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앙 이야기만 나오면 아리다. 어디서부터 실타래가 얽힌 것일까 나는 알지 못한다. 나의 시작아가애 그런 것인지, 함께 뜻 맞추고 만들어온 미울시리 소중한 동지들 때문인지, 붕앙을 잡은 손을 놓았을 때 어느 구렁텅이로 잠겨들어가는 것 같은 악몽 같은 나의 상상화 때문인지. 이유를 고저하고 삶에 찾아오는 이 재난을 어찌할까. 정말 어떻게 할까.
마침표를 기대했는데 쉼표가 찍혔다. 정말로 오늘 설령 선고가 무죄가 나오면 나는 활동가를 은퇴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바람일 뿐이라는 것이 차가운 벽 앞에서 드러났다. 조금의 기대를 가지고 쓴 기자회견 발언문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우리의 활동에 지금 이렇게 종언이 내려지는구나. 싶었다.
판사가 선고를 읽을 때 ‘정당성을 인정한다’는 말을 듣고 기록을 멈췄다. 설마 정말로 우리가. 정말로 우리가 해낼 수도 있는가. 나의 기대였다. 뒤이어 나오는 야박한 말들이 깊숙이 아팠다. “피고인들 주장 받아들이지 않고 공소사실 전부 유죄로 인정합니다. 형을 정함에 있어 피고인들 공익에 헌신한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활동은 법질서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피고인들의 사전 계획 하에 실행한 미신고 옥외집회 주최나 타인의 재물 손괴 등 범죄는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피고인들 목적의 정당성만 부르짖으며 이를 실현하고자 선택한 범죄에 대해서는 반성하거나 죄책감 느낀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숨 돌릴 틈 없이 다음 재판으로 넘어가는 상황에서 한 마디 외치지 못하고 나왔다. 판사와 검사에게 소리 한 번 못 치고 밖으로 나오면서 한탄스러웠다. 현실의 벽 앞에서 조금이나마 기대를 했던 스스로의 순진함과 낭만이 턱없이 저주스러웠으며, 함께 있는 동지들에게 우린 할 수 있다고 강하게 용기를 불어넣지도 못하는 모습이 나약함이 참 슬펐다.
첫 기후재판이라 여기저기서 적을 때마다 나에게 남았던 것은 중압감이다. 나는 아마도 모든 경우를 무겁게 여기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듯 하다. 앞으로 이어질 기후재판들의 선례를 우리가 어떻게 남기는가에 따라서 그것은 경로가 된다. 특히 법의 판에서 어떤 판례는 그 자체로써 명문조항 만큼이나 위력을 가질 수 있기에 우리는 실제로 역사서에 기록되고 있는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삶은 가벼운 것이다. 재미란, 마땅함이란 부수조건이 아니라 삶과 활동을 영위하는데 필수적인 공기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린 것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귀한 언어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가벼운’것으로 취급되어 한 줄 남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겠다. 막대하게 적혀야 하는 국가의 책임과 방조 등 무겁게 기록되어야 할 것은 부재했고, 가벼운 것은 그 나름대로 사라졌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인가.
법조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즉흥적인 것일까. 그런 꿈을 꾼다. 국가와 두산중공업을 위시한 기업들을 피고인석에 앉혀놓고 그들의 행각이 기후위기 시대의 중차대한 생태학살 범죄라는 것을 주장하는 장면을 꿈꾼다. 혹은, 현행 법 제도 내에서 이 취지가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으니, 시민들이 모여, 각각의 변호사, 판사, 활동가, 연구자, 예술인, 등이 모여서 기후법정을 개회하고 그 자리에서 우리의 직접행동에 대한 죄목을 무죄로 선언한 후, 누가 죄인(법인격)이고 무엇에 죄가 있는지를 선언하는 그림을 그려본다.
요새 등장하는 피켓들 – “생태학살을 범죄로”, “활동가 말고 생태학살 처벌하라” 등 -을 보면 기대가 된다. 내가 생태학살을 발화한 지 어엿 2년이 되어가고 있다. 이것이 범죄가 되기까지 국제형사재판소(ICC)등 법적 절차가 남았지만, 실은 그만큼 더 중요한 것은 아래로부터의 요구이다. 내가 그를 꽃이라 부를 때, 그가 나에게 와 꽃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석탄발전소를 기업과 지역경제를 살리고 국부를 창출하는 사업이라 부른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고, 막중한 지구적·기후위기 앞에서 자연을 착취하여 소수의 기업 법인격의 자본을 축적하고 지역의 경제와 사회 모두를 죽인 후 그 빛을 모두 미래의 생명에게 전가하는 국가기업 범죄라 부른다면 그것은 죄가 된다. 언어가 사람들의 부름과 쓰임에 의해 태동하고 변화하듯이, 법의 언어 구조 또한 커먼즈라 일련의 사건과 상황에 지극히 영향을 받고 그것을 넘어 변화하고 움직이게 된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보았듯이 ‘지금 여기’ ‘현행’법의 몰지각함과 시대착오적인 면이 마치 한국 기업의 경제적 몰지각함이나 그 극단의 비윤리성만큼 과하다. 이게 현주소다.
그렇기에 오늘을 뒤엎고 내일로 가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 그 자체이겠다. 오늘은 울 것이다. 마치 붕앙이 지어지던 그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애도밖에 없었듯이. 재판부의 수준과 인식 정도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애도와 유감 뿐이다. 분노와 투쟁과 형성은 그 다음. 고작 1심이고 아직 민사재판도 남았다. 우리는 젊고 석탄발전소는 2050년까지 계속되기에 시간은 한참 남았다. 다만, 섣불리 마침표를 바랬던 여린 마음이 내 스스로 조금 안타까울 뿐, 기후위기 앞에서 우리들은 늘 어느 과정 속에 있기 마련일텐데. 생으로써의 활동과 생존으로써의 투쟁 과정에 있는 모두에게 불완전하나마 평화가 깃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