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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Oct 25. 2020

10.17, LEDs, 균열내기

2020.10.17~10.24

1.          


일주일이 지났다. 추스르는 데 온통 시간을 보내 이제야 뒷이야기를 적는다. 낯설었다. 날이 잔뜩 선 날이었다. 나중에서야 군데군데 생채기를 발견했다. 손소독제를 바르면 쓰렸다. 그러므로 그때 있었던 몸짓과 외침은 꿈이 아니다. 이미 지나온 지금, 우리에게는 해석만 남았다. 하나의 해석만이 힘을 얻는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손만을 들어주고 만다. 말하지 않으면 잊혀진다. 이렇게 쓰는 것은 이에 균열을 내고 싶어서. 아무도 우리가 한 일을, 그날 있었던 일을 몰라주면 서러워서. 사라진 시간을 복원하고, 잃어버린 정당성을 발굴하려 한다.     


           

2.          


10월 17일 ‘2050 장기 저탄소 발전전략(LEDS) 수립을 위한 국민토론회’가 있었다. LEDS(Long-term low greenhouse gas Emission Development Strategies)는 ‘장기저탄소발전전략’으로, 파리협정에 따라 세계 모든 당사국이 올해까지 유엔에 제출해야 하는 온실가스 감축목표다. 토론회의 주제로는 “탄소중립 지향을 위한 2050 LEDS 도전과 과제”가 내걸렸고, 목적은 “205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 등 미래 사회상에 대한 일반국민의 폭넓은 의견수렴을 통해 장기저탄소발전전략(LEDS) 정부 보고서 작성 시 활용”이라 쓰여있다. 주최는 ‘2050 LEDS 수립 범정부 협의체’, 주관은 환경부다. 참가대상은 ‘산업계, 시민사회 등 이해관계자 및 국민’으로, 온라인으로 300여 명을 모집해 지난 토요일 줌과 유튜브로 다섯 시간 동안 진행했다.   

       

한전이 베트남 붕앙-2 석탄발전을 통과시킨 날, 국민 토론자가 되어달라는 전화가 왔다. 한국리서치에서 걸려온, 20대 청년분과 국민으로 참석해달라는, 그래서 그 국민 토론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사례비 10만 원, 전기값으로 3만 원 문화상품권을 주겠단다. 붕앙-2 결정에서 아무런 힘을 쓰지도 말하지도 못했으면서 이런데 쓸 예산은 남아도나 싶어 화가 났다. 붕앙-2 석탄발전소가 홀로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전 탄소 주기에서 2억 톤이다. 한국판 그린뉴딜이 5년 동안 줄인다는 온실가스 양이 1200만 톤이니, 얼핏 15배, 동년 비교로도 3배다. 한국전력과 공적금융기관들, 삼성 두산 포스코 등을 위시한 대기업들이 한데 뭉친 ‘팀 코리아’가 이 나라 바깥에서 이미 지었고 짓고 지을 석탄발전소가 몇십 개인데, 팜유 플랜테이션 같은 농업수출기지는 또 얼마나 많은데, 우리의 구린뉴딜은 뭘 하겠다는 건가.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나라 안에서나 밖에서나 이모저모 답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어설픈 목표가 구차해지는 순간이다.          


LEDS는 거진 일 년도 넘게 토론을 거쳐왔다. 우리 청년긴급기후행동은 처음에 LEDS 포럼(2050저탄소 사회 비전 포럼)에서 있었던 청년 분과 위원들의 서러움과 분노가 담긴 말들에서 시작된 바 있다. ‘청년’ 팔이가 그곳에서도 있었고, 포럼에 구성된 청년 분과 위원들은 들러리 취급을 받았다고 들었다. 어딜 전문가들 말씀하시는데, 그런 거 말이다. 그렇게 나온 포럼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검토 결과, 넷 제로(탄소중립)를 달성하려면 포럼의 최대 감축안인 1안(2017년 대비 75% 감축) 보다 더 획기적인 감축수단 도입과 정책·기술·행태 변화 등의 제반 조건 검토가 필요하다.” 즉, 2050 탄소중립 목표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소리다. 해선 안 되는 것들은 온갖 구실로 밀어붙여온 이들이 -4대강과 핵발전과 석탄발전을 떠올렸다- 해야만 하는 것에는 참 말을 쉽게 뱉는다. 넷 제로를 외쳤던 건 참석한 청년 몇 명, 응원하는 다른 분 몇 분 정도였다고 들었다.           


분과별 토론이니 전문가 토론 국민토론이니, 숙의니 합의니 듣다 보면 다 사기극 같다. 주어지는 발언권은 쥐꼬리만큼이거나 없다. 초대받지도, 말할 기회도 없는 우리의 목소리를 그곳에 가져다 놓기 위해서는 들어가야 했고 마이크를 뺐어야 했다. 저번 전문가 토론회의 마지막 시간, 우리는 달려가 단상 위에 올랐다. 마이크를 들고 올라온 경위와 우리의 입장과 요구를 알리고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토론회가 끝날 때까지 전문가들 탁상 아래 자리를 지켰다. 그때 좌장이었던 서울대 법대 조홍식 교수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사전에 약속된 토론 중간에 끼어드는 게 정의인지 생각해보라고. “정의로움을 외치려면 과정도 정의로워야 하지 않겠냐고.” 테이블 아래 쭈그리고 앉아서 그 말을 들으니 그 위치의 차이가 확 느껴졌다. 거리다. 아, 저 사람에게는 합의된 제도와 형식적인 절차들이 지켜지는 게 정의구나. 그 합리적인 제도와 절차 끝에 온 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다. 그 존재 기반을 스스로 붕괴시키고 있는 이 사회 말이다. 모든 것이 다 정의로웠는데 왜 우리에게는 마이크가 주어지지도, 의견과 입장을 관철시킬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을까. 설령 있더라도 신랑 신부 손 잡아주는 들러리처럼 “우리 “청년” 누구 이야기 좀 듣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아니었나.           


그래서, 기후위기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좀 괜찮았더라면 이럴 것 까지는 없었겠다는 생각을 한다. 붕괴 혹은 멸종이라는 서슬 어린 합리적 경고 앞에서 우리의 말과 목소리는 하나의 의견, 혹은 소견으로 취급될 수 없다. 정직했으면 한다.      


               

3.          


이번 LEDS 국민토론회 전에 2050 탄소중립 ‘목표’는 정부 주무부처 사이에서 금기어로 쉬쉬 된다는 별의 말을 들었다. 산업부, 기재부가 아직 동의할 수 없기에 ‘탄소중립’ ‘넷 제로’ 말을 쉬이 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별은, 그 토론회에서 유일하게 초대받은 청년 발표자로 발표자 사전모임에 다녀온 후 뭐라도 해야 한다고, 이거 엎어야 한다고 분노를 감추지 못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전했다. 그래서 다시 피켓을 만들었다. 전전날 밤 10시에 화상회의를 했고, 전날 아침 7시 반 조찬모임에서 배경과 계획을 서둘러 논했다. 긴급행동은 긴급하게 이루어졌다.           


당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빌딩 아래서 피켓과 현수막, 구호와 노래를 만들었다. 들고 올랐다. 관계자들이 나와 미리 얘기를 하고 왔느냐며, 안 그러면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는 들어가려고 했고 그들은 우리를 막았다. 안에 있던 환경부 직원이고 한국리서치 직원이고 모두 나와서 밀어내면서 토론장 문을 막았다. 우리는 들어가려고 문을 잡았고 들어가려고 비집었고, 순식간에 숨 막히는 상황으로 흘러갔다. 드잡이하는 첨예한 갈등의 상황, 몇 장면이 오래 잔상에 남았다.      


“막어 막어 막어”하고 소리 지르는 이. “다쳐! 들어오면 다친다고”하면서 힘으로 밀어붙이던 이. “전문가 발표들이 제대로 나가야 하잖아요.”하면서 문을 닫는 환경부 직원. 장정 세 명이 문을 잡고 이영차 이영차 하면서 문을 끌어당기는 장면. 경찰에게 “재는 우리 아니에요. 쟤 아니라고요” 하던 갖은 욕을 웅얼거리던 한국리서치 직원.           


그리고, “뛰어”하며 한가운데로 파고드는 청. 팔이 꺾인 듯 비명 지르던 희. 문 앞에 주저앉아 문과 몸을 옴짝달싹 엮어맨 안. “지금 당장 탄소 배출 제로해도 2도 넘길 판에 뭐 하자는 겁니까.”하고 외치던 다. “왜 막냐고요. 국민 토론회라면서. 저희 링크받았고 국민 참여자고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온 거예요.”하며 외치던 빈. 그리고 말들. “이게 이렇게까지 막을 일입니까” “나오세요. 왜 막으셨는지 말씀해보세요” “저는 선생님들께서 왜 이렇게까지 막으셨는지 의문스러워요..” “국민참여 토론회 10만 원 주고 일방 송출하는 게 말이 돼요! 이게 무슨 토론이에요.” “우리에게도 마이크를 주십시오” “기후위기 대응할 준비 되어있습니까 당신들.” “당신들이 철거 용역이야..”          


들어갈 수 없었고 꽹과리는 부러졌고 확성기는 뺏겼다. 누구 먼저랄 것도 없이 누군가 구호를 시작하자 목소리들은 이어졌다. “LEDS 상향하라!” “NDC 상향하라!” “넷 제로 제출하라!” “졸속 토론회 중단하라!” 우리는 같이 외쳤고 이게 구호인지 절규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한동안 그 말들이 오래 맺혀있었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비명소리를 들으면, 그제서야 내가 있는 현실이 자각이 된다. 온몸을 두르고 있던 안정감과 안온함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있는 그대로 적확히 느껴진다.  아, 우리 절박한 싸움 하고 있구나. 눈에 잘 보이지 않더라도, 시간과 공간의 거리로 직접적이지 않아 보이더라도 생존을 위했던 이전의 절박하기 그지없었던 운동들과 다를 바 없구나 싶었다. 용산, 궁중족발, 노량진, 청계천, 쌍용자동차, 삼성, 세월호, 소성리, 밀양 등. 그 자리에서 있었던 고성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몸과 목소리 뿐이니까.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입을 막는 이들과 싸워야 했다. 기후라고 다를까. 오히려 얼핏 녹색으로 덧칠되고 보이기에 공정한 절차 탓에 혼란스럽기도 하다. 환경부가 특히 그렇다.             


대치가 이어지자 경찰이 왔다. 조금 나중에는 국장(기후변화 정책관)이 왔다. 국장은 조용히 경청하고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마지막에 토론이 끝난 후 대표 한 명이 질문할 기회와 피켓 시위할 시간을 주겠다고 말했다. 몇 차례의 협의 후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손짓하며 들여보내 주세요 했고 문은 바로 열렸다. 방금까지 몸을 맞부딪히던 이들이 옆으로 비켜서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환경부 관계자는 우리에게 미리 말 좀 하고 오라 했다. 연락처 다 공개되어 있으니까 연락하라고, 이렇게 갑자기 소동을 부리면 어쩌냐고 했다. 우리 모두 얼어붙었다. 균열은 불가피한가?           


한동안 우리가 왜 왔는지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국민’들이 토론하고 있는데, 오래도록 준비한 ‘전문가’들이 말씀하고 계시는데 ‘불법적으로’ ‘난입’해서 이 숙의의 토론을 ‘무단으로’ ‘방해하면’ 되겠냐는 말을 반복해서 들었다. 국민들 300명이 (너희들 때문에) 기다리고 있다고 계속 들었다. 국장은 “소란을 피우는 방식이 아니라 의견을 개진하는 방식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졸지에 정당한 절차를 걸쳐 의견을 개진하지 않고 소란 피우는 이들이 된 우리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정녕 그것이 맞을까? 빈은 이렇게 말했다. “별로 유의미한 고려대상이 될 리가 없잖아요 저희가.” 묻게 된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200명의 국민들은 전문가들의 목소리와 우리의 구호 중에 무엇이 가치 있다고 생각할까.     

      

우리는 왜 막았냐고 묻고, 토론회 중단하러 왔다고 말하긴 했으나 혼란스러워했던 것 같다. 명분과 이유와 언어를 그 자리에서는 잃어버렸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저 폭도들 어떻게 해봐’하는 시선이 감도는 분위기였고 소동을 일으킨 폭도로 상황상 정의되었을 때 정당성은 사라진다. 이 마찰을 일어난 것은, 우리 때문인가. 정말 우리 때문인가. 우리는 국민들의 시간을 빼앗은 걸까.           


우리가 한 행동의 정당성이 그 혼란스러운 상황을 거치며 사라진 듯 보였고, 잃어버린 의미를 찾기 위해 정말 애썼다. 우리는 나중에 마음 나누기 시간에서야 진정되고 우리가 했던 오늘의 일들이 왜 필요했는지 어떤 의미였는지 말할 수 있었다. 의미화의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일종의 인정투쟁이 필요한 것이고, 지금 이 지난 이야기를 애써 적어내는 까닭도 그렇다.          


그 시간 유튜브로 중계되던 화면은 어땠을까. 사이렌 소리, 꽹과리 소리, 비명 소리, 구호 소리가 마이크 뒤편으로 들렸으나 발제자는 주위를 힐긋 몇 번 보고는 발표를 마쳤다. 사회자도 잠시 쉬는 시간을 갖겠다고 얼버무리며 마쳤다. 화면에는 번지르한 광고 영상이 나왔고, 곧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토론회는 다시 재개됐다. 그 ‘소동’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그 시간은 지워진 것 같다. 환경부와 진행을 맡은 한국 리서치에게 이 ‘비정상’적인 소동은 없어야 할 것이었으니까. LEDS 상향과 일방적인 토론회 중단을 요구하려 청년들과 기후 활동가들이 왔고, 상황이 어떻게 중재 혹은 무마되었으며, 마지막에 발언과 피켓시위의 시간을 주기로 협의되었다는 말, 사회자는 하지 않았다. 마지막 우리의 발언 시간에, 사회자는 “청중에서 질문이 있습니다”하고 마이크를 넘겼다. 그리고는 아무도 ‘그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토론회 중간에 흔적만 찾아볼 수 있는 그 시간을 복원하기로 한다.     

      

그 시각, 우리에게 주어진 그 마지막 5분을 위해서 바로 열몇 명이 공유문서에서 발언문을 쓰기 시작했다. 토론회를 지켜보고 있던 활동가들, 익명의 코끼리, 익명의 아르마딜로가 문장을 제안하고 개요를 짜고 수정했다. 우리가 온 이유를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국민토론회인지, 전문가 발표회인지 모르겠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다섯 시간 동안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인강’에 참석한 국민 토론자들이 남긴 말이기도 하다. 토론회에 참석한 국민 참여자들이 “국민토론회라 해서 왔는데 말 한마디 할 기회 없이 모니터 앞에 계속 앉아있어야 하나”하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 과정을 숙의라 이를 수 있을까. 온라인 숙의 시스템이라고 보낸 링크에 적은 질문은 선별해서 답했을 뿐이고, 토론은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시민의회를 구성해 몇 달간 치열하게 토론했고 그 결과가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된다고 들었다.     

      

별의 마지막 발언이 국민 참여자들에게 그나마 위안과 주었던 것 같다. 댓글창에 화색이 돌며 사이다 칭찬이 곳곳에서 끊이질 않았다. 그의 말들을 옮겨본다. 주어진 5분이라는 시간 동안 무엇을 말해야 하나 몇 번이고 글을 엎어가며 고민한 별의 말들은 힘이 있었다. “제가 정말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현재의 시스템과 현재의 지식에 기반한 전문가들이 2050년의 목표를 세울 순 없다는 것입니다. 지식 자체가 목표를 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30년간 우리는 상상을 초월할 변화를 겪을 것입니다. 변화는 국민의 의사가 정부에 요구하는 것이고 국민과 그 사회가 정하는 것입니다. (...) 2050 탄소중립을 선언한 나라들에서 그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모든 산업논리와 이해관계와 가치를 뛰어넘는 생명이라는 가치에 사회가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 변화는 주권자인 국민의 필요와 의지에 따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2050년의 목표를 지금 정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탄소중립이라는,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시도가 정말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쉬이 답하기 어렵다. 다만 이 최소한의 목표는 협의의 대상이 아니다. 이 토론회는 우리가 어떤 목표를 내걸지 누군 이렇고 저기는 저렇고 주장하는 자리가 아니라, 이 엄격한 한계선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어떻게 해야 가능할지 방안을 모으는 자리어야 한다. 별의 말처럼, 이 토론회는 지금까지 이 사회의 기틀을 닦아온 전문가들과 그들의 논리가 목표를 정하는 자리여서는 안 된다. 이 변화는 온 땅에 살아가는,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있어야만 하는 전환이고, 가장 바탕에 있는 생명이라는 가치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그래서 2050년 탄소중립은 흥정의 대상일 수 없다.       


필요할 때는 국민을 찾고 모든 것은 국민의 명분으로 진행되었지만 그 자리에서 국민 참여자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은 없었다. 바야흐로 전문가 사회다. 사태에 대한 판단과 목표에 대한 논쟁, 시국에 대한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모든 발언권은 전문가들에게 있었고, 국민에게 주어진 자율성은 그 공간에서 명분만 남은 체 소거되었다. 별의 말은 전문가와 국민의 전도된 관계를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놓았다. “변화는 주권자인 국민의 필요와 의지에 따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국민이 정부에 요구하고, 정부는 국책기관에 연구를 맡기고, 전문가 분들께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서 어떻게 나아가면 되는지, 무엇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분들입니다.” 나는 그 공간에 참여한 많은 이들이 국민의 이름으로 눈 가리고 귀 닫는 이 전문가 토론회의 균열을 원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시도가 균열을 냈을지는 계속 가 봐야 알 일이다. 참여한 국민들에게 어떤 파동이 가닿았을지는 알지 못한다. 빈은 낮은 목소리로 또렷하게 우리가 새긴 요구를 전했다. “더 크게, 더 오래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를 목도할 당사자들로서 세 가지를 요구하겠습니다. 하나, 돌이킬 수 없는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로부터 현재 세대와 미래세대를 보호하기 위해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선언하십시오. 둘, UN 제출 월인 12월 전까지 NDCs(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s, 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계획)를 IPCC 권고안에 의거하여 2010년 대비 18% 수준 감축에서 45% 감축으로 상향하십시오. 셋째, 정부는 2020년 NDCs 상향을 시작으로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매 5년마다 상향된 NDCs를 설정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고 이를 위해 중·장기 이행방안을 법제화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하십시오.”          


기후변화 정책관의 답은 이랬다. “환경부와 정부는 기후위기 대응을 절박하게 심각성을 가지고 특별한 대응을 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현시점에서 2050년을 평가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앞으로 30년 후의 일을 지금 현재의 기술과 현재의 비용과 현재의 지식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안 맞다, 그런 차원에서 환경부는 2050년 탄소중립 사회를 지향하는 것으로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을 할 것이고, 정부 간에도 많은 협의에 진전이 있다 말씀을 드립니다. (...) NDC상향 부분은 저희가 일정 정도의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한 번도 저희가 온실가스 감축을 해보지 못해서 2020년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은 상황입니다. 작년에서야 2030년 목표를 법제화했고, 법제화라는 것은 의무감을 가지겠다는 뜻입니다. 환경부로서는 NDC상향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을 하지만, 그 연장선상에서 올해, 내년 열심히 감축활동을 한 이후에, 내후년부터는 NDC상향할 수 있도록 관계부처 전문가 회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약하자면 환경부는 기후위기 대응의 심각성과 절박함을 인지하고 있지만, 앞으로 30년 후의 일을 지금 판단할 순 없어 2050년 탄소중립 사회를 ‘지향’을 목표할 것이고, NDC 상향은 법제화로 책임이 따르고 아직 한 번도 온실가스 감축 경험이 없기에 어렵고 내후년에 생각해 보겠다는 것이다. 심각하고 절박한데 그럴 수 없고 어렵단다. 후일담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국장은 NDC를 상향해달라고 말하는 우리에게 “이해를 해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4.          


우리에게는 많은 질문이 남았다. 균열은 불가피한가? 우리의 운동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나. 그보다 어떻게 사람답게 운동할 수 있을까.           


혼란스러운 때다. 환경부와 정부가 “기후위기의 심각함을 알고 우리는 최선을 다해 무언가 하고 있”단다. 이런 명분이 이번 정부 여기저기에 깃들어 힘을 발휘한다. 대통령이던 총리던 산자부 장관이던 한전 위원장이던 모두 기후위기 심각한 거 알고 대응해야 한다고 한다. 저 말들, 절실하고, 여러분 맘 다 알고, 우리 같은 편이고 하는 말들을 어떻게 할까. 모두가 기후위기 심각한 거 알고 모두가 뭔가 하고 있다는데 탄소는 정직하게도 우리가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는 진실을 알린다.      

     

대화하고 토론하자는 말들이 오히려 입을 막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말로 해서 되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싶다. 화자가 있어도 청자가 없으면 공허하다. 말을 들리게 하기 위해서 화자는 청자의 귀에 다가가야 한다. 부조리함과 부정의를 뒤집기 위해서는, 혹은 극명한 온도차와 입장차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균열 내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운동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은 우리의 마음을 휘감고 있는 화두다. 어떻게 하면 말하고 외치는 우리가 소모되고 갈려나가지 않고, 그리고 각각의 상황과 위치에 놓여져 있는 그들, 비록 내 앞으로 가로막고 있더라도 그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변화를 일구어갈 수 있을까. 혹자는 그런 순진한 마음으로 운동할 수는 없다며 으름장을 놓겠지만, 우리가 지속가능하게 그리고 안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으며 운동할 수 있으려면 이 고민은 진해야 한다.  



5.           


나에게도 많은 질문이 남았다. 나는 그 공간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다. 구호도 외치지 못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문에 등산화를 반즈음 끼워둔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줌 토론회장에서도 쫓겨났다. 우리가 들어가고자 하는 장면을 화면에 송신한 후 “주최자가 당신의 웨비나 등록을 거절했습니다.”는 문구가 뜨고 곧 퇴장당했다. ‘거절’, 나는 무엇으로부터 거절당했을까. 무시당하고 막히고 쫓겨나면서 무언가 마음에 맺힌 듯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 위치는 어디인지 혼란이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고, 어느 위치에 서 있는 것이 맞는가. 여러 위치가 있었다. 우리 중 앞장서 들어간 청이 있었고, 유일하게 발표자로 초대받은 별이 있었으며, 영문 모르게 우리를 막아선 환경부 직원과 한국리서치 직원들이 있었고, 어디 대학 어느 연구소 ‘전문가’들이 있었고, 중재한다고 대화한다고 말들을 내민 환경부 국장이 있었다. 어느 곳에 서 있는 게 정직한 걸까.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직하게 갈 길을 내다보고 말을 건넬 수 있는 학자가 되어 안에 초대받았으면 했다. 그리고 동지들이 밖에서 들어올 때, 내가 밤새 준비해온 말들을 모두 버리고, 길을 비켜달라고, 말들을 들었으면 한다. 당신에게 내 마이크와 발언권을 넘기겠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했다. 전문가이면서 전문가를 포기하고 싶었다. 맺힌 한을 풀고 변화를 실현할 힘을 갖되, 어느 순간 그 힘을 던져버리고 가장 낮은 곳에 내려가 같이 서 있고 싶었다. 내 위치에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이들에게 부끄러워하시오 말하고 절박하고 정직한 이들 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하고 싶다.      


그저 갈 길이 멀겠다.           

         

덧. LEDS 국민토론회에서 소동의 소리는 ‘1:55:30’, 별의 말은 ‘4:44:00’, 빈의 말은 ‘5:01:30’에 담겨있습니다. https://youtu.be/HN1sUU543lU

덧덧. 긴 기록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끄적인 글이 지난날의 시간에 힘이 되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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