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공부
질문을 쓰는 것이 어려워 단어들을 적어내려갔다. 모든 것은 진심으로 빚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선의와 악의는 사후적 해석의 결과로 일이 일어나는 그 시점의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 뿐이다. 원인도 결론도 아닌, 우연도 필연도 아닌 그 어딘가. 그 끝에 지금 너와 내가 우리가 서 있다. 결론내리고 요약하고 응축하는 것에 상을 설정하게 되면 많은 것을 놓치고 만다. 그러니, 어느것도 자신하지 말아라. 호언장담이 모든 것을 이뤄내지는 못한다. 나는 지금 이곳에 왜 와 있나. 갈팡질팡하고, 혼란스러워하고, 무거워하는 정 가운데에 어떤 마음이 있나. 그걸 알고 싶었다. 내가 한 해, 혹은 두 해간 반복해서 빚어내고 있는 어떤 안타깝고도 쌓이는 잔인한 업보들을 끊어낼 수 있는 지혜를 구하고 싶었다. 지금 내가 사랑하는 공간들이 겪는 어려움을 구해낼 그런 마음가짐을 구하고 싶었다. 다시 처음이 질문으로 돌아가 수천 수만년 쌓였다는 지혜를 빌려오고 싶었다. 그래서 확신과 책임이 앞섰다. 기둥을 적었다. 대들보, 마룻판, 기둥. 나는 재목인가? 그보다 내가 재목이 된다면 무언가를 지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지어진다면 세상과 조화를 꾀할 수 있는가? 나는 궁금하지도 않고 답을 구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지혜를 갖고 싶었다. 그 욕망과 절실함 사이에서. 우왕좌왕 갈팡질팡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아닌, 단단하게 단아하게 단순하게 있을 수 있는 마음. 내가 원하는 것을 아는 것이, 내가 바라는 질문을 아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 까닭을, 찾았다. 그러니 되었다. 그러므로, 괜찮다.
오랫동안 손톱을 물지 않겠다고 일기장에 적었을 때가 있었더랬다.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자포자기했다. 혹은 긍정하려고 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저, 그럴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손톱을 물지 않고 싶다. 내가 이 마지막 달은, 매듭달은 잘 매듭지어보고 싶은 것이다. 오래된 나의 관성들과 말이다. 밤을 샌다고 말하면서, 잠을 설치는 자체로 위안을 얻는 잘못된 젊음의 패착처럼. 내가 꼭 있어야 한다고 믿으면서 호언장담으로 짊어질 수 없는 무게를 매고 빙빙 돌고 있는것처럼. 사실 잘 모르면서 아는 척 하고 부풀리면서 외적의 나를 높이고 내적의 나를 깎아내리는 것처럼. 그래왔던 것들과 매듭짓고 싶어졌다. 잘 매듭짓고 싶어졌다.
잃어버렸던 꿈들과 다시 만나고 싶어졌다. 마음이 조급하다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놓아버릴 것은 놓아버리고, 잡을 것은 잡아야 한다. 나는 주위에 휘둘리며 막, 그리고 막, 그리고 막막, 살아왔던 것 같다. 한국철학도 그림도 사랑도 우정도. 하지만 기회들은 찾아온다. 내가 나를 잡을 수 있게 사랑을 잡을 수 있게 찾아오는 기회들이 있다.
아까 피아노를 틀린 것이 그렇게 마음에 남았다. 내가 예술의 자질을 잃어버린 것처럼 생각되어 참으로 슬펐다. 그러나, 실은 그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나는 잠시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도망간 것이 아니다. 나는 잠시 떠나있다가 온 것이다.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나는 다음을 위해 배우고 있는 것이다.
틀릴 수 있다. 안 맞을 수 있다. 어긋날 수도 있다. 그 자연스러운 순리 옆에서 서서 인사하고, 웃고, 사랑한다고 말하자.
괘라는 것이 신비롭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는 내가 아끼는 강령의 말을 품고 살아가고 싶어졌다. 영성이 주는 깊이가 있다. 빈이 말했던 바람이 이것이었을까. 한국철학을 늘 동경해왔지만 이처럼 분명하게 감각한 것은 스물넷이 돼서였다. 귀한 공부와 맞바꾼 이 시간들은 나의 선택이자 선택이었다. 그것에 응당한 대가를 치를 수 있는가. 나의 미련함으로 날려보냈던 소중한 시간들이 있다. 지금은 그와 같이 소중한 시간이다. 이제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동안 아야프 보고서를 쓰지 못했던 약 1년 간의 시간동안 나는 끌려오고 있었다. 혹은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시간이 없는 것은 맞다. 그러나 시간은 내는 것이자 만드는 것이다. 밤새 드라마를 볼 수도 있고 웹툰을 정주행 할 수도 있는 것처럼, 몰입의 힘은 분명한 팽창력을 가지고 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은 마음에 그 원동이 있다. 늘 자문자답으로 문제를 극복하려 한 것이 나르시시즘의 발현이다. 동서고금의 이야기들은 지금의 나와 사회를 위한 주요한 단초요 그렇기에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중한 지혜를 길어낼 금광과도 같다. 삶을 바라보는 자세에 대한 것이다. 주역의 괘는 동양의 세계관이고, 그 세계관에 바탕을 둔 역사적 응집물이다. 언어체계가 무엇이든 하나의 극치에 이르면 아름답듯이, 주역의 지혜는 역사적 지혜인 것이다. 말들이 현란한 시대다. 지리산 정치학교에서 배웠던 연찬의 방법론을 길이 마음에 지니고, 잘, 아주아주 잘 살아가고 싶다. 지혜는 이미 주위에 널려 있었다. 구하지 않았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