이다. 그들은 누구에게 맞았는지 모른다.

베버의 계급이론은 유효할까. 시장상황과 노동상황에 맞추어 계급을 구분짓는 베버의 이론은 마르크스의 계급론에 비해 현대의 착취-피착취 경제구조를 잘 설명하는 듯 보인다. 경험적으로 더 유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노동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시대에 그 유효성도 점차 희미해지지 않는가.

계급의 경계선이 희미하다는 생각은 점점 굳어졌다. 착취와 피착취를 드러내고자 하는 처음 소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이제껏 사회이론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과 소외에만 집중해왔다. 자연적 조건을 괄호치기 하고 이론을 전개했다. 하지만 앙드레 고르의 말처럼 자본주의는 내적 모순으로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모순(생태계 균열, 물질대사 균열, 기후변화)으로 붕괴할 가능성이 높다. 이제 외부 조건은 이전과 같지 않다.     

계급의 중요성은 점점 절박하게 드러나고 기후는 가혹해지는데, 계급의식은 희미해지고 계급투쟁은 쉬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3. 등장하는 기후운동     


낙담하기는 이르다. 2019년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기후운동(Climate Strike)이 일어난 해였다. 지구 곳곳에서 지구의 미래를 위한 저항이 일어나고 있다. 그레타 툰베리를 필두로 한 미래세대의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School stike for climate)에 이어 영국의 멸종저항(Extinction Rebellion), 독일의 토지의 종말(Ende Gelaende) 등의 단체가 기후행동에 나서고 있고, 이에 응답해 세계 곳곳의 국가와 지방정부 1000여 개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사회적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이에 대응하려 나섰다. 한국도 얼마 전 서울시와 충청남도 지방정부가 기후위기를 선포했다.     

이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통적인 계급이 붕괴한다고 해서 위기를 손 놓고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계급의 등장은 아닐까.      

기후운동의 현장에서는 다양한 구호가 넘실거린다. 필자는 그 중 “기후문제는 계급문제다”, “Not Climate Change Only System change”의 구호에 눈길이 갔다. 기후위기를 외치며 거리로 나온 이들은 이게 체제문제임을 잘 알고 있었다. 기후문제만큼 명명백백한 문제가 어디 있겠는가. 기후계급은 거리에서 등장한 메시지다. 남은 건 이론적 작업일 뿐이다.          


4. 기후계급     


기존의 계급이론으로 현실에서의 착취와 불평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자연과 사회 조건 하에서 착취와 피착취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계급’의 본 역할이 그것이라면, 새로운 계급이론이 필요하다. 

기후계급의 필요성은 다음과 같다. 기후위기로 낱낱이 드러난 자본주의 속 참혹과 모순을 정리한다. 기후가해계급과 기후피해계급을 가시화함으로써 문제 해결의 책임소지를 분명하게 할 수 있다. 또한 기후계급은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연대가능성을 높이리라 생각한다.      

한 가지 남아있는 고민은 존재한다. “기후문제는 계급문제다”라고 말할 때 존재하는 이중성이 있다. 이걸 교차성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기존 계급이론의 한계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기후문제는 (기존의)계급문제다. 기후위기에 책임이 있는 자들(Carbon Majors)과 부의 집중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대체로 겹친다. 하지만 기후문제는 (새로운)계급문제다. 경제적 범주를 넘어 시간적 공간적 기후정의가 발생하기에 이들을 포괄해내는 사회학적 개념이 필요하다.          


Ⅱ 기후운동     


Ⅲ 고전적 계급이론 검토   

  

1. 기존 계급이론들의 한계     


사회과학의 역사에서 존재했던 전통들을 비판하면서 글을 시작하려 한다. 먼저, 괄호치기의 전통을 말한다. 방법론적 괄호치기라 부를 수 있을까, 자연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가정하고 사회와 자연을 견고히 구분하며 생략 가능한 것으로 두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경제학에서 특히 잘 드러나는데, 이렇게 괄호치기된 자연은 외생변수가 되어버려 사회 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인류세다.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상호관계를 자각하거나 유의하지 않았던 그들은 자연이 변할 수 있고 보복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더하여 사회과학의 역사에서는 방법론적 일국주의 전통이 존재해왔다. 사유를 한 국가를 넘어서지 못하고 단절적으로 한 까닭에 공간적 지평을 넘나드는 연대에 대하여 포착하지 못했다. 노동자계급의 연대는 단순히 고용관계에 있다는 의미로서 연대였다. 이러한 까닭에 계급은 시간적으로 단절되었다. 단절적 공간과 시간의 지평 속에서 사유했던 지난날의 사회학자들은 총체적인 사유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들을 계급으로 엮는 시도는 어렵다.      

이러한 한계들을 자각하면서 물어나갈 것이다. 계급이란 무엇인가.      


2. 마르크스 계급이론     


1) 두 명의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계급론에 앞서 마르크스가 두 명임을 말하고자 한다. 한 명은 ‘익히’ 아는 마르크스로, 마르크스의 계급론은 이 익숙한 마르크스에 의해 쌓아졌고 이들의 뒤를 이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 마르크스는 생산력 발전을 계급투쟁의 필연으로 설명하고, 자연적 조건이 불변할 것이라 생각했던 앞선 사회과학 전통의 한계를 초래한 주범이다. 기계론적이고 고정적, 단절적인 마르크스이기도 하다. 현실에서는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기후를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주범 중 하나다. 이 마르크스를 프로메테우스 마르크스라 부르도록 하겠다.  

다른 한 명은 요즘에야 재조명되고 있는 마르크스로, 생태학적 마르크스다. 존 벨라미 포스터, 폴 버킷에 따르면 마르크스에게 인간과 자연은 분리되어 사유되지 않았고, 그러한 물질대사의 상호작용을 면밀히 관찰했다. 오히려 맑스는 물질대사의 균열을 자각한 선구적 생태학자였다. 필자는 이 마르크스가 올바른 맑스해석이라 생각하고 굳게 지지한다. 그럼에 마르크스는 후자의 방식으로 읽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자의 마르크스는 너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계급론은 이 마르크스주의에 의거해 발전했고, 기후계급을 말하기 위해서는 넘고 가야 할 산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와 기후계급은 양가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결국, 통속적 마르크스주의와 생태학적 마르크스주의(Marx Ecology)이 두 사조가 있겠다고 할 수 있겠다. 전자의 마르크스주의는 현실과 학계에서 너무나 힘이 세고, 마르크스생태주의에서는 계급론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킨 것 같지는 않다. 

기후계급은 통속적 정통적 마르크스 계급론에 대한 반박으로 시작하지만,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에콜로지의 인식틀에 기반하고 있기에, 마르크스의 제대로 된 계급론을 발전시키는 시도일 수 있다.     

 

2) 정통마르크스주의 계급론에 대한 비판     


에릭 올린 라이트(Erik Olin Wright)의 ‘모순적 계급 위치’ 개념을 통해 현대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된 인구의 상당수가 자본가적 특성과 노동자적 특성을 둘 다 지닌다고 주장했다. 이는 마르크스 계급론의 한계점을 보여준다. 더 이상 생산수단의 소유여부로 프롤레타리아와 자본가의 이분적 구분은 어렵다. 마르크스 계급론은 누가 노동자인가, 누가 자본가인가 하는 질문을 마주하고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생산수단의 소유여부가 착취와 비착취를 나누는 가장 큰 구획인 것은 자본주의가 고도화 됨에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지만, 착취와 소외구조가 ‘쉽사리’눈에 띄지 않는 것에 있다. 이 ‘쉽사리’는 계급의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단결을 위해서는 적과 아가 뚜렷해야 하는데, 가해주체가 명확하지 않다.       

아울러 최근 일어나고 있는 묻지마 폭행과 혐오현상은 이 착취구조가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것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층 노동자들 중(상당 수 남성)이 못난 사회에서 쌓인 스트레스와 분노를 어디에 풀지 몰라 장애인‧여성‧소수자에게 화살을 돌리는 형국이다. 


덧붙여 직접착취에서 간접착취로 착취의 양상이 변한 듯하다. 이전에는 자본가의 직접적인 노동자 착취가 일어났다면 지금은 자연을 매개물 삼아 간접적 착취가 일어나는 듯하다. 

    

3) 생태학적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해 계급론 모색하기     


존 벨라미 포스터의 『마르크스의 생태학』에서는 마르크스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물질대사의 상호작용) 다룬 부분에 대한 서술이 잦다. 생태학적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하여 마르크스의 제대로 된 계급론을 모색하면 어떨까.     


3. 베버의 계급이론     


베버는 시장상황과 노동상황에 따라 계급이론이 구성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하지만 베버의 연구에서 드러나듯이 자연조건은 괄호치기 되었다. 사회과학의 이 구식 전통은 베버에서 뿌리 깊이 드러나고 있다.       

한편, 주식회사 중심의 금융자본주의에서는 계급분화가 첨예해진다. 자본가, 노동자, 경영자의 큰 구분과 거대기업, 하청기업, 재하청기업까지 이 첨예한 구조 속에서 베버의 이론은 마르크스의 이분법적 계급이론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정합성을 가진다.              

                                

Ⅳ 위험사회     


1. 울리히 벡의 논지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계급사회에서 위험사회로, ‘평등’에서 ‘안전’으로 사회의 최우선 가치가 변화할 것이라고 말한다.      

“계급사회는 ‘평등’이라는 이상의 추구와 관련해 다양한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하지만 위험사회는 그렇지 않다. ‘안전’이 이 사회의 토대이자 원동력을 이루고 있다. 계급사회의 꿈은 모든 사람이 파이를 나누어먹고 싶어 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위험사회의 유토피아는 모든 사람이 중독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지금까지 계급사회를 이끌어온 주된 힘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나는 배고프다! 이와 달리 위험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나는 두렵다! 이런 식으로 불안의 공동성이 필요의 공동성을 대신하는 것이다(Ulrich Beck, 1986 : 97-98p).”     

이렇게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다음의 테제가 등장한다.     

“하나의 공식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즉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근대화 위험의 확장에 따라, 즉 자연, 건강, 영양 등의 위험의 확장에 따라 사회적 차이와 한계는 상대화된다. 대단히 상이한 결과들이 이로부터 계속해서 도출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위험은 그 범위 내부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등화 효과를 보여 준다. 위험이 새로운 정치력을 갖게 되는 것은 정확히 그 같은 효과 안에서이다. 이런 점에서 위험사회는 정확히 계급사회가 아니다. 위험사회의 위험지위는 계급지위로 이해될 수 없다. 또는 그 갈등은 계급갈등으로 이해될 수 없다.(77p)     

하지만 벡이 계급사회가 해체되는 국면을 목격했다고 해서 계급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이 명제는 대비를 드러내기 위해 쓴 것으로 보는 게 옳다. 벡은 ‘계급-특수적 위험’에 대해 서술하였다. 아래의 인용구는 벡의 논지를 더 자세히 이해하기에 도움이 된다.     

“위험분배의 유형과 매개는 부의 분배와는 체계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위험이 종종 계층화되거나 계급-특수적인 방식으로 분배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계급과 위험사회 사이에는 폭넓은 중첩영역이 자리 잡고 있다. 위험분배의 역사는 부와 마찬가지로 위험이 계급유형에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그 방향은 반대이다. 즉 부는 상층에 축적되지만, 위험은 하층에 축적된다. 그런 만큼 위험은 계급사회를 폐지하지 않고 강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빈곤은 불행하게도 위험을 만연시킨다. 그와 반대로 (수입, 권력, 또는 교육의 면에서 부자는 위험으로부터의 안전과 자유를 사들일 수 있다. (Ulrich Beck, 1986 : 75p)     

그렇다 해도 벡은 위험이 비교적 평등하게 등장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위험을 이처럼 성찰적이고 값비싼 방식으로 처리함으로써 낡은 사회적 불평등이 새로운 수준으로 강화된다는 일반적 평가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위험분배의 논리의 핵심이 타격을 받지는 않는다(76p).”     

한편, 불안의 공동성이 대두됨이 기후계급의 중요성을 역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에서 비롯된 유대가 정치적 힘을 이룰 수 있다면, 이들의 계급의식 형성에 밀접하게 관련있지 않은가.      

“불안(anxieted)의 공동성이 필요의 공동성의 자리를 차지한다. 위험사회의 유형은 이런 점에서 불안에서 비롯된 유대가 생겨나고 정치적 힘이 되는 사회적 시기를 보여 준다.(98p)”     

울리히 벡의 논지에서 지금 시대가 ‘위험사회’라는 것에는 동의하나, 위험이 평등하게 닥쳐온다는 점은 강하게 비판한다. 위험은 결코 평등하게 닥쳐오지 않는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벡의 견해가 맞다. 이 위험의 가중화는 결국 공멸을 낳는다. 이 땅에 생명체가 남김없이 사라졌을 때 그것은 논리적으로 민주적이라 할 수 있겠다. 공멸이니까. 초장기적 지평에서 단기적 현실로 내려오면 당장의 폭염은 야외노동자들에게 집중된다. 아마 영화 2012에서 보듯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사람들은 부자일 것이다. 멸종의 끝까지는 그 속성이 평등하지 않다. 계급사회를 강화시킬 뿐이다. 계급 개념은 아직 죽지않았다. 

기본적으로 벡의 패러다임 전환에는 동의한다. 부가 사회적으로 불평하게 분배되는 것에서 위험의 분배 측면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즉 위험사회(위기사회)의 패러다임에서 현 문제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특히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Ⅳ 새로운 계급이론 - 기후계급     


새로운 계급이론 -기후계급의 단초는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읽다가 다음 문장에서 찾았다.      

핵심이 되는 것은 사회 전체의 상황이다. 각 계급이 어떻게 생겨나며 어떻게 사라지는가의 문제, 그 계급들이 각각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이며 그들은 어느 정도나 그것을 달성했는가의 문제, 이들 중 어떤 계급들이 어떤 구도로서 서로 협력하거나 적대하는가의 문제 등은 이 사회 전체의 상황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기 전에는 결코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 전체의 상황이 생겨났다고 하자. 이는 보통 외부 요인들, 이를테면 기후의 변화, 작황의 변화, 새로운 적의 출현, 오래된 적이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 사태, 새로운 공동 목표의 출현, 또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목적을 달성할 새로운 방법의 발견 같은 것들로 인해 생겨난다. 여러 이익 분파들이 사회 발전에서 어떤 기능을 맡았는가를 분명히 하려면 이렇게 총체적인 상황이 벌어졌을 때그 상황과 각 이익 분파들이 어떠한 궁극적 관계를 맺는가를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된다(K. Polanyi, 1944 :413-414p).”     

계급의 생성·소멸·협력·전체를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상황을 파악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사회 전체의 상황’은 기후의 변화와 같은 외부 요인들로 인해 생겨난다. 그럼에 이 상황 앞에서 계급의 관계를 따져야 한다. 이에서 기후계급의 가능성을 보았다. 폴라니는 계급을 사회전체의 상황에서 살핌을 넘어서 역사적 과정에서의 이해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는 톰슨의 형성적 계급론으로 이어진다. “계급이라는 것은 관계이지 사물이 아니다(E.P Thomso, 9p).”는 톰슨의 말을 통해, 정태적 계급이해에서 동태적 계급이해의 필요성을 살필 수 있다. 

아래에서는 폴라니의 계급론을 살펴보고 이어서 톰슨의 계급론을 살핀다. 그리고 그 뒤에 기후계급의 이론적 모색을 시도한다.      


1. 폴라니의 계급이론     


1) 이중적 운동, 이중적 계급     


폴라니는 계급을 어떻게 보았는가. 이에 앞서 폴라니의 ‘이중적 운동’ 개념을 다시 살펴보자. 자기조정시장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힘과 그로부터의 사회를 보호하고자 하는 힘이 이중적 운동을 하는 가운데 이 운동의 주체는 누구였을까. 폴라니는 단일한 계급이 아니었음을 역설한다. 폴라니는 허구 유토피아의 원리에 사회를 맞추려는 쪽과 이 힘에 대항해 다른 힘을 취하는 쪽을 갈랐고, 그 쪽을 구성하는 편은 때마다 달랐다. 하물며 자유주의자들조차 이편저편을 건너다니며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행보를 보였으니. 심지어는 마지막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일어난 힘은 파시즘이었다.

노동자 계급이고 지주계급이고 법·행정귀족 계급이고 신흥 자본가 계급이고 사회의 전체적·외부적 변화에 혼란스러워 하며 이리저리 종횡무진했을 뿐이었다.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말이다. 역사의 뒤편에 선 우리의 시선으로 그 때를 바라보면 단조로운 축약본만 남아 간단하게 정리되고 구분될지도 모르겠지만, 실제 변화의 힘이 들이닥치던 때를 생각해본다면 그리 간단했을 리가 없다.  

그럼에 그러한 이중적 운동에 따라 이중적 계급이 발생한다. 단일한 계급은 단기적 운동을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장기적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역부족이다. 계급이 단일한 기준과 구획표에 따라 나뉘는 것이 아닌, 역사적 이중성을 가미한 집단으로 바라보는 것이 폴라니의 견해다.

이중적 운동과 계급은 밀접하다. 다음의 폴라니 말을 보자.     

“이제 이러한 두 가지 각도에서 19세기 사회사의 모양을 결정한 운동의 개략을 그려보고자 한다. 그 하나는 경제적 자유주의라는 조직 원리와 사회의 자기 보호의 충돌로서, 이는 뿌리 깊은 사회 제도의 긴장을 낳았다. 다른 하나는 계급들 사이의 충돌로서, 앞의 것과 상호작용하면서 위기를 파국으로 바꾸어놓고 말았다.(K. Polanyi, 1944 : 382- 383p)”     

계급은 이중적 운동의 주체이면서, 이들의 충돌은 위기를 파국으로 바꾸어놓는 역할을 했다. 폴라니는 계급분석에 역점을 두고 있다. 계급의 운동이 사회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강조한다.      

“계급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 토지 계급, 중간 계급, 노동계급이 사회에서 담당했던 역할이 19세기의 사회사 전체의 모양을 결정했다. 이 계급들은 사회가 처한 전체 상황에서 생겨나는 이런저런 기능 가운데 저마다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에 맞게 배역을 맡았다(381p).”


폴라니는 절대적 계급 위치를 말하지 않는다. 계급과 법은 시장의 확대로 인한 혼란 속에서 모순적인 위치에 있곤 했다. 단일한 위치가 있지 않았다.          


2) 폴라니 계급론의 특징     


폴라니 계급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첫째, 전체 사회의 필요 혹은 사회 전체 상황에 따라 계급이 구성된다. 둘째, 계급은 경제적 이해관계(이익)에 달려있지 않다. 『거대한 전환』13장 ‘자유주의 교리의 탄생 2 : 계급적 이해와 사회 변화’에 나오는 다음의 문장들을 통해 이를 짚어보자.      

“계급적 이익이란 사회의 장기적 운동을 설명하는 데에서는 제한적인 도움밖에 되지 않는다. 전체 사회의 필요라는 것으로부터 각 계급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지, 각 계급의 필요라는 것으로부터 전체 사회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쪽이 훨씬 진리에 가깝다(K. Polanyi, 1944 : 413p).”     

핵심이 되는 것은 사회 전체의 상황이다. 각 계급이 어떻게 생겨나며 어떻게 사라지는가의 문제, 그 계급들이 각각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이며 그들은 어느 정도나 그것을 달성했는가의 문제, 이들 중 어떤 계급들이 어떤 구도로서 서로 협력하거나 적대하는가의 문제 등은 이 사회 전체의 상황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기 전에는 결코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 전체의 상황이 생겨났다고 하자. 이는 보통 외부 요인들, 이를테면 기후의 변화, 작황의 변화, 새로운 적의 출현, 오래된 적이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 사태, 새로운 공동 목표의 출현, 또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목적을 달성할 새로운 방법의 발견 같은 것들로 인해 생겨난다. 여러 이익 분파들이 사회 발전에서 어떤 기능을 맡았는가를 분명히 하려면 이렇게 총체적인 상황이 벌어졌을 때그 상황과 각 이익 분파들이 어떠한 궁극적 관계를 맺는가를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된다(413-414p).”     

폴라니는 계급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협력하고 적대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 상황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먼저라 역설하고 있다. 그가 강조하는 총체적 사유가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한다. 어떤 기준에 의해 계급을 구분해놓고 계급의 속성을 부여한 다음 역사를 바라보는 시도에 대해 경계한다.  

한편, 사회전체의 상황이라는 것은 외생적 측면을 갖는다. 폴라니는 내생적 측면을 무위에 가까운 것으로 여기는 듯 보인다. 인간 공동체가 내적으로는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본 것 같다. 역사의 전반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크게 사회 변화의 동학이 작동하지 않았다. 300년 전이나 500년 전이나 30년 전과 50년 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일관적이었다는 이야기다. 중세의 농노제는 수백 년의 시간동안 지속되었으니 그럼에 내부적으로 안정된 계급들, 안정된 신분제가 자리하였다. 이 전통적 지속을 깨어낸 건 외부적인 포인트다. 폴라니는 그럼에 외부적 변화의 힘에 사회 각 계급이 움직이는 양상을 관찰한다.      

“어떤 광범위한 변화가 사회를 덮치게 되었을 때 그 공동체 내의 다양한 집단들이 그 영향을 받는 방식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414p).”     

“궁극적인 원인은 외부의 여러 힘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며, 사회에서 그 내부의 세력들이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그 변화가 벌어지는 메커니즘일 분이다. ‘도전’이란 사회 전체에 주어지는 것이며, ‘대응’은 여러 집단들, 부분들, 계급들을 통해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414p).”     

그럼에 계급적 이익이라는 변수로는 장기적인 사회 과정에 대해서 만족스러운 설명을 내놓을 수 없다 폴라니는 말한다. 그 문제의 변화과정이 아예 계급의 존재 여부를 결정해버릴 수도 있을뿐더러, 기존의 여러 계급들의 이해란 오직 각 계급들이 얻고자 애쓰는 목표와 목적만을 결정할 뿐이며 그 노력의 성공여부를 결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폴라니는 “어째서 농업가들, 공장주들,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보호주의적 행동으로 자신들의 소득을 올리려 들었는가가 아니라, 어째서 그러한 그들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게 되었는가(415p)”를 중점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폴라니는 계급적 이익이 본질적으로 경제적 성격을 갖는다는 교리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물론 인간 사회가 경제적 요인들로서 조건지어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개개의 인간들이 행동하는 동기들이 오로지 물질적인 욕구 충족의 논리로 결정되는 일은 극히 예외적으로만 벌어지는 일이다. 19세기 사회는 그렇게 경제적인 것만으로 인간 행동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하여 조직되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 시대에만 고유한 특징일 뿐이다(415p).”      

경제적 동기가 인간 행동의 모든 동기라는 교리는 만들어진 허구이다. 주류 경제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합리적 개인은 만들어진 인간상이다. 그러면서 폴라니는 경제 차원의 동기보다 사회적인 인정의 문제가 계급의 형태에 더 중요하다 말한다. “어떤 계급의 이익이란 가장 직접적으로는 지위와 서열, 신분과 안정성을 뜻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일차적으로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416p).” 따라서 인간 집단의 이익을 오로지 화폐소득만으로 보면 안 된다.

폴라니는 계속하여 이른바 ‘물질주의적 오류’를 경계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GDP가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경제적 돈 계산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들, 계산기로 알 수 없는 것들을 강조한다. 시장의 무지막지한 도입으로 일어난 사회적·문화적 파국을 ‘경제적 착취’라는 이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하여 폴라니는 ‘사회 전반적 이익’이 현실에서 분파적 이익만큼 계급에 힘을 미친다고 말한다. 일개 금전적 이득이란 오직 관련 있는 몇 개인에게만 해당되지만, 그 외 종류의 이익 – 사회 전반적 이익 – 은 무수한 형태의 개인들에 영향을 주기에 사회 보호의 임무가 공동체 전체의 보편적 이익을 수호할 책임을 맡는 것이다. “따라서 집단적 이익이라는 것을 너무나 협애하게 정의하고 이해하게 되면 사회 정치적 역사를 굴절이 심한 안경을 통해 비뚤게 바라보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것을 순전히 금전적인 것으로 정의하게 된다면 사회의 보호라는 절대적인 필요를 포착하고 이해할 여지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417p).”     

“당대의 일반적 경향에 역류하는 발전 경향이 있을 때 그것을 그러한 역류 경향을 가진 계급들의 영향력으로 설명(그 계급이 어째서 이렇게 큰 영향력을 갖는지는 설명되지 않은 채)하는 대신, 그 계급이 그렇게 큰 영향력을 갖게 된 원인은 그들이 공동체 전체의 일반 이익과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발전 경향을 대표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쪽을 택해왔다(475p)”     

“요컨대 이른바 집단주의 운동이라는 것의 원천은 어떤 단일의 집단이나 계급이 아니었다. 물론 그 운동의 결말은 관련된 계급 이익의 성격에 따라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따져볼 때 그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게 만든 것은 사회 전체의 이익이었다. (중략) 그래서 우리의 설명은 이런저런 개별 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시장에 의해 재난에 처한 여러 사회적 이익의 내용을 중심으로 묶어나가는 것이 더 합리적인 일이라고 본다(430p).”          


3) 역사적 과정에서의 계급     


폴라니는 각 계급의 현시적인 움직임에 대해서 ‘가지가지의 대응들’이라 썼다. 위기의 시기가 올 때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해결책들이 서로 정반대 방향으로 사회를 끌고 나가고자 할 수가 있고, 이때에는 계급적 이익의 충돌이 타협이 아니라 전 사회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큰 격변을 일으킨다. 따라서 계급의 이해를 위해서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이해가 선결적이다. 특히 위기의 시대에는 더욱.      

“일정한 역사적 전환기가 되면 순전히 그 순간의 필요 때문에 새로운 계급들이 생겨나는 일이 다반사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따져볼 때, 어떤 계급이 전체 역사의 드라마에서 얻게 되는 배역은 그 계급이 사회 전체와 맺고 있는 관계에서 주어지는 것이다(K. Polanyi 1944 : 419p).”     

폴라니는 1795년 스피넘랜드 법 도입과, 1930년 파시즘의 출현을 이 위기의 시대로 보고 시대의 출현에 각 계급의 양상을 관찰하였다.     

“인간에 대한 위험과 자연에 대한 위험을 깨끗이 분리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시장경제에 대한 노동계급의 대응과 농민의 대응은 모두 보호주의라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전자는 주로 사회 입법이나 공장법의 형태를 띄었고, 후자는 국내 농업 진흥을 위한 보호 관세와 토지 관련법의 형태를 띄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중대한 차이점이 있었다. 비상 사태가 도래할 경우 유럽의 농업 경영자들과 농민들은 시장 체제를 수호하려 나섰던 반면, 노동계급은 그것을 위협에 빠뜨릴 정책들을 실행에 옮기려 들었던 것이다. 시장 체제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며 그 보호주의 운동을 구성하는 두 세력 모두가 그것에 위기를 가져온 장본인들이었지만, 토지에 관련된 사회 계층들은 시장 체제와 타협하는 방향을 지향했던 반면, 넓은 의미의 노동계급은 시장 체제의 여러 원칙들을 거침없이 깨어버리고 그것에 공공연하게 도전하는 일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485-486p)”   

       

2. E.P 톰슨의 계급론     


1) 톰슨과 폴라니     


에드워드 파머 톰슨(Edward Palmer Thompson, 1924–1993)은 영국의 역사가로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을 통해 형성적 계급론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다. 앞서 바라본 폴라니의 계급론을 바탕으로 톰슨의 계급론을 살펴보자.      

이 두 명의 학자는 실제로도 교류가 있었다. 톰슨의 연구에서 폴라니의 영향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한다. 아래는 폴라니의 전기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폴라니에 대한 문헌에서 톰슨은 보통 그의 영적, 지적 형제로 언급된다. (중략) 1958년에 폴라니는 자신의 세계관은 “<뉴리즈너> 창간호에 실린 E.P 톰슨의 세계관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중략) 두 사상가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자였고, 산업혁명의 극히 해로운 영향을 강조했다. 두 사람 모두 경제주의 마르크스주의를 경멸했고, 전후 자본주의를 도덕적으로 비판했다(Gareth Dale, 2016 : 391p)”     

“이들(톰슨과 신좌파)과 폴라니 모두 소비주의가 성장하면서 이제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 세력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계급 구조가 해체되었다고 생각했으면서도 현실의 노동자 운동(특히 1956년의 헝가리)에서 영감을 얻었다. 폴라니는 레이먼드 월리엄스 같은 신좌파 이론가들이 내놓은, 근대성 속의 인간 사회에 일어난 균열이라는 진단을 대체로 공유했다. 다시 말해 이는 마르크스주의 대본의 내용과는 달리 계급 갈등이 아니라 주로 “도덕적 인식이...차단된 상태”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392p).”     


2) 톰슨의 계급론 특징     


폴라니가 직접 자신과 톰슨의 세계관과 유사하다 말했을 만큼, 두 학자가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에 보이는 태도는 엇비슷하다. 이 교차점은 계급론에서도 드러난다. 

아래는『영국 노동계급의 역사』의 인용문들로 톰슨의 계급론을 엿볼 수 있는 문장들이다. 아마도 그의 계급론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계급이라는 것은 관계이지 사물이 아니다.(E.P Thomso, 9p)” 따라서 톰슨의 계급론에서 ‘형성’이라는 키워드는 핵심적인 위치를 가진다.      

“형성(making)이라 한 것은 이 책이 진행 중인 어떤 과정에 관한 연구이기 때문인데, 진행 중인 과정은 여건에 의해 좌우되기도 하지만 그 활동의 주체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노동계급은 정해진 어느 시간에 태양이 떠오르듯이 정해진 어떤 시간에 떠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계급 자신이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E.P Thomson : 6p).”     

“나는 계급을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라 이해하고 있는데, 그것은 생생한 경험자료 상으로나 의식상으로나 서로 분리되어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여러 사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현상이다. 나는 그것이 역사적 현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나는 계급을 어떤 ‘구조(structure)’라고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어느 ‘범주(category)’라고도 보지 않는다. (중략) 그뿐만 아니라 계급이란 개념에는 역사적 관계란 개념이 뒤따른다. 관계라고 하면 으레 다 마찬가지지만, 역사적 관계란 것도 우리가 만일 그것을 어느 특정 순간에 죽은 것으로 고정시켜놓고서 그 구조를 해부하려 든다면 제대로 분석할 수 없는 어떤 흐름(fluency)이다.(7p)”      

폴라니의 계급론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이중성, 서사성, 역사성이었다. 톰슨에게서도 이 면이 드러난다. 폴라니는 19세기를 전체적으로 관조하기 위해 이중적 운동-이중적 계급을 강조했고, 이 이해를 위해 서사적인 면을 드러냈다. 톰슨에게서는 역사성이 가장 큰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계급을 그 자신이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역사적 현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계급은, 어떤 사람들이 (이어받은 것이건 또는 함께 나누어가진 것이건) 공통된 경험의 결과 자신들 사이에는 자기들과 이해관계가 다른(대개 상반되는) 타인들과 대립되는 동일한 이해관계가 존재함을 느끼게 되고 또 그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때 나타난다. 계급적 경험은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맺게 되는, 바꿔 말하면 자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속에 들어가게 되는 그러한 생산관계에 의해서 주로 결정된다. 계급의식이란 이러한 경험들이 문화적 맥락에서(in cultural terms) 조정되는 방식, 즉 전통, 가치체계, 관념, 그리고 여러 제도적 형태 등으로 구체화되는 방식이다. 경험은 결정된 모습을 띄지만, 계급의식은 그렇지 않다. (중략) 우리는 어떤 논리(logic)을 볼 수는 있지만, 어떤 법칙(law)을 확인할 수는 없다.(7-8p)”     

그렇기에 톰슨의 계급의식은 결정되지 않고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톰슨은 계급의식을 ‘문화적 맥락에서(in cultural terms) 조정되는 방식, 즉 전통, 가치체계, 관념, 그리고 여러 제도적 형태 등으로 구체화되는 방식’으로 규정하는데, 경제주의적 함몰에 빠지지 말고 역사·문화적 접근을 강조했던 폴라니의 색채가 여기서도 드러난다.     

“한 사람의 행위가, 뒤따르는 발전이란 관점에 비추어보아 정당한 것인가 아닌가의 여부를 우리의 유일한 판단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결국은 우리 자신도 사회적 발전의 종점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산업혁명기 사람들의 실패한 주의 주장들 가운데 몇 가지에서는 우리가 아직도 치유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악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찾아낼 수도 있다. 더욱이 오늘날 세계의 더 넓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공업화 문제, 민주적 제도의 형성 문제 등 산업혁명기에 우리 자신이 경험한 것과 여러모로 유사한 문제들을 겪고 있다. 잉글랜드에서 패배한 주의 주장이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는 혹시 승리할지도 모른다(12p).”     

더하여 톰슨에게서도 진보사관의 거부가 나타난다. 역사를 발전의 종점으로 보는 시선은 편협한·협애한 역사이해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서 서술한 폴라니의 역사관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경험주의적 경제사가들의 학설에서는 노동자들이 하나의 노동력이나 이민들, 즉 통계적 수계열의 한 자료로 간주된다. (중략) 세번째 학설에 대한 반론은 그것이 역사를 훗날의 관심사라는 견지에서 바라보지 실제 일어난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11-12p).”     

더하여 톰슨은 역사를 실제 일어난 대상으로, 과거의 관점에서 보아야 함을 중시한다. 이것은 그가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자였던 것과 관련 깊다. 역사의 사실을 수치로 계량화 할 때 소거되는 맥을 경계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폴라니와 톰슨의 계급론을 살펴보았다. 비슷한 색채를 띄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보였던 계급관에 영향을 받아 톰슨은 영국 노동계급에 대하여 훌륭한 연구를 했다고 할 수 있겠다. 계급을 이렇게 이해할 때 관계와 형성에 초점을 두게 된다.      


3. 기후계급의 이론적 모색     


그렇다면 기후계급은 무엇인가. 어떻게 기후계급의 이론적 모색을 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의 이분적·구분적 계급론을 버리고, 베버의 자연단절적인 계급론을 비판하면서, 폴라니의 역사적 계급과 톰슨의 관계·형성적 계급론에 기반해 기후계급을 말해보자.     

앞서 살펴보았듯 기후위기라는 상황을 마주해 자본주의의 모순은 극적으로 극단적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기후정의 개념에 입각해 기후계급을 이론화해보자. 기존 계급이론의 한계들을 피하면서, 지금의 기후운동의 움직임에 충실해, 새로운 계급이론을 모색해보자.     

1) 이론적 모색의 가능성

2) 위험사회에서의 계급이론

3) 계급의 공간성(수평성)

4) 계급의 시간성(수직성)

5) 매개착취의 측면

6) 기후계급의 의의             

                                                                                                      

Ⅴ 결론     


나는 힘이 되어주고 싶다. 암울한 전망을 하면서도, 이성으로 수없이 비관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의 가능성을 열어보이는 게 학자의 도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기후계급을 말하며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다. “우린 한 집에 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다.”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계급이라는 끈으로 묶어주고 싶다. 그렇다면 다음의 걸음을 내딛는데 구호가 생기고 한 마음 모아 위기 속에서 반성과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노동자계급이 주체가 아니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만으로는 부족하다. 옆과 곁을 지킬 이들이 절절히 필요하다. 농민, 학생, 청년·청소년, 한 집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함께 뭉칠 때이다. 

문제는 간단하다. 지금까지 잘못 걸어왔고, 벼랑 끝에 다다랐으니 다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면 된다. 

본 글을 쓰면서 혹자는 굳이 새로운 계급이론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1세계 3세계 불평등, 세대 불평등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냐고 물어 생각에 잠겼었다. 왜 기후계급을 말해야하는가. 엄밀하지도, 확실하지도 않은 용어를 굳이 왜 써야할까. 어쩌면 기존 계급론의 시야에서는 엄밀하지 못한 선동에 불과할 수도 있는 시도를 왜 하는 것일까. 

먼저 기후계급은 어설픈 학자가 새로 만든 용어가 아니다. 기후운동의 현장에서 등장한 구호다. 사람들은 기후계급(Climate Class)를 외치며 기후문제가 (기존의)계급문제임을 외치고, 그 자리에서 한 마음 한 뜻을 모았다. 

나는 나무를 심는 사람들을 믿는다. 비록 베어지는 나무가 훨씬 많더라도, 그 생명력을, 나무의 자라남과 인간의 생명력을 믿는다. 이들이 빼앗긴 들을 되찾고 다음의 봄을 맞이해 내리라 믿기에 주저앉지 않는다. 파란하늘 아래서 진정한 풍요로움과 함께하기를. 오늘을 뒤집고 내일로 가자.                                                


                                 

Ⅴ 참고문헌     


존 벨라미 포스터(2000). 김민정 황정규 역(2016). 마르크스의 생태학. 인간사랑 (완독)     

Polanyi. K. (1944). The Great Tranpomation. 홍기빈 역(2009). 거대한 전환. 도서출판 길. (검토완료, 완독)     

E. P. Thomson. (1963).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나종일 외 역(2000).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작과 비평사. (검토완료)     

울리히 벡(1986), 홍성태 역(2006). 위험사회. 새물결 (검토 완료)     

앙드레 고르, 임희근 정혜용 역(2015). 에콜로지카 (검토 중)     

조효제(2019). 기후문제는 인권문제다. 녹색평론 제 169호. (검토완료, 완독)     

홍덕화(2019). 기후정의와 전환의 정치. 재단법인 숲과 나눔 주최 생명자유공동체 포럼 (검토완료)     

김윤식. (2016).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본 기후변화에 대한 일 고찰. 사회과학연구, 34(), 65-93. (검토 중)     

김민정. (2018). 기후변화를 통해 ‘제국주의’ 이해하기. 환경사회학연구 ECO, 22(2), 321-330. (검토 중)     

앤서니 기든스, 홍욱희 역 (2009), 기후변화의 정치학, 에코리브르,  (검토 예정)     


* 작성 중인 글입니다.

* 2019.12.24, 김동춘 교수의 <계급과 계층> 기말레포트로 제출한 글입니다.

* 각주가 첨부되지 않아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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