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함이여
삶의 덧없음을 너무도 일찍 알아버린 이의 최후는 정직하나 비참하다. 무상한 것들을 마주하고 남게 되는 허망함에 갇히지 않기를 바랬다. 나도, 그리고 너도. 사실 나는 겉보기보다 나약하다. 생각보다 무책임하다. INFJ는 나의 성향이 아닌 지향점일지 모른다. 나는 고독하고, 낭만적이며, 섬세하고, 계획적이기를 지향하니까. 생각보다 활발하고(집에 가만히 있으면 미쳐가고), 현실적이며(쓰레기도 막 버릴 수 있으며), 사고적이며(이성의 한계에 지배되었고), 즉흥적이다(계획에 모조리 실패하며 마감 펑크 전문이다). 나를 설명하고 표현하는 일련의 짓들에 질려버린 것은 무엇이 나이고 무엇이 내가 되고 싶은 것인지 구분이 어려워졌던 데 기인한다. 일련의 종언을 내리기 전에 남은 시간만이라도 유종의 미를 잘 마무리 짓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한다. 무너뜨린 신뢰를 모두 회복시키고 조금 웃으면서 마무리 짓고 싶다. 이러한 바람과 함께 해갈이를 맞을 준비도 한 호흡 쉰다. 남은 시간들은 모조리 책임지는 시간들이다.
줏대가 없으면 주위에 흔들린다. 그런 면에서 나는 강직한 사람들이 부러웠다. 호나 빈은 분명 내가 알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단단한 사람이다. 사람은 그럴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나씨도. 현도 내가 보기에는 참 강직한 사람이다. 영도 흔들리지만 정말 강인한 사람이다. 휘둘리기보다 자신이 있다. 나는 호언장담과 자신감으로 무장했지만 속으로 들어갈수록 조마조마하고 나약하고 무책임하고 무능하고 다치고 지치고 뭐 없는 것들이 남는다. 집중해야한다. 내가 뱉어놓은 말들, 내가 맡아버린 것들, 내가 하기로 한 것들은 모두다 힘과 체계를 필요로 한다. 일요일 밤의 자책으로 나의 삶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내가 마주했던 문제들을 명확하게 언어화해내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바꾸어갈 체계를 만들고 싶은 것 뿐이다. 이것 없이는 내가 어떤 대안을, 지금의 난국을 헤쳐갈 묘수를 꺼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제도적 변화의 층위에서 말해지는 준비는, 분명 생명의 영성적 층위에서 놓여져 있는 변화의 탄탄함에 영향을 받는다. 물질주의에 갇힌 세상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면, 내 안의 물질주의를 없애야 하고, 진심으로 자치분권과 지역균형/순환을 바란다면 나의 근대성과 결별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모순을 감각하는 법이자 모순을 해결해가는 법이다. 이 긴장을 무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지향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의 영역이다. 쓰레기를 하나도 만들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설령 쓰레기를 하나도 만들지 않는 삶으로 우리가 간다고 할지라도 산 속으로 들어가는 삶을 택함으로써 구조 전반의 변혁을 위한 운동성은 비워두게 된다. 그리고 모두가 변방과 지역을 향해 떠난다면, 세상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결국 비워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나도 우리도 비우자는 거싱다. 안경을 쓰고 또렷한 상태로 글을 쓰면 너무 많은 것들을 말하려다, 하려다 실패하고 만다. 결국 어느 지점에서는 정리하고 비우고 포기하고 내려놓고 양보하는 면이 있어야 한다. 균형과 순환을 우리 안에서의 원리로 자리잡게 해야한다. 내가 만들어갈 세상이 나에게 깃들도록, 그래서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그 기운과 모습을 줄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의 지향점이다. 정치라고 이것의 예외가 아니이며, 녹색당이 기성 정당과 가장 달라야 할 지점은 그 감각이다. 일종의 멘탈리티일수도 문해력일 수도 있고 감수성일수도 있는 그 영역을 우리는 늘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한다.
나를 우리를 세상을 살리는 일들을 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자 하는 길은 살리는 길일 뿐이다. 그 방향성과 멀어지고 멀어져서는 아니된다. 김한민의 이야기는 지독하게 적나라하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 첫 문장은 내가 봐서는 안 될 진리 같은 것이었다. 자살을 고민하지 않는 이는 사실 성찰의 이유를, 존재사유의 핵심 축을 잊어버린 것과 같다. 중산층이 택시와 차에서 무언가를 외면하듯. 연구자가 연구실에서 세상을 외면하듯. 결국 우리는 무언가를 하는 동시에 무언가를 외면하고 무언가를 파괴하고 있다. 지독한 죽음의 유혹 혹은 근본으로의 회귀를 늘 곁에 두고 살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어느 것도 두고 가지 않겠다는 원칙을 제안함과 동시에 많은 것을 두고 가는 것이 우리다. 나는 기후판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조금은 지겨워졋다. 실증이 났다. 혹은 실망했다. 선님은 아직도 무언가를 사랑하고 계실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마음을 잘 알고 계신 분인데 말이다. 나는 나를 아껴주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응답을 했을까. 그만큼 부응하고 있는가.
내가 지독하게 이를 갈았던 그 감정들로부터 나를 떠나보내기로 결정한 것은 언제일까. 텔레그램 이후에 나의 소통체계가 망가졌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독한 감정들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든 보호하기 위한 것이든 나를 거리 두게 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벙커이자 에어백 같은 것이다. 그 결과는 지켜낸 것이자 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상실증, 감정상실증의 괴로움은 지속적인 고통을 불어넣고 있다. 우리는 안다. 마주하기 전까지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앞으로 남은 시간들은 이것들과 대면하는 시간일 것이다. 오래토록 피해왔다. 아 보고서. 김 선생님께의 편지. 한국철학의 모색에 대한 글. 유 선생님께의 전화. 한국에서의 대안 경제에 대한 모색 글. 녹색전환연구소의 입장과 녹색전환의 철학적 기초와 녹색평론에의 기고. 녹색당의 방향과 정책대회를 위한 준비들.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편지쓰기. 한 해의 갈무리.
생일 날 내가 쓰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진심을 끌어올려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