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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Jan 16. 2020

계급사회학을 읽고, 위험사회인가 계급사회인가

<17일, 19일 수업을 듣고>      

한국사회를, 계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섬세한 이론이 필요하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경제결정론이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경제구조가(토대가) 상부구조(문화, 국가, 정치)를 결정한다는 것은 틀렸다. 사회라는 것은 알면 알수록 복잡한, 아주 복잡한 관계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어, 생산체제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예컨대, 확증편향, 인지편향. 각종 편향들로 둘러싸인 사람.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최근의 페이크뉴스가 그리 판을 치는 것에는 ‘편향’이 있다. 단순히 이해관계로만은 설명할 수 없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계급이 아냐.”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그보다 더 작고 섬세한 무언가다. 이성의 범주에서 들어가 감정의 범주로. 이에서 더 들어가, 봉준호의 냄새처럼. 인간의 심리적 측면을 맑스가 과소평가한 부분이 있을 수 있겠다. 맑스의 초점이 아니었던 거겠지만. 

총체적으로, 코끼리의 다른 다리를 만진 것 아닐까. 맑스와 베버는 서로의 위치와 관심사, 시기, 위치의 차이가 있었다. 이 두 이론이 서로 상충되고 대비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대비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시험에 편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닐까.

맑스와 베버의 이론이 시점마다 다르게 적용된다는 것에 깨닫는 바가 있었다. 시점에 따라서 이론의 적합성이 달라진다는 것. 좋은 이론이란 무엇일까. 절대적 보편성을 가지는 이론은 없다. 역사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이론이 가지는 힘이 달라진다. 이는 폭넓은 이론들을 공부하고, 시기와 상황을 알맞게 인식해, 적합한 이론을 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겠다. 이론을 공부한다는 것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 세상을 보는 프리즘이 된다는 것. 매번 하는 말이지만, 제대로 공부해야겠다. 피상, 일면, 미숙을 피해서.  

한편, 미숙함에 대한 초조함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맑스에 대한, 베버에 대한 이해가 깊었더라면 놓치지 않았을 것들, 더 구체적이고 엄밀한 질문들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스테판 에젤, 계급사회학, 2-3장>을 읽고     

라이트(Wright)의 모순적 계급위치 개념은 인상적이다. “모든 계급위치는 모순적 위치지만 계급구조상의 어떤 위치들은 자본주의사회의기본적인 모순적 계급관계들 사이에서 찢어진 위치들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중적으로 그러하다(41p).”

다른 사회학자들은 라이트의 계급 수정에 대해서 마르크스의 계급개념화에서 베버의 계급개념화로 움직인다고 비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방향의 비판에 대해 라이트는 “자신의 접근이 여전히 본질적으로는 ‘유물론자’이므로 마르크스적이고, ‘문화주의자’가 아니므로 베버적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47p).”는데, 여기서 ‘유물론자’는 무슨 뜻일까. 계급개념에 대한 마르크스적 전통과 베버적 전통의 차이가 이 단어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착취과정에 깊은 관련이 있는 물질적 이익이 행위자의 주관적 상태와는 관계없이 객관적 특징을 지니는 것(48p)”이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의 핵심이다. 베버적 시각에서는 “합리화가 행위자의 물적 이익에 대한 특정 종류의 주관적 이해를 함축하고 있다(48p).”

점차 마르크스와 베버의 계급개념은 수렴되고 있다. 생산수단의 소유만으로는 나뉠 수 없는 다양한 요소‧상황‧위치가 존재하거니와, 베버의 계급상황이 마르크스의 아이디어와유사하다는 의견이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이 사회계급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그리고 현 계급배치의 일반적 현상에 대한 새로운 합의(64p)”가 도출되는 국면이다. 


<위험사회인가 계급사회인가>     

울리히 벡의『위험사회』에서 저자는 계급사회에서 위험사회로 도래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계급에 관계없이 근대의 부산물에 ‘공평하게’ 노출된다고 썼다고 한다. 

물론 맞다. 일면 동의한다. 기후변화로 인해 초래되는 수많은 자연재해와 치닫는 미세먼지는 한 공간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동시에 닥친다. 하지만 과연 ‘공평하게’ 노출되는가?

미증유의 위기에 직면한 현재, 유례없던 폭염이 그 신호를 알린다. 옥탑의 단칸방 독거노인은 낡은 선풍기 하나로 폭염을 맞이하지만 타워펠리스 꼭대기 층 주민은 에어컨을 빵빵하게 켜고 그마저 춥다며 보일러도 켠다. 시야를 세계로 확장하면 한국의 사람들은 무더위에 버티고 버티다 은행 같은 안전지대로 도망가지만, 미얀마의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폭염에 쓰러진다.

기후위기라는 파국 앞에서 불평등‧계급문제가 빠져서는 안 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위험에 공평하게 노출되지 않는다. 계급에 따른 위기대응력이 다르다. 막강한 방패로 위험을 막아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이가 있다.

무엇보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책임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파국이 공평하게 닥친다는 것 자체가 불공평이다. 위험이 공평하게 찾아오는 게 이 사태가 불공평하다는 증거다.

그럼에, 위험사회가 닥쳐도 계급사회다.      



* 2019.9.19, 김동춘 교수의 <계급과 계층> 수업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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