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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Jan 16. 2020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방법론과 계급론

이반 일리치와 에드워드 파머 톰슨

목차

                    

1. 서론 

지금 폴라니를 읽어야 하는 까닭 – 두 위기에 마주하여     

2. 폴라니의 방법론

폴라니의 역사관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

이중적 운동

속도 늦추기

인류학적 연구

경제 인류학

묻어 들어 있음

폴라니의 사회과학방법론 – 새의 날개짓

이반 일리치와 폴라니     

3. 폴라니의 계급론

이중적 운동, 이중적 계급

폴라니 계급론의 특징

역사적 과정에서의 계급

E.P 톰슨의 계급론     

4. 결론     

5. 참고문헌               

                   

 

Ⅰ서론     


지금 폴라니를 읽어야 하는 까닭이 뭘까. 지금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가. 늘 사회과학자들은 비관적인 진단을 내리곤 한다지만, 그래왔음에도 돌이킬 수 없이 잘못된 방향으로 이래저래 흘러온 듯하다. 

숫자 8 개가 한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전자의 8은 8명으로 이들이 세계 부의 절반을 가지고 있다는 옥스팜의 통계다. 후자의 8은 8년으로 지구 온도 상승을 1.5도로 제한하기 위해 남은 시간이다. 위기다. 두 위기가 감돌고 있다. 두 개의 8이 지금이 유례 없는 위기임을 시사한다. 나는 이를 쌍둥이 위기 혹은 쌍팔의 위기라 부르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것을 기후우울증이라 이름 붙여도 되는가 싶다. 북극곰이 죽어가는 것에 괴로워할만큼 나는 섬세하지 않다. 기후변화를 한낱 날씨 변화로 생각하거나, 북극곰이 멸종하고 빙하가 녹아서 수영장 물 높이 높아지는 걸로 생각하는 이들은 무지의 소치고, 이것은 공멸에 대한 이야기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미래의 시나리오를 앞에 두고 있다. 그동안 번영이랍고서 이루어놓은 모든 사회정치경제 인프라는 잠겨버리거나 그전에 세계대전 직후처럼 잿더미로 변해버릴 것이다. 어느 쪽이든 파국은 그 크기를 짐작키 어렵다.     

폴라니는『거대한 전환』에서 파시즘의 출현에 대해서 썼다. 유토피아 자기조정시장의 도입은 사회를 극단적인 두 힘의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고, 금본위제가 붕괴하며 간신히 지탱하던 백년평화가 붕괴하자 어느 각지라고 할 것 없이 파시즘이 집권하기 시작했다. 위기라는 두 글자가 주는 안온함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바라보면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모든 것이 고통과 비참함 곁에 놓인다는 뜻이다.

 많은 것이 1930년대 그 때와 닮았다. 『거대한 전환』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밀려오는 공포를 느꼈다. 다시 또 한 번의 거대한 전환이 시작되려 하는가. 양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각 국에서 보수파 정당이 득세하며, 사회를 이루는 단단한 조직들이 무너지고 있다. 사회적 스트레스와 긴장은 점점 팽팽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곧 전쟁이 터진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마는, 몇 개 나라에 머물지 않고 세계대전이라 부를 수 있는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진단이다.  

꿈을 바꾸기로 했다. 학자를 꿈꾸었는데, 지금은 방 한 켠에서 하고 싶은 공부나 연구를 할 때가 아닌 것 같다. 목수가 되기로 했다. 온 세상이 물(혹은 불)에 휩쓸릴테니 방주를 만들어야겠다. 지금도 나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널빤지 조각을 다듬고 있는 것이다.      

파국의 ‘거대한 전환’을 막기 위해서는 공생의 ‘거대한 전환’이 필요하다. 기후위기와 경제위기(분배위기)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다. 총체적인 전환이 없고서는 더 이상 이 방향대로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지속될 수 없는 삶을 살아 왔고 살고 있다. 하지만 말이 쉽지, 전면적인 전환을 그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급한 마음에 섣부른 전환을 시도하는 것은 위험하다. 최선이 타락하면 최악이 되는 법이니까. 폴라니의 역사흐름을 따라가며,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피넘랜드 법 같이 어설픈 사회보호의 명분으로 또 다른 파국적인 상황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중한 전환이다.  

이러한 국면에 폴라니의 사유는 절박하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현실을 진단하는 것부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바로잡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폴라니의 사유는 우리에게 많은 힌트를 던져준다.

폴라니의 경제 사상은 위기까지 치달은 지금의 현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론이다. 허구 유토피아인 자기조정시장의 침범으로 인간은 경제적 동기로만 움직이는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되었고, 화폐, 토지, 노동 등 상품화해서는 안 되는 공적 영역의 것들이 시장에 내몰렸다. 자기 조정시장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아닌 인위적인 근대 프로젝트였고 악마의 맷돌이 굴러갔고 굴러가고 있다. 

‘자기가 무얼하는지 아는 것’에 생각이 머문다. 폴라니는 무얼 하려고 했을까. 이 사람은 고통을 마주하는 게 자기 인생의 목표였다는데, 어떤 마음으로『거대한 전환』을 썼을까. 거대한 전환의 마지막 장은 읽기가 쉽지 않았다. 이 긴 여정을 통해서 그가 하고픈 말이 무엇이었을까 고민이 곰곰이 들었다. 나는 그를 단순한 비판적 사회과학자의 한 사람으로 보고 싶지 않다. 그의 방법론에 갖은 영감을 받은 것은, 그가 영혼을 사유하는 철학자이자, 지독한 합리성을 잃지 않은 경제학자이자, 풍부한 맥락들을 짚어낼 수 있는 사회학자이자, 섬세한 역사학자였던 까닭이다. 다른 무엇보다 그에게는 영혼, 윤리가 곧게 있었다. 

윤리가 말소된 사회다. 그 속에서 칼 폴라니의 이름이 호명되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그리고 윤리의 말소와 더불어 단조롭고 편협하고 협애한 사유의 틀에 갇힌 21세기의 진보인에게 폴라니의 총체적 사유는 시야를 넓혀준다.     

마지막으로 한 평에 눈이 갔다. 모든 것을 바꾸며, 대안의 총체적 연대를 꾀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폴라니와 함께 방주를 만드리라.      

“폴라니는 역량 증진적인 '비개혁적 개혁주의'의 관점에서 복지국가, 기본소득 운동, 경제 민주화와 토지공개념, 협동조합과 커먼스를 비롯한 사회적, 생태적 연대 경제, 결사체 정치, 대안적 삶의 문화 운동 등 다중 트랙을 아우르는 상생적 공진의 기획과 전략을 겨냥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이 우리에게 '지금 왜 폴라니인가'를 말해 주는 이유다.”              


                                              

Ⅱ 폴라니의 방법론     


1. 폴라니의 역사관, 역사적 방법론   

  

1)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     


폴라니가 역사를 보았던 눈은 색달랐다. 그의 역사관은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는 순환사관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하다. 시장 신화를 부수려 애써온 그가 진보사관과 거리를 두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시장 신화는 일종의 진보사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합리적이고 아름다운) 시장과 경제 영역은 처음부터 인간 사회에 있어왔지만, 풍부한 합리성과 효율성으로 인류에게 최고의 혜택을 주기까지는 탐욕스러운 국가나 무지몽매한 종교와 관습 등 수많은 사회적 장애물들과 몇 천 년 동안 투쟁을 벌여야 했다(홍기빈, 2002 : 171p).”     

시장 신화를 만들어 온 경제적 자유주의자 – 시장주의자 – 들은 시장화를 합리하기 위해 근대 이전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기 시작했다. 비합리성과 무지몽매한 종교, 관념론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고 합리적인 체제를 구축할 수 없었다고 말하며, 이전의 역사를 짓밟는다. 그렇게 역사 전반에 존재했던 지혜와 가치들은 소각된다. 

진보사관에 흠뻑 빠진 이들은 시장체제의 정당성을 경제발전에서 찾는다. “거봐라, 시장화로 이렇게 잘 살게 되었지 않느냐”는 식으로 외치는 듯하다. 폴라니는 그런 괴기한 종자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산업혁명이 1790년대 경의 불행한 노동계급에게 하나의 재난이었다는 전통적인 관점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 학자들에 의하면 보통 사람들의 머리 위를 덮쳤던 여러 생활수준 척도들의 급격한 악화란 실제로 벌어진 적이 없으며, 오히려 평균적으로 보면 그들은 공장 체제의 도입 이후 그 전보다 실질적으로 더 잘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략) 경제적 복지 후생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잣대 – 실질 임금과 인구 수치 – 로 보자면, 이른바 초기 자본주의의 ‘생지옥’이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K. Polanyi, 1944 : 420p).”     

 폴라니는 이러한 경제주의적 선입견에 기반해 역사의 진보를 광신하는 역사가·자유주의자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따라서 폴라니의 역사관은 당연하게도 사회가 얼마나 진보했는가, 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었는가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인간 공동체가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서 냉철한 사회과학의 눈으로 진단하는 것이다. 폴라니는 ‘공동체의 질’, ‘문명의 쇠락’, ‘사람들의 저질화’, ‘비참함’과 같은 단어를 사용해 경제발전의 신화와 교리들을 부순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믿음, 광신에 찬물을 들이부음으로써 지금의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본다. 이를 통해 이전의 것들 – 전통적, 토착적 가치들 – 을 진보라는 명목아래 생각 없이 짓밟아버리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 역사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서는 냉철한 평가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지금의 우리는 1970년대의 사회보다 나아졌는가? 1인당 GDP가 몇 배 넘었으니 몇 배는 진보했다 보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 경제성장 이데올로기, GDP만능주의에 찌든 – 통속적 사고관 이지만 폴라니의 눈에는 단지 명목변수가 변한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무엇을 잃었는지, 3만 불과 바꾼 것이 무엇인지, 아니 3만 불을 좇으려는 무지막지한 경제성장 만능주의에 의해 무엇을 빼앗겼는지 잔잔한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폴라니의 역사관을 순환사관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폴라니는 문명을 단조로운 발전과전으로 보지 않았다. “문명이란 생명체나 마찬가지로 무수한 독립적 요인들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그 요인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둘러싼 제로들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이다(95p).” 무수한 요인들로 구성된 문명이 하나의 지표로 평가될 수는 없다.    

       

2) 이중적 운동     


폴라니의 역사 관찰은 ‘이중적 운동(double movement)’이라는 낯선 작용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진다. 이것은 허구 유토피아를 도입하려는 힘과 그에 반작용하는 힘으로 시장의 유토피아적인 성격과 그 유토피아를 강요함으로써 나타나는 파국이라는 폴라니의 관점이 집약된다. 폴라니 정치경제학의 핵심되는 개념이다.

사회의 한 부분에서는 국가 기구를 통해 사회 전체를 자기 조정에 순응시킴으로써 시장을 중심으로 재구성되는 순수한 ‘시장적 사회’를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존재론적 안정성’을 지키기 위해 시장 경제에 개입한다. 결국 시장 자본주의는 자신의 터전인 사회 기본 조직의 파괴라는 모순을 그 안에 품고 있다(홍기빈, 2002 : 180-182p). 

자기모순을 안에 품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데, 그렇기 때문에 ‘허구 유토피아’인 것이다. 폴라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따라서 사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취를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K. Polanyi, 1994 : 94p).”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에서는 이 이중적 운동의 역사를 다룬다. 특히 19세기 역사를 그 이중적 운동으로 설명한다.        

“19세기 사회사는 이중적 운동의 결과이다. 진짜배기 상품에 대해서는 시장적인 조직 방식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이, 그리고 허구 상품에 대해서는 시장적 조직 방식을 제한하는 과정이 나란히 나타났던 것이다(K. Polanyi, 1994 : 248p).”      

이 이중적 운동의 경우 매 상황마다 상이한 형태로 드러난다. 사회의 자기보호가 제국주의로 나타나도 종국에 치달아서는 파시즘으로 등장한다. 이 보호가 보호가 아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전반적으로 폴라니의 역사관에서는 긍정과 부정의 형태가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론 전반에 가치판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면면에서 가치판단을 한 것 같지 않다. 이것은 그가 연역적인 방법을 선호하지 않았던 것도 한 요인이다.

이중적 운동은 단일되고 같은 계급의 구호로 이루어진 두 힘의 대립이 아니다. 자유주의의 확대와 유토피아의 시장화에, 이전의 것들을 지키기 위한 각시의 각각 각국의 보호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단일한 보호운동이 존재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단일한 면은 오직 시장으로부터 초래하는 파국을 막기 위함에 발현되었다는 것이지 그 결과가 맷돌 회전 속도를 가속화하느냐 늦추느냐는 때마다 다르다.


3) 속도 늦추기     


한편 폴라니는 ‘속도 늦추기’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자기조정시장이라는 허구 유토피아에 맞서 등장한 사회보호 운동이 그것을 설령 막지 못했더라도 늦추는 효과를 낳는다면 성공했다고 본다. ‘경제적 진보’를 늦추는 것이 선방한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이는 그가 영국 노동계급에 대해 서술할 때 “그것은 경제적 진보를 늦추는 데 성공했으니까(444p).”라고 평가하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경제적 진보가 토착 공동체 사회의 뿌리뽑힘과 같은 말이 되는 듯하기도 한다. 시장의 도입을 늦추는 것, 너무 빠르게 사회조직의 원리가 바뀌지 않는 것이 보호다.   

        

2. 인류학적 방법론     


1) 경제인류학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에는 인류학적 연구 결과들이 빼곡이 등장한다. 마가렛 미드, 말리노프스키, 투른발트 등 역사 서술의 전반에서 인류학적 연구를 수용한다. 이는 하이에크와 대조하면 무척 다른 서술법이라 할 수 있다. 하이에크는 연역적으로 시장이란 무엇이며 사회란 무엇이고 사회주의가 무엇이라 정의하고 그것이 자유의 원칙과 이념에 얼마나 위배되는지를 힘주어 써내려간다. 하지만 이것은 폴라니와 대조할 때 몰역사적이고, 사회과학적이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  

폴라니는 고전파 경제학자들과 ‘과학적’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대체적 정치경제학의 필요성을 느꼈다. 시장 신화라는 허구 대신 실제 시장 자본주의 사회의 역동을 설명할 현실적인 정치경제학을 확립하려한 했고 거대한 전환은 그 결실이다. 

이러한 폴라니의 연구를 ‘경제인류학’이라 부른다, 폴라니는 사회경제를 연구하는 데 있어 인류학적으로 접근해야 함을 중시했던 것 같다.     

“경제인류학은 폴라니의 영향이 가장 안정적으로 ‘담겨’ 있는 분야일 것이다. 폴라니는 근대의 시장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 대해 시장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데 쓰이는 개념틀 – 최적화, 자본 축적, 화폐, 가격, 수요 – 등을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홍기빈, 2002, 189p)     

그는 인류학적 연구들을 바탕으로 실제 시장유토피아와 제국주의가 사회에 어떤 참상을 남겼는지를 섬세하게 가 닿을 수 있었다. 스피넘랜드 법 적용 이후 영국의 농민·노동자와 인도의 차디르 공동체가 붕괴하는 모습을 면밀히 관찰했고, 이들의 참혹상이 단순한 가난과 빈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 붕괴임을 역설한다.          

2) 묻어 들어 있음(Embeddedness)     


이러한 인류학적 접근은 폴라니가 경제를 사회에 ‘묻어 들어가 있는’것으로 파악하게 하였다.

폴라니는 경제적 과정이 사회적 과정에 묻어 들어가 있는 형태를 크게 호혜성(reciprocity), 재분배(redistrbution), 교환(exchange)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호혜성은 말리노프스키의 연구인 트로브리앙 제도의 쿨라 교역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제도의 각 섬에 있는 개인들 사이에서는 붉은 팔찌가 시계 방향으로, 흰 팔찌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순환하는데, 팔찌를 받은 이는 그것을 준 상대에게 일정한 품목을 선물하여 답례한다. 그 결과로 이 교역에 참여하는 이들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강화하게 된다. 재분배의 예로는 북아메리카 콰키우틀족의 포틀래치(potlach)를 들 수 있다. 이 부족의 부유한 추장은 1년에 한 번씩 자기 물건을 마구 부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한다(홍기빈, 2002 : 168-169).  

이러한 인류학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폴라니는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하나는, 이러한 형태들이 시장 신화에서처럼 개인들이 경제적 교환을 하다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거래에 앞선 사회적 관계, 즉 지지 구조(supportive structure)에서 나온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런 형태로 경제적 과정이 이루어질 때 그 과정의 경제적 성격이 표출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이다.

즉 교환에 기초한 시장원리는 사회의 경제를 구성하는 원리 중 하나에 불과했음을, 그는 인류학 연구를 통해 밝혀내고 있다. 

경제가 사회에 묻어들어가 있다는 테제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시장 신화에서는 가장 일차적이고 주요한 개인들의 상호 작용이 시장에 기반하기에, 국가와 사회 제도는 이를 위한 보조 장치 혹은 파생 장치로 그려진다. 하지만 역사적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실제 모습을, ‘실체’를 보면 사회적 관계와 과정 제도가 선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적 과정은 따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없고 앞선 사회적 관계와 과정의 한 측면으로 통합되어 있다(홍기빈, 2002 : 168p).

이에 시장 경제가 인간의 본질에 적합한 자연제도라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나 근거가 없는 허구에 불과하다.     

+ 실체적 경제          


3. 폴라니의 사회과학 방법론 - 새의 날개짓     


“진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아니라 만유인력의 법칙을 이겨내고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짓에 있다”     

폴라니는 마르크스주의의 객관주의적 성격에 단호히 반발했다. 위의 문장은 폴라니가 생산력의 발전을 매개로 역사와 사회 진보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제2 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에 가한 비판구이다.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적 결단이 지니는 중요성을 말했다고 할 수 있다. 

폴라니는 과학과 객관성에 대해서 신중한 입장을 취했던 것 같다. 경제적 자유주의의 논리가, ‘유토피아’라는 허구가 마치 과학적 법칙처럼 통용되는 현실에 안타까워했을 뿐더러,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의 역동성을 과학으로 인지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렇다면 이 의미심장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법칙을 찾는 것이 아닌 법칙을 이겨내는 힘이라는 것은 사회과학이 마르크스와 같이 필연적 인과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서사적 맥에서 지금의 나아갈 방향을 짚어보는 것이라는 걸까.          


4.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   

   

거대한 전환을 읽으면서 나는 이반 일리치를 떠올렸다. 두 학자의 색이 엇비슷했던 까닭이다. 많은 부분이 겹쳐보였고, 두 학자의 방법론은 많은 부분 닮아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평생에 걸쳐 근대산업문명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려 했던 철학자이다. 사회·경제·역사·언어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가 확실하다 믿는 삶과 사회에 대한 전제를, 의심조차 하지 못하는 ‘확실성들(certainties)’을 근원적으로 사유함으로써 부수려 했다.      

“그는 서구의 사회제도뿐 아니라 그 세계관이 내적으로는 인간에 대해서 외적으로는 자연에 대해서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있는지를 증명하는데 주력했다. (중략) 일리치의 책은 배우고, 걷고, 살아가고 서로 돌보거나 대화하는 인류 본연의 행위를 지켜내려는 변론이며, 학교, 교통, 위성 도시, 대형 병원, 매스미디어 등에 의해 가능해진 대량 생산으로의 변화에 대한 반론으로 읽힐 수 있다. 그 스스로 규정한 개념으로 요약해보자면, 일리치의 저작은 침몰하는 비산업적 문화의 세계에 바치는 분명하게 의도된 애도사이다.”     

실제로 일리치는 폴라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바 있다. 시장경제사회가 형성된 것이 아주 최근의 일이고, 역사적 관점으로 아주 예외적인 일이라 폴라니의 식견에 일리치는 영향을 받았다. 자급의 문화가 뿌리내린 토착사회에서 희소성이라는 경제적 가치가 지배하는 근대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그는 희소성(scarcity)이 근대산업문명을 이루는 핵심전제라 판단하여 희소성의 역사를 연구하게 된다.

희소성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기도 했다. 이는 “자급의 삶에 대한 전쟁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땅에 발붙이고 서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공격하는 전쟁이었다(L. Honiacki, 1991 : 83p).” 경제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통계자료들은 ‘성공’을 증명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잘못된 척도로 잰 지표는 때로는 전쟁과 수탈과 착취를 합리화할 뿐이다.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노동착취·소외의 고발에 지금의 가장 빈곤한 하층노동자도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귀족보다 더 풍요롭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 증거로 GDP상승곡선을 의기양양하게 내민다. 이 레퍼토리는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빈민층에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유효한 논리다. 하지만 문화, 삶, 정신, 심리로 이루어진 존재 전반에서 오로지 화폐 단위로 측정될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논하는 것은 편협한 계산방식이라고밖에 이름붙일 수 없다. 폴라니는 사람들이 실로 살아가고 있는 살림살이 경제와, 수요공급곡선으로 재단된 형식적 경제는 다르다 생각했다. 폴라니는 이를 실체적 경제라 칭한다. 다음은 일리치의 벗 리 호이나키의 글에 나오는 ‘실체적 경제’에 대한 증언이다.     

“마침내 나는 나와 내 이웃들 사이의 교섭은 무한히 풍부한 교환관계, 상호 증여의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행동들은 빈번히 일어났고, 다양한 시간과 장소의 분위기에 따라 많은 다양한 형태와 빛깔을 띠고 일어났다. 숫자를 생각하고, 계산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짓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셈과 계산의 세계가 아니었다. (중략) 나는 희소성의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로 온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일을 돕기 위해서 서로서로에게 아낌없이 시간을 내주는 모습에 놀라움을 느꼈다. (중략) 나눔과 베품이야말로 그들의 삶터에서 삶을 유지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본질적 요소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중략) 그들은 시장경제학에서는 배제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물론, 누구나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고, 또 모든 사람이 꼭 같이 관대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비경제학적’ 행동이 늘 우세하였다. 눈만 뜨고 있으면 언제나 그러한 모습이 보였다(L. Honiacki, 1991 : 79p).”     

칼 폴라니는 ‘실체적 경제’와 ‘형식적 경제’의 구분은 인간이 자연과 동료 인간들에 게 의존해서 자신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나가는 상호작용의 과정이 ‘실체적 경제’라면, ‘형식적 경제’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희소한 자원과 수단을 합리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효율적 선택의 과정을 의미한다. 인간은 사회집단의 일원이고, 개인의 경제행위는 비경제적 목표들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범위의 사회적 관계와 결합되어 있었다. 경제가 사회에 “묻혀 있는” 한, 개인의 경제행위는 사회의 규범에 의해 제약을 받게 된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발전과 함께 경제는 점차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경제가 자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면서 사회적, 문화적 관계가 시장의 규칙에 종속되기에 이른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가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벗어나서 독자적인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여타 인간의 삶을 지배하게 된 것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산업혁명 이후 시장경제의 비대화와 함께 일어난 ‘역사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폴라니는 경제가 처음부터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했다는 전제 또한 오류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입증했다. 경제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게 된 것은 위에서 말한 ‘형식적 경제’가 ‘실체적 경제’를 삼켜버리면서 일어난 현상으로서 긴 역사적 과정에 서 보면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시장만능주의가 예외적이란 폴라니의 시선은 일리치가 근대를 매우 낯설게 본 것과 관련이 깊다. 일리치는 근대성 자체를 저격한 저격수였고, 허락 없이 자리잡은 고정관념들을 비판하여 그 사이에서 잃어버린 ‘실체적 가치’들을 찾아내려 했던 것이다. 타자에 대한 환대에서 타자에 대한 공포로, 모든 것을 계산가능한 것으로 치환하는 패러다임을, 인위적 질서가 유행하고 계획과 설계가 힘을 얻는 21세기의 허구 유토피아를 부수는 것을 그들은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폴라니와 일리치는 모두 인위적인 것을 경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노자와 색깔이 같겠다. 그러니 자기조정시장이라는 완벽한 수적- 유토피아적 메커니즘이 허구라는 것을 강하게 역설하는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두 학자 모두 고통의 근원에 가 닿으려 했던 것처럼 여겨졌다. 폴라니가 고통의 근인을 파헤치기 위한 것을 정치경제학의 목적으로 삼았듯이, 일리치는 잃어버린 것들을 상기하고 회복함을 통해 현대의 고통을 치유하고 싶어했다.

폴라니는 말년에 아프리카로 지적 여정을 떠나고 일리치는 말년에 중세로 떠난다. 지금 사회의 대전제를 찾는 과정이겠다. 폴라니는 실체적 경제의 흔적을 아프리카 마호메트 왕구겡서 찾았고, 일리치는 근대의 확실성(대전제)를 중세의 수도사들의 언어와 낭독을 통해서 밝히고 싶어했다. 이들의 역사관은 일리치의 책 제목처럼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다. 급속하게 달라져버린 세상에서 방향을 짚는 것은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지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그래야 나아갈 길도 보일테니.      

+ 폴라니의 서사적 역사관

+ 불확실성의 방법론

+ 수의 폭압                                   

                              

Ⅲ 폴라니의 계급론      


1. 이중적 운동, 이중적 계급     


폴라니는 계급을 어떻게 보았는가. 이에 앞서 폴라니의 ‘이중적 운동’ 개념을 다시 살펴보자. 자기조정시장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힘과 그로부터의 사회를 보호하고자 하는 힘이 이중적 운동을 하는 가운데 이 운동의 주체는 누구였을까. 폴라니는 단일한 계급이 아니었음을 역설한다. 폴라니는 허구 유토피아의 원리에 사회를 맞추려는 쪽과 이 힘에 대항해 다른 힘을 취하는 쪽을 갈랐고, 그 쪽을 구성하는 편은 때마다 달랐다. 하물며 자유주의자들조차 이편저편을 건너다니며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행보를 보였으니. 심지어는 마지막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일어난 힘은 파시즘이었다.

노동자 계급이고 지주계급이고 법·행정귀족 계급이고 신흥 자본가 계급이고 사회의 전체적·외부적 변화에 혼란스러워 하며 이리저리 종횡무진했을 뿐이었다.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말이다. 역사의 뒤편에 선 우리의 시선으로 그 때를 바라보면 단조로운 축약본만 남아 간단하게 정리되고 구분될지도 모르겠지만, 실제 변화의 힘이 들이닥치던 때를 생각해본다면 그리 간단했을 리가 없다.  

그럼에 그러한 이중적 운동에 따라 이중적 계급이 발생한다. 단일한 계급은 단기적 운동을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장기적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역부족이다. 계급이 단일한 기준과 구획표에 따라 나뉘는 것이 아닌, 역사적 이중성을 가미한 집단으로 바라보는 것이 폴라니의 견해다.

이중적 운동과 계급은 밀접하다. 다음의 폴라니 말을 보자.     

“이제 이러한 두 가지 각도에서 19세기 사회사의 모양을 결정한 운동의 개략을 그려보고자 한다. 그 하나는 경제적 자유주의라는 조직 원리와 사회의 자기 보호의 충돌로서, 이는 뿌리 깊은 사회 제도의 긴장을 낳았다. 다른 하나는 계급들 사이의 충돌로서, 앞의 것과 상호작용하면서 위기를 파국으로 바꾸어놓고 말았다.(K. Polanyi, 1944 : 382- 383p)”     

계급은 이중적 운동의 주체이면서, 이들의 충돌은 위기를 파국으로 바꾸어놓는 역할을 했다. 폴라니는 계급분석에 역점을 두고 있다. 계급의 운동이 사회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강조한다.      

“계급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 토지 계급, 중간 계급, 노동계급이 사회에서 담당했던 역할이 19세기의 사회사 전체의 모양을 결정했다. 이 계급들은 사회가 처한 전체 상황에서 생겨나는 이런저런 기능 가운데 저마다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에 맞게 배역을 맡았다(381p).”


폴라니는 절대적 계급 위치를 말하지 않는다. 계급과 법은 시장의 확대로 인한 혼란 속에서 모순적인 위치에 있곤 했다. 단일한 위치가 있지 않았다.    

      

2. 폴라니 계급론의 특징     


폴라니 계급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첫째, 전체 사회의 필요 혹은 사회 전체 상황에 따라 계급이 구성된다. 둘째, 계급은 경제적 이해관계(이익)에 달려있지 않다. 『거대한 전환』13장 ‘자유주의 교리의 탄생 2 : 계급적 이해와 사회 변화’에 나오는 다음의 문장들을 통해 이를 짚어보자.      

“계급적 이익이란 사회의 장기적 운동을 설명하는 데에서는 제한적인 도움밖에 되지 않는다. 전체 사회의 필요라는 것으로부터 각 계급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지, 각 계급의 필요라는 것으로부터 전체 사회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쪽이 훨씬 진리에 가깝다(K. Polanyi, 1944 : 413p).”     

핵심이 되는 것은 사회 전체의 상황이다. 각 계급이 어떻게 생겨나며 어떻게 사라지는가의 문제, 그 계급들이 각각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이며 그들은 어느 정도나 그것을 달성했는가의 문제, 이들 중 어떤 계급들이 어떤 구도로서 서로 협력하거나 적대하는가의 문제 등은 이 사회 전체의 상황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기 전에는 결코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 전체의 상황이 생겨났다고 하자. 이는 보통 외부 요인들, 이를테면 기후의 변화, 작황의 변화, 새로운 적의 출현, 오래된 적이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 사태, 새로운 공동 목표의 출현, 또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목적을 달성할 새로운 방법의 발견 같은 것들로 인해 생겨난다. 여러 이익 분파들이 사회 발전에서 어떤 기능을 맡았는가를 분명히 하려면 이렇게 총체적인 상황이 벌어졌을 때그 상황과 각 이익 분파들이 어떠한 궁극적 관계를 맺는가를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된다(413-414p).”     

폴라니는 계급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협력하고 적대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 상황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먼저라 역설하고 있다. 그가 강조하는 총체적 사유가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한다. 어떤 기준에 의해 계급을 구분해놓고 계급의 속성을 부여한 다음 역사를 바라보는 시도에 대해 경계한다.  

한편, 사회전체의 상황이라는 것은 외생적 측면을 갖는다. 폴라니는 내생적 측면을 무위에 가까운 것으로 여기는 듯 보인다. 인간 공동체가 내적으로는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본 것 같다. 역사의 전반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크게 사회 변화의 동학이 작동하지 않았다. 300년 전이나 500년 전이나 30년 전과 50년 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일관적이었다는 이야기다. 중세의 농노제는 수백 년의 시간동안 지속되었으니 그럼에 내부적으로 안정된 계급들, 안정된 신분제가 자리하였다. 이 전통적 지속을 깨어낸 건 외부적인 포인트다. 폴라니는 그럼에 외부적 변화의 힘에 사회 각 계급이 움직이는 양상을 관찰한다.      

“어떤 광범위한 변화가 사회를 덮치게 되었을 때 그 공동체 내의 다양한 집단들이 그 영향을 받는 방식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414p).”     

“궁극적인 원인은 외부의 여러 힘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며, 사회에서 그 내부의 세력들이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그 변화가 벌어지는 메커니즘일 분이다. ‘도전’이란 사회 전체에 주어지는 것이며, ‘대응’은 여러 집단들, 부분들, 계급들을 통해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414p).”     

그럼에 계급적 이익이라는 변수로는 장기적인 사회 과정에 대해서 만족스러운 설명을 내놓을 수 없다 폴라니는 말한다. 그 문제의 변화과정이 아예 계급의 존재 여부를 결정해버릴 수도 있을뿐더러, 기존의 여러 계급들의 이해란 오직 각 계급들이 얻고자 애쓰는 목표와 목적만을 결정할 뿐이며 그 노력의 성공여부를 결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폴라니는 “어째서 농업가들, 공장주들,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보호주의적 행동으로 자신들의 소득을 올리려 들었는가가 아니라, 어째서 그러한 그들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게 되었는가(415p)”를 중점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폴라니는 계급적 이익이 본질적으로 경제적 성격을 갖는다는 교리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물론 인간 사회가 경제적 요인들로서 조건지어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개개의 인간들이 행동하는 동기들이 오로지 물질적인 욕구 충족의 논리로 결정되는 일은 극히 예외적으로만 벌어지는 일이다. 19세기 사회는 그렇게 경제적인 것만으로 인간 행동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하여 조직되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 시대에만 고유한 특징일 뿐이다(415p).”      

경제적 동기가 인간 행동의 모든 동기라는 교리는 만들어진 허구이다. 주류 경제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합리적 개인은 만들어진 인간상이다. 그러면서 폴라니는 경제 차원의 동기보다 사회적인 인정의 문제가 계급의 형태에 더 중요하다 말한다. “어떤 계급의 이익이란 가장 직접적으로는 지위와 서열, 신분과 안정성을 뜻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일차적으로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416p).” 따라서 인간 집단의 이익을 오로지 화폐소득만으로 보면 안 된다.

폴라니는 계속하여 이른바 ‘물질주의적 오류’를 경계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GDP가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경제적 돈 계산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들, 계산기로 알 수 없는 것들을 강조한다. 시장의 무지막지한 도입으로 일어난 사회적·문화적 파국을 ‘경제적 착취’라는 이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하여 폴라니는 ‘사회 전반적 이익’이 현실에서 분파적 이익만큼 계급에 힘을 미친다고 말한다. 일개 금전적 이득이란 오직 관련 있는 몇 개인에게만 해당되지만, 그 외 종류의 이익 – 사회 전반적 이익 – 은 무수한 형태의 개인들에 영향을 주기에 사회 보호의 임무가 공동체 전체의 보편적 이익을 수호할 책임을 맡는 것이다. “따라서 집단적 이익이라는 것을 너무나 협애하게 정의하고 이해하게 되면 사회 정치적 역사를 굴절이 심한 안경을 통해 비뚤게 바라보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것을 순전히 금전적인 것으로 정의하게 된다면 사회의 보호라는 절대적인 필요를 포착하고 이해할 여지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417p).”     

“당대의 일반적 경향에 역류하는 발전 경향이 있을 때 그것을 그러한 역류 경향을 가진 계급들의 영향력으로 설명(그 계급이 어째서 이렇게 큰 영향력을 갖는지는 설명되지 않은 채)하는 대신, 그 계급이 그렇게 큰 영향력을 갖게 된 원인은 그들이 공동체 전체의 일반 이익과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발전 경향을 대표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쪽을 택해왔다(475p)”     

“요컨대 이른바 집단주의 운동이라는 것의 원천은 어떤 단일의 집단이나 계급이 아니었다. 물론 그 운동의 결말은 관련된 계급 이익의 성격에 따라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따져볼 때 그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게 만든 것은 사회 전체의 이익이었다. (중략) 그래서 우리의 설명은 이런저런 개별 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시장에 의해 재난에 처한 여러 사회적 이익의 내용을 중심으로 묶어나가는 것이 더 합리적인 일이라고 본다(430p).”          


3. 역사적 과정에서의 계급     


폴라니는 각 계급의 현시적인 움직임에 대해서 ‘가지가지의 대응들’이라 썼다. 위기의 시기가 올 때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해결책들이 서로 정반대 방향으로 사회를 끌고 나가고자 할 수가 있고, 이때에는 계급적 이익의 충돌이 타협이 아니라 전 사회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큰 격변을 일으킨다. 따라서 계급의 이해를 위해서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이해가 선결적이다. 특히 위기의 시대에는 더욱.      

“일정한 역사적 전환기가 되면 순전히 그 순간의 필요 때문에 새로운 계급들이 생겨나는 일이 다반사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따져볼 때, 어떤 계급이 전체 역사의 드라마에서 얻게 되는 배역은 그 계급이 사회 전체와 맺고 있는 관계에서 주어지는 것이다(K. Polanyi 1944 : 419p).”     

폴라니는 1795년 스피넘랜드 법 도입과, 1930년 파시즘의 출현을 이 위기의 시대로 보고 시대의 출현에 각 계급의 양상을 관찰하였다.     

“인간에 대한 위험과 자연에 대한 위험을 깨끗이 분리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시장경제에 대한 노동계급의 대응과 농민의 대응은 모두 보호주의라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전자는 주로 사회 입법이나 공장법의 형태를 띄었고, 후자는 국내 농업 진흥을 위한 보호 관세와 토지 관련법의 형태를 띄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중대한 차이점이 있었다. 비상 사태가 도래할 경우 유럽의 농업 경영자들과 농민들은 시장 체제를 수호하려 나섰던 반면, 노동계급은 그것을 위협에 빠뜨릴 정책들을 실행에 옮기려 들었던 것이다. 시장 체제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며 그 보호주의 운동을 구성하는 두 세력 모두가 그것에 위기를 가져온 장본인들이었지만, 토지에 관련된 사회 계층들은 시장 체제와 타협하는 방향을 지향했던 반면, 넓은 의미의 노동계급은 시장 체제의 여러 원칙들을 거침없이 깨어버리고 그것에 공공연하게 도전하는 일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485-486p)”     

     

4. E.P 톰슨의 계급론     


에드워드 파머 톰슨(Edward Palmer Thompson, 1924–1993)은 영국의 역사가로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을 통해 형성적 계급론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다. 앞서 바라본 폴라니의 계급론을 바탕으로 톰슨의 계급론을 살펴보자.      

이 두 명의 학자는 실제로도 교류가 있었다. 톰슨의 연구에서 폴라니의 영향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한다. 아래는 폴라니의 전기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폴라니에 대한 문헌에서 톰슨은 보통 그의 영적, 지적 형제로 언급된다. (중략) 1958년에 폴라니는 자신의 세계관은 “<뉴리즈너> 창간호에 실린 E.P 톰슨의 세계관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중략) 두 사상가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자였고, 산업혁명의 극히 해로운 영향을 강조했다. 두 사람 모두 경제주의 마르크스주의를 경멸했고, 전후 자본주의를 도덕적으로 비판했다(Gareth Dale, 2016 : 391p)”     

“이들(톰슨과 신좌파)과 폴라니 모두 소비주의가 성장하면서 이제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 세력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계급 구조가 해체되었다고 생각했으면서도 현실의 노동자 운동(특히 1956년의 헝가리)에서 영감을 얻었다. 폴라니는 레이먼드 월리엄스 같은 신좌파 이론가들이 내놓은, 근대성 속의 인간 사회에 일어난 균열이라는 진단을 대체로 공유했다. 다시 말해 이는 마르크스주의 대본의 내용과는 달리 계급 갈등이 아니라 주로 “도덕적 인식이...차단된 상태”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392p).”     

폴라니가 직접 자신과 톰슨의 세계관과 유사하다 말했을 만큼, 두 학자가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에 보이는 태도는 엇비슷하다. 이 교차점은 계급론에서도 드러난다. 

아래는『영국 노동계급의 역사』의 인용문들로 톰슨의 계급론을 엿볼 수 있는 문장들이다. 아마도 그의 계급론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계급이라는 것은 관계이지 사물이 아니다.(9p)” 따라서 톰슨의 계급론에서 ‘형성’이라는 키워드는 핵심적인 위치를 가진다.      

“형성(making)이라 한 것은 이 책이 진행 중인 어떤 과정에 관한 연구이기 때문인데, 진행 중인 과정은 여건에 의해 좌우되기도 하지만 그 활동의 주체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노동계급은 정해진 어느 시간에 태양이 떠오르듯이 정해진 어떤 시간에 떠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계급 자신이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E.P Thomson : 6p).”     

“나는 계급을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라 이해하고 있는데, 그것은 생생한 경험자료 상으로나 의식상으로나 서로 분리되어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여러 사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현상이다. 나는 그것이 역사적 현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나는 계급을 어떤 ‘구조(structure)’라고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어느 ‘범주(category)’라고도 보지 않는다. (중략) 그뿐만 아니라 계급이란 개념에는 역사적 관계란 개념이 뒤따른다. 관계라고 하면 으레 다 마찬가지지만, 역사적 관계란 것도 우리가 만일 그것을 어느 특정 순간에 죽은 것으로 고정시켜놓고서 그 구조를 해부하려 든다면 제대로 분석할 수 없는 어떤 흐름(fluency)이다.(7p)”      

폴라니의 계급론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이중성, 서사성, 역사성이었다. 톰슨에게서도 이 면이 드러난다. 폴라니는 19세기를 전체적으로 관조하기 위해 이중적 운동-이중적 계급을 강조했고, 이 이해를 위해 서사적인 면을 드러냈다. 톰슨에게서는 역사성이 가장 큰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계급을 그 자신이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역사적 현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계급은, 어떤 사람들이 (이어받은 것이건 또는 함께 나누어가진 것이건) 공통된 경험의 결과 자신들 사이에는 자기들과 이해관계가 다른(대개 상반되는) 타인들과 대립되는 동일한 이해관계가 존재함을 느끼게 되고 또 그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때 나타난다. 계급적 경험은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맺게 되는, 바꿔 말하면 자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속에 들어가게 되는 그러한 생산관계에 의해서 주로 결정된다. 계급의식이란 이러한 경험들이 문화적 맥락에서(in cultural terms) 조정되는 방식, 즉 전통, 가치체계, 관념, 그리고 여러 제도적 형태 등으로 구체화되는 방식이다. 경험은 결정된 모습을 띄지만, 계급의식은 그렇지 않다. (중략) 우리는 어떤 논리(logic)을 볼 수는 있지만, 어떤 법칙(law)을 확인할 수는 없다.(7-8p)”     

그렇기에 톰슨의 계급의식은 결정되지 않고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톰슨은 계급의식을 ‘문화적 맥락에서(in cultural terms) 조정되는 방식, 즉 전통, 가치체계, 관념, 그리고 여러 제도적 형태 등으로 구체화되는 방식’으로 규정하는데, 경제주의적 함몰에 빠지지 말고 역사·문화적 접근을 강조했던 폴라니의 색채가 여기서도 드러난다.     

“한 사람의 행위가, 뒤따르는 발전이란 관점에 비추어보아 정당한 것인가 아닌가의 여부를 우리의 유일한 판단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결국은 우리 자신도 사회적 발전의 종점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산업혁명기 사람들의 실패한 주의 주장들 가운데 몇 가지에서는 우리가 아직도 치유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악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찾아낼 수도 있다. 더욱이 오늘날 세계의 더 넓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공업화 문제, 민주적 제도의 형성 문제 등 산업혁명기에 우리 자신이 경험한 것과 여러모로 유사한 문제들을 겪고 있다. 잉글랜드에서 패배한 주의 주장이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는 혹시 승리할지도 모른다(12p).”     

더하여 톰슨에게서도 진보사관의 거부가 나타난다. 역사를 발전의 종점으로 보는 시선은 편협한·협애한 역사이해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서 서술한 폴라니의 역사관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경험주의적 경제사가들의 학설에서는 노동자들이 하나의 노동력이나 이민들, 즉 통계적 수계열의 한 자료로 간주된다. (중략) 세번째 학설에 대한 반론은 그것이 역사를 훗날의 관심사라는 견지에서 바라보지 실제 일어난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11-12p).”     

더하여 톰슨은 역사를 실제 일어난 대상으로, 과거의 관점에서 보아야 함을 중시한다. 이것은 그가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자였던 것과 관련 깊다. 역사의 사실을 수치로 계량화 할 때 소거되는 맥을 경계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폴라니와 톰슨의 계급론을 살펴보았다. 비슷한 색채를 띄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보였던 계급관에 영향을 받아 톰슨은 영국 노동계급에 대하여 훌륭한 연구를 했다고 할 수 있겠다. 계급을 이렇게 이해할 때 관계와 형성에 초점을 두게 된다.                                                                 


                                                                            

Ⅳ 결론     


이상으로 폴라니의 방법론과 계급론을 간략하게 훑어보았다. 폴라니는 많은 사상가들에게 지적 원천이 되었는데, 본 글에서는 이반 일리치와 에드워드 파머 톰슨을 살펴보았다. 이들과 폴라니의 연결지점은 짙으나 연구된 바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폴라니의 방법론과 계급론이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 그 이유라 생각된다.     

거대한 전환을 읽으면서 참 밑줄을 많이 그었다. 그만큼 지금의 이 시공간에 더없이 필요한 구절들이라 생각했다. 기후위기와 경제위기가 닥치고, 재난과 전쟁이 곳곳에서 피어오를 때 폴라니는 어둠을 밝히는 촛불과 같을 것이다.  지금 이곳저곳에서 등장하는 공생의 기획들을 폴라니라는 그릇으로 묶어낼 수 있다. 더 이상 인간, 자연, 화폐를 상품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명백백해지거니와,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보호주의와 실체적 경제에 기반해야만 한다. 

폴라니의 방법론을 통해 인간과 역사에 대한 더 풍부한 이해를 할 수 있다. 사회과학의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더하여 우리의 경제성장만능주의를 깨부수고, 탁고개제(옛날 사람들의 도를 빌어 현실개혁을 실행하는 것)를 통해 지금의 꼬임을 풀 실마리들을 찾아갈 수 있다. 

폴라니의 계급론은 작금의 기후운동(Climate Action)을 설명하는데 너무나 유효하다. 나는 이것을 기후계급(Climate Class)라 부를 것이고 지금도 쓰고 있다. 기후계급의 단초를 놓는데 폴라니와 톰슨의 형성적 계급론은 더없이 많은 도움이 된다. 앞으로 더 발전시켜나가리라.     

여러모로 감사한 시간이었다. 폴라니를 만날 수 있어 행운아라 생각한다.     



Ⅴ 참고문헌     


홍기빈 역. (2002). 전 지구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옮긴이 해제. 책세상

Polanyi. K. (1944), The Great Tranpomation. 홍기빈 역(2009). 거대한 전환. 도서출판 길.

Polanyi. K. (1977). The Livehood of Man. 이병천, 나익주 역(2017). 인간의 살림살이. 후마니타스.  

Gareth Dale. (2016). Karl Polanyi: A Life on the Left. 황성원 역(2019). 홍기빈 감수. 칼 폴라니 – 왼편의 삶.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E. P. Thomson. (1963).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나종일 외 역(2000).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작과 비평사.     

Ivan Iliich. (1992). In the mirror of the past: Lectures and Addresses 1978~1990. 권루시안 역(2013).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느린걸음      

박경미. (2015). 「근대의 공리와 우연의 상실」. 신학사상 170집. 2015가을     

리 호이나키. 김종철 역(2007).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녹색평론사.     

볼프강 작스, 「일리치를 읽는 것은 우리를 강하게 한다」,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

없게 만드는가』 추천의 말, 느린걸음, 2014, 120-122p


* 2019.12.23, 유철규 교수의 <경제학세미나> 기말레포트로 제출한 글입니다.

*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주로 다뤘습니다.

* 각주는 첨부되지 않아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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