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1월의 마지막 날이다. 늘 그랬지만 어젯밤은 더 복잡했다. 엉켜있는 감정의 실타래를 풀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자폭할 것만 같았다. 나는 버틴다는 말을 자주 쓴다. 습관처럼 쓰는 말들은 늘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꼭 버텨야 하나? 누군가가 물을 때 나는 머뭇거린다. 버티지 않으면? 그렇다면 누가 마지막까지 남나? 나는 책임감과 버틴다는 것을 등치시키지만, 이것은 조금의 착각을 내포하고 있다. 버틴다는 마음으로 할 것이면 애초에 그만두거나 들어가지 않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굳이 버틸 것 까지 있나. 자기 아니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착각과 결별해야 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 오해가 이리 골이 깊다.
그런데 버팀목은 매력적이다. 등대지기도 참 매력있다. 나는 늘 이 삶이, 이 일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 시대적 요청이자 조건임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무언가를 은폐하고 있는 말의 마법이다. 선택, 까지는 아니더라도 택했다. 내가 택한 길이고 나의 업이다. 그러니 그렇게 가엽게 버틴다는 말을 할 필요도, 굳이 시대를 들먹일 것도 없다. 우리는 그냥, 별다른 이유를 붙이지 않고 의미를 발굴하지 않고도, 시대의 어느 조건에서, 자기가 고심 끝에 택해온 여러 흐름들이 모아져, 사는 것이다. 그럼 됐다.
무려 일 년, 이나 미뤄온 일들이 있다. 밤을 샌다고 다짐하고도 기분이 상하여 쓰러지듯 잠자온 세월도 일 년이라는 소리겠다. 사명감과 책임감을 들먹였지만, 나는 그리 투철한 편이 아니다. 그냥 멋있는 것을 좋아하고 거절을 잘 못하고 마음이 자주 뒤숭숭 할 뿐이다. 공론장에 올릴 글들은 사명과 사유와 사색이 아주 시-너지를 일으켜야겠지만 그것이 사-실인가. 사실의 범주와 색채가 이리 넓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미뤄온 일들을 오늘은 모조리 끝내겠다고 이만 이천 오십 이 번째 다짐을 한다. 이번 달을 넘기면 그것은 아니 된다. 나라는 사람의 신뢰와 양심과 다짐을 망각하고 싶지 않으므로, 하고 다짐을 한다. 피의 화요일이 되겠다. 물론 이런 다짐은 물리 법칙을 위반할 때가 잦다. 시간적 법칙을 위배하는 것도 것이지만, 기분의 법칙과 상이할 때 더 어려워진다. 이럴 때 인용할 수 있는 폴라니 형님의 멋진 말이 있다. 위대한 것은 중력이 아니라, 그 중력을 거스르는 새의 날개짓에 있다. 과정, 시도, 모색과 같은 사랑.
그제는 이경룡 선생님을 만났고, 어제는 정승희 선생님을 만났다. 나에게 철학을 가르친 스승과 문학을 가르친 선생님, 인 줄 알았는데 내가 배운 건 삶이었다. 단순하게, 삶이었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이 사랑스러운 사람들, 당신들과 살아가는 이 세상이 어찌 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류애, 라고 칭해지는 것들은 대게 길러지는 것 혹은 경험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만, 이 좋은 날에 내 마음에 찾아온 상심의 정체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내가 옳다고 믿고 행하고 ‘실천’해왔던 길이 사실은 그저 수만개의 펼쳐짐 중 하나의 길일 뿐이었다. 윤리적 우월성을 갖춘 변화의 최전선, 은 나의 위안적 해석이고 실은 그저 맛깔나게 살아가는 수만 개의 삶 중 그저 하나일 뿐이었다. 보통의 아름다움을 감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보다도 진보의 아집과 오만에 대한 슬픔일 수 있다. 그보다도 직선에서 원으로 넓어지면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일 수 있다. 폴라니의 이중적 운동으로서의 역사관이 가지고 있는 ‘진보없음’ 혹은 ‘절대적 항로 없음’ 같은 것일까. 어렵게 말할 것도 없이, 그저 그게 정직한 삶의 진리였던 것이다. 자연에 맞고 틀린 게 어디있을까. 그런데 남는 마음은 같다. 그간 피해왔던 이 정직한 질문은,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아닌 걸 알면서도 가는 것도 용기일까. 책임일까. 아니면 저항하지 못하는 관성일까. 참,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나의 타락과 나의 모순과 덧없음을 누군가의 삶으로 보게 되었다. 그럼에도, 계속 사랑을 이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