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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교환일기 / 4.14

by 노마 장윤석

저도 몇 달은 죽어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살아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유랑. 노마입니다.


저물녘이 되면 알 수 없이 아립니다. 하루가 갔습니다. 해 질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그사이에 죽어가는 목숨들이 있었을 터입니다. 이 땅에서는 하루에 서른 명이 제 손으로 목숨을 끊습니다. 저 너머의 땅들에서는 셀 수 없는 목숨들이 공포 속에서 앓다 저물었지요. 하루 새 이 병으로 죽은 이는 만 명 가량 됩니다. 이 죽음으로 하루가 길었을 그들의 가족과 친구까지 합하면 고통받은 목숨은 얼마나 될까요. 속수무책으로 죽은 친구 하나가 떠올라 마음이 저릴 때는 죽음을 셈하는 일이 참 야박하고 덧없구나 생각합니다. 하루에 하루를 더하면 세월호가 가라앉은지 여섯 해 되는 날이 오고 삼백사 명이 죽었었지 하겠지요. 하지만 이이를 지금도 간간히 그리고 사무치게 떠올리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에게는 몇 명이 죽었는지 중하지 않습니다. 삼백사는 수이기 전에 하나하나의 이름이었으니까요. 죽고 사는 문제는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는데,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참 비루한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탄 가득한 말을 내뱉었다가 거두어들입니다. 남루한 행색으로 산을 걸어 올라가 어느 시대는 안 비루했겠느냐고 그래도 오늘 날 한 번 좋다고 내 하루가 온전히 내 것만은 아니니 그러니 오늘 하루 잘 좀 보내보자고 하고 내려옵니다. 그러고는 하루가 휑하고 배신하면 이상한 부채감에 허덕이다가 무책임한 비겁함에 괴로워하다가 세상이 어쩜 이러지 하고 생각했다가 나는 어쩌지 하고 묻습니다. 치기 어리고 낭만 어렸을지 모르나 나는 좋은 세상 만들어가며 빚진 나를 갚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장, 개발, ‘자본’, ‘남성’, 근대 같은 몹쓸 것들에서 탈(脫)하여 지속가능한 지평에서 서로에게 무해한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다 믿습니다. 지금, 이성적인 예측과 전망과 경향이 암담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괜찮습니다. 눈 한 번 깜빡이면 과거이니까요. 미래에 대해서는 오직 희망뿐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낙관하지 않게 되어버린 우리라지만 헬조선의 비탄에서 벗어나 빈곤한 상상력에 저항합시다.


요새 마음이 허하고 혼란스럽다는 사람들이 많다 들었습니다. 이렇게 말해봅니다. “우리는 올해도 죽지 않고 살아갈 거야.” 절박한 질문들과 만나야 하는 시기를 살고 있지만, 앎은 앓음이라고 우리는 순진하고 절박한 근본적인 물음들에 아파하면서 알아 갈 겁니다. 그렇게 살아갈 겁니다. 그러니 이 일련의 나날들에서 괴로움 버겁게 일더라도 앎과 삶을 사랑합시다.


코로나 시대라 씁니다. 처음에는 사태라 썼습니다. 기후위기를 기후변화라 썼던 것처럼 섣부른 씀이었고, 이 시국은 오래 갈 겁니다. 그리고 위기와 재난은 계속하여 우리 곁에 찾아올 것입니다. 이 위기를 초래한 원인들이 아직 있고, 우리 사회는 이 위기들에 더없이 취약하게 쌓아 올려졌으니 녹록지 않겠습니다. 막막한 심정이나 우리는 이 가운데에서 빛과 길을 찾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짓된 평화와 익숙해진 부조리를 바탕으로 쳇바퀴처럼 돌던 일상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만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길을 잃을 때마다 찾는 책이 있습니다. 책머리에서 철학자는 묻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 주체가 되는가.” 저는 자기분열 속에 살고 있습니다.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합니다. 시대상(時代相)이라는 걸 제 식으로 적어보자면 이렇습니다. 급속한 변화 속 주위의 압박과 자기의 강박에서 설 자리를 잃고 부유합니다. 뿌리뽑힌 채. 길을 잃어버린 채.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 방황 끝에 극단으로 몰리거나 끝까지 자기가 누구인 채 모르고 살아갑니다. 없는 자들이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기댈 곳 없는 자들이 빈약한 마수에 자기를 내맡깁니다. 빈자리의 공허함을 학벌과 돈으로 채우려 이곳저곳을 방황하고 빈약한 현실주의와 자본주의의 논리는 이를 정당화합니다. 살아가는 생명으로서 무릇 소중할 아름다움은 값없는 것들이 되어 이리저리 팔려 다닙니다.


연속적이고 만듦새 있는 철학이 우리에게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곳을 긍정하지도, 내가 살아온 역사를 자랑스러워하지도, 나의 삶을 사랑하지도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근본을 둔 곳이 부재한 까닭이 아닌지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고민하고 생명의 공생과 번영을 지향할 세계관이 절박합니다. 이 땅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전 지구적인 문제를 마주할 철학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을 톺아보면서 달음질친 건 반성하고 아름다운 건 계승해봅시다. 이 땅에서 살아가고 이어간 사람들의 삶에서, 지금까지 외면당하고 소외되었고 잊혀갔던 역사 속에서 무엇을 길어낼지는 다시 봐야 알 일이지요.


우리가 배워왔던 주류의 위치를 점했던 논리들과, 우리가 동경했던 나라들의 몰락과 실패를 보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한국 사회는 그 밑바닥을 드러냄과 동시에 저력과 가능성을 보였다 생각합니다. 민속악 하는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박정희가 새마을 운동 내걸고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가 넘실거릴 때 북 치는 장인은 자기 손으로 북을 찢었다 합니다. 내가 인정하지 않았고 버린 나, 그 분열된 자기의 틈새로 자리한 왜곡된 열등감은 우리를 어디까지 망가지게 했나요. 이제는 그 찢어진 북을 꿰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매일 요가와 명상을 하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머리서기를 좋아합니다. 잘 쉬는 법을 터득해가고 있습니다. 온전히 하루를 보내는 것도 배워야 하는 거더군요. 저도 사람들이 더 절박하게 자신과 지구와 서로를 돌보았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잔인하지마는 사월이길 바라봅니다.

시를 받았으니 답시를 건넵니다.


해는 우리를 향하여

허수경


까마귀 걸어간다

노을녘

해를 향하여


우리도 걸어간다

노을녘

까마귀를 따라


결국 우리는 해를 향하여,

해 질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해 뜰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갔던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나이 어려 죽은

손발 없는 속수무책의 신들이 지키는 담장 아래 살았던 아이들


단 한 번도 죄지을 기회를 갖지 않았던

아이들의 염소처럼 그렇게


폭탄을 가득 실은 비행기가 날아가던

해 뜰 무렵


아이와 엉겨 있던 염소가

툭 툭 자리를 털면서

배고파, 배고파, 할 때


눈 부비며 염소를 안던

아이가 염소에게 주던 마른 풀처럼

마른 풀에 맺힌 첫날 같은 햇빛처럼



주 : 해질녘에 대해서는 허수경의 언어를, 희망에 대해서는 일리치의 시선을, “우리는 올해도 죽지 않고 살아갈거야”는 계피의 노랫말을, 앎과 앓음에 대해서는 함석헌의 문장을 빌렸습니다. 제가 길을 잃었을 때 찾아가는 책은 철학자 김상봉의 ‘서로주체성의 이념’입니다.


* 인스타그램 '일간 에헤이'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하자책방X공기네트워크 콜라보 <코로나 교환일기>에 올라간 글입니다.

*** 4월 14일 해질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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