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임 서른

인천국제공항 가는 길

by 노마 장윤석

인국공(인천국제공항) 가는 길


어제밤 청년기후긴급행동 회의 중에 긴급행동 제안이 나왔다. 곧 WTO 유명희 사무총장 후보(유력한 후보다..)가 유세를 마치고 프랑스에서 귀국한다는 것, 아무도 기후위기의 주범으로 기업과 국제경제기구를 (말만하고) 건드리지 않고 있으니 대처가 필요하다는 것. 마침 12일, 기후위기 집중행동 날, 갑자기 더 긴급한 일정이 생겨버린 탓에 새벽까지 회의하다가 비상행동을 째고 단촐하게 긴급행동 멤버 세 명이 공항철도를 탄다. 곧 유명희 후보 앞에서 피켓을 들고 질문들을 던지려 한다. 보내야하는 글과 강의영상을 제쳐두고 간밤에 WTO의 맥락과 유명희 후보의 유세영상, 공약을 봤다. 재계(경총)와 정부(외교부, 산자부, 청와대) 가릴 것 없이 한마음 한 뜻 모아 유 후보를 끌어주고 밀어주고 있다. 도대체 왜? 무엇을 바라고? "한국이 누린 경제발전의 기회를 다른 회원국에도 누리게 하겠다"는 유명희 씨 말에 이유가 깃들어있다. 한국의 '한강의 기적' 경제개발모델을 내세우겠다는 것, 2030년에 인천국제공항이 물에 잠긴다는데 이게 가능한 말인가..? 코로나로 인한 불황을 이렇게 경제'선도'의 기회로 잡겠다는 것인가. 할 말이 많은데 도착했다. 상세한 이야기와 맥락은 글로 돌아오겠다..


몇 가지, 저편의 일


세계가 코로나로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모두가 이 감염병에 시야가 쏠려 있을 때, 시야를 벗어난 움직임이 있었다. 2020년 5월 7일 LG화학의 인도 비카스파트남 공장에서 가스가 누출되어 35만 명의 주민이 새벽에 대피했고, 수백 명의 사상자(사망 12명)를 냈다. LG화학 산하의 공장에서 유독가스가 누출되어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35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갔다. 2020년 6월 25일 뉴스타파와 알 자지라(Al Jazeera)가 함께한 게코 프로젝트(The Gecko Project)에서 (이 폭로는 코린도가 2,200만 달러(한화 240억)을 부패한 관리에게 수수해 서울의 두 배 크기 토지 개발권을 따냈다는 내용으로 인도네시아 경찰이 2019년 4월 인터폴 회의에서 처음 의혹을 제기했다.) 포스코 인터네셔널에 대한 관련 비판은 사그라들었지만, 현지 사태는 진행중이다. 2020년 6월 30일에는 한국전력 이사회에서 해외 석탄화력발전소 투자가 승인되었다. “환경단체와 글로벌 금융기관이 석탄 화력 발전 투자에 대해 경고하고 나서면서 남아공에 이어 인도네시아 사업 또한 좌초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일었으나 한전은 고심 끝에 진행키로 했다.” 삼성물산은 삼척발전소 건설에 매진 중이다. 삼성은 베트남 공장, 인도네시아 파푸아, 해외석탄에 모두 발을 걸치고 있다. 정부는 두산중공업을 살리겠다고 지원금을 쏟아붓더니 이제는 해외석탄수주를 따주고 있다. 아시아에서 빚어지는 이 참사를 위해 문재인 정부는 신남방정책을 폈는가?

한편으로 WTO 사무총장 선거가 곧 오는 11월이다. 산업자원부 에서 국장을 맡고 있는 유명희 후보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워싱턴 컨센서스의 중추 역할을 해왔고 한-미 FTA등 자유화의 흐름에 앞잡이 역할을 했던 WTO에서 왜 한국을 선택하려 하는가. 그 이유는 유명희 후보의 공약에 숨어있다.

이미 코로나로 세계는 불황에 휩싸였다. 자본은 반성을 하지 않는다. 오래전에 예견했듯 불황은 자본주의의 작동을 위협한다. 1930년대 자본과 노동의 싸움 끝에 있었던 루즈벨트의 ‘뉴딜’개혁은 오랫동안 전후의 세계를 수정자본주의라 일컬어지는 사회민주주의의 흐름으로 데려간 바 있다. 하지만 역의 케이스도 존재한다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기름과 기후에도 원인이 있다, 출처요망)로 이어진 경제-금융위기는 학계의 담론에 전환기를 가져왔으나 실질 경제 체제의 개혁을 가져오진 못했다. 월가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월가다. 나오미 클라인이 쇼크독트린이라 썼듯 재난은 자본주의 정치세력에게 기회이다. 이 때를 빌어 그간 노동계, 시민사회계에 막혀왔던 사회보호의 벽을 훅 넘어버리는 것이다.

한국판 뉴딜에도 재계의 숙원이었던 사업(삼성 비대면 진료, 데이터 보안 해제, 데이터 3법)들이 폭 담겨 있다. 이미 정부는 한국판 뉴딜 발표회 자리에서 OECD국가 중 GDP 감소 비중이 –2.4%(확인요량)밖에 안 된다며 좋아했다. 더해서 한국을 (경제성장)을 선도하는 국가가 되겠다면, EU의 내심찬 꿍꿍이 바람을 늦어도 한참 뒤에나 눈치채고서 전면에 속내를 내보이는 꼴이란, 기후위기로 지금까지 전례 없었던 국제정치협력이 긴요해지는 이 때에 녹색성장경쟁에 불을 붙이겠다니 꼴불견이다. 탄소배출 감축 경쟁도 아니다. 이미 정부의 한국판뉴딜이 감축할 것으로 예상되는 탄소배출량은 새로 신설하는 국내 석탄발전소 7기를 몇 년간 돌리면,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 새로 짓는 석탄발전소를 몇 년 간 돌리면 도로묵 되는 개미만한 양이다. 정부가 2050년 넷제로(Net-zero), 2030년 절반감축이라는 그린뉴딜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도 내걸지 않은데는 다 이유가 있다.

결국 또다시 성장의 망령이다.

WTO에 유명희 후보가 유력하게 거론되는 것에 이 맥락을 유념해야지 싶다. 한국의 개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한국의 성장 시나리오, 그리고 이번의 방역선방(물론 지금은 그 허구성이 낱낱이 드러났지만)이 각국으로 하여금 유혹을 주고 있는 게 아닐까.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며 한국의 경제개발 모델을 찬양할 때부터 이미 글러먹었다. 한국의 경제성장 성과가 눈부신가? 그렇다면 한 해 이 만명이 자살하고 인구대비 탄소배출량, 기후악당, 극심한 지역불평등, 정치적 경제적 양극화, PIR까지 같이 데려가라. GDP만 탐내지 말고. 가뜩이나 신자유주의 자유화 속 수출의존형으로 재편된 개발도상국들은 한국의 ‘기적’이 부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한국 개발 모델을 적용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개발상, 아니, 애초에 개발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닥친 이 미중유의 위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기후변화 협약이 늘 WTO 자유무역 협약과 공존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교토, 파리를 거친 기후협약, 모순되게도 자유무역 협상과 동시에 공속해왔다.

이런 모순을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정부의 그린뉴딜이 녹색전환의 가치를 담지도, 탄소배출을 실질적으로 이뤄내지도 못하는 것. 코로나가 완화기에 들어가며 다시 각종 처리량(배출량) 수치는 증폭되고 있는데, 어쩔까.

아 지금의 기후리스크 상태는 위협 수준이 아니다. 지구 한계의 결과는 업데이트되는 대로 우리게 남은 시간을 삭감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한국식 개발모델인가? 수출로 인한 경제성장인가?

(제 3세계라 써야하나 남반구라 써야하나, 개발도상국이라는 용어는 개발 경제학의 맥 같은데)


ㅇ.

앓는 소리 좀 없이 잘 해가려 했는데 내 생각이 미처 짧았다.

우울은 한 가지 모습으로 옆에 있지 않다. 조급함, 혹은 그로 인한 자기 강박. 그리고 스스로를 포함한 사람과 맺고 있는 연들을 살뜰히 살피지 못하는 것 모두.

버리지 못해 들고온, 이제는 나에게 너무 크기만 한 내 집 중고 감성 냉장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오래 전 앞집 할머니가 준 고추장, 생명수 같은 기네스 몇 캔 정도.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내가 당신을 위해 요리할 때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보았을 것이다. 나는 이사온 한 달 동안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졌던 적이 없다. 하물며 나를 위해서도. 비좁은 부엌 닦지 못한 서랍장 안에는 홀로 쓰기에는 너무도 많은 프라이팬, 냄비, 접시들이 있다.대강 포장된 종이 박스 안에.

마지막 요가가 언제였더라. 아침에 일어나면 요가매트 위에 앉고 산책다녀오는 게 내 일과였는데, 빛이 들어오지 않는 이 집에서는 새벽이나 아침이나 방의 절반을 차지하는 책상 앞에 앉게 된다. 삶에서 가장 할 일이 많은 시기, 몸담은 단위가 여덟 개, 세미나만 다섯 개라 이제는 To-do list 앞에 abc 라벨을 붙이기 시작했다. 친구 생일 챙기기, 오래간만에 연락 하기 같은 to-do는 며칠 눈에 밟히다 못내 지운다. 하루 온 종일을 풀 집중할 수 있다는 단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전제 아래 세운 계획과 할 일들은 나에게 쉬는 시간과 일의 구분을 지웠다. 누군가 취미가 뭐냐고 물었는데 뜸들이다 결국 대답을 못했다.

이유진 선생님의 삶을 난 존경했다. 그래, 지금 선생님 같이 이 필드에서 잡아줄 사람이 필요해. 마음의 요동에 흔들리는 게 아니라 할 일을 하고 계속 중심을 잡아가고 그런 사람이 필요해. 선생님께 행복하시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종종 있었다. 나는 지금 이 땅에 그보다 중요한 인물이 어디 있을까 싶다.

짧은 강의안을 만들게 됐다. 그린뉴딜, 탈성장, 순환경제를 생태적 지혜연구소 이름으로 10분씩. 하라면 할 수는 있는데 준비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보니까 내가 아직 어리더라. 어? 선생님, 저 아직 학부생인데요. 학생인데요. 나를 높이 사 주신 신승철 선생님께는 늘 감사하고, 나는 이 인정을 누구보다 바랬으나, 조금의 서러움도 있다. 배워야 할 시기에, 계속 말들을 하고 행동을 만들어가고, 심지어 이제는 강의도 하게 되네.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기고만장해지고 무심해지고 자아의 편린 속에 매몰되는 기분을 느낄 때마다 뭔가 아차 싶다. 나중에는 후회하기도 할 거다. 경제성장을 비판하는 성장주의자. 느림을 지향하는 쾌속주의자. 섬세함을 제일의 가치로 두는 혁명가 혹은 투쟁가.

나는 모순을 발견해도 쓰러지고 싶지 않다. 풀리지 않는 질문에 마주해 난처하고 참담해질지라도 잘 들고 계속 가고 싶다. 그건 벽이 아니라 고심해서 길을 걷게 하는 화두일 뿐이니까. 라고 말하니까.

이런 나에게 내 애정하는 친구 몇이 무어라 말을 건넬지 안다. 다희는 윤석 좀 줄여봐. 너가 먼저야. 하고 말할 것 같고, 하연은 윤석 균형을 좀 잡아야 할 듯 싶어요 하고 말할 텐데.

요새 심정은 “저 쪽 나라들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알아요?”하고 누구든 붙잡고 말하고 싶다. 이 이야기들을 듣고 난 뒤에도 이전과 같은 사람일 수 있어요? 혹은 그 익숙하고 소중하다는 소확행들을 계속 가져갈 수 있나요.

험난한 시국은 늘 있어왔다. 섣부른 비교로 나의 아픔과 내 시대의 고통을 가장 무거운 것으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미래가 없다는 마음으로 살아갔던 이가 누가 있을까. 일리치 말고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ㅅ.

어제 환경사회연구원 세미나에서의 말들이 오래 남는다. 마사 누스바움의 ‘정치적 감정’을 읽고 이야기 하는 자리, 나를 못 참게 만들었던 한 문장은 이랬다. “누스바움이 워싱턴의 베트남 전 기념 조각상 앞에서 시민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몇 장을 이야기할 때, 그 전쟁에서 수도 없이 목숨을 잃었을 사람들에 대해서 한 줄도 쓰지 않았다는 점이 화가 납니다. 이 긴 책에서.”

요새 힙하다는 페미니스트 이론가나 몇 철학자들에게서 나는 거리감을 느낀다. 못 알아듣는 말이 더 많지만, 묻고 싶다. “당신의 글과 말들은 어느 땅의 역사와 사람들에게 뿌리를 두고 있나요.” 누구의 피와 눈물을 머금고 자라났나요. 나치의 학살은 유대인 이야기이기에 그리 전 세계의 도덕적 귀감이 되었고, 그 급으로 매일 벌어지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학살은 누구도 아는 이 없이 살아간다는 이야기.

나는 집중된 기후위기의 위험이 가져오는 가해를 ‘죄’로 물을 것이고, 이 가해의 주체인 북반구 국가와 초국적 기업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처벌적 정의를 확립할 것이고,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회복적 정의로 생태 정의를 말하려한다. (자연, 사회)과학이 옳고 그름을 제시할 수 있는가? 나는 꽤 오래간 어려워했다. 지금은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내가 하는 것은 사회-생태경제학이고, 장막들을 벗겨내고 사회와 지구를 직시할 때 정의의 길은 존재한다. 고민이 더 필요한 문장이다.


ㄹ.

핵? 풍력? 요새의 논쟁에 부쳐. 왜 근본적인 길은 아예 선택지에서 빼놓는가. 아예 안 될 길이면 생각도 안 하겠다고? ‘실현 가능성’을 최우선으로 놓고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때로는 말을 잘 못 잇는다. 모르겠다. 숙이고 들어가야 하나 꼭. 그리고 섣부른 결론을 내야 하나. 최선이 타락하면 최악이 된다. 나는 이 문장을 새기고 가는데, 유진샘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다.

어제 생태적지혜연구소에서 한 ‘탈성장개념어사전’ 콜로키움, 나는 탈성장에 회의적인 사람들에게 이 단어가 얼마나 귀중하고 지켜져야만 하는지를 성토했다. 아시아의 개발 상황과 지구의 한계를 생각할 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그린뉴딜을 철저히 탈성장 사회로 가는 전환에서만 허용한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무조건 탈성장이다. 그린뉴딜은 도구다. 철저하게. 급격한 전환 프로토콜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린뉴딜을 채택하는 것, 즉 브레이크가 아니라 유턴이 필요하다는 것. 하지만 그 끝이 녹색성장(굉장히 가능성 높게도), 녹색분칠로 범벅된 자본주의라면 나는 그린뉴딜을 디지게 뚜드려 팰 것이다. 지금도 그러고 있지마는. 적어도 2019년이 돼서 그린뉴딜이 떠오른 맥락, 청소년, 청년들의 기후운동에 이어지는 맥으로서 이 단어는 버릴 수 없다. 목욕물이 더럽다고 아이까지 버릴 수는 없으니까.


ㅁ.

풀리지 않는 물음들이 몇 더 있다. 아시아의 개발도상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에 경제 개발(Economic development)는 필수적인가? 삼성이 핸드폰 1위를, LG가 가전 1위를, 현대가 자동차 수입 1위를 한 까닭은 뭘까?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서구에 당해왔고 이에 한맺혀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가해에는 무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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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을 쓰면 아무도 안 읽는다. 나도 잘 안 읽는다. 그래 아무도 안 읽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내일도 웃으면서 미래를, 지금을 만들어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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