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 이희연, 송지용, 장윤석
번개벽파
이희연(이화서원 연구원, 오스트리아 University of Innsbruck)
장윤석(이화서원 연구원, 성공회대학교)
송지용(이화서원 연구원, 원광대학교)
키워드
한국학, 다시, 포덕, 개벽, 살림, 풍류, 인류세, 평화, 전환, 동학
초록
미증유의 기후·생태위기를 겪는 인류세에 접어든 오늘날 한국학은 어떠한 의미를 가질 것인가. 개벽이 다시 세상에 나온 지 160여 년 만에 또다시 개벽을 말하며, 개벽, 살림, 풍류라는 화두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를 옛것을 다시 보는 ‘다시’,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개벽’, 덕을 세상에 편다는 뜻의 ‘포덕’으로 정의하고 ‘다시’, ‘개벽’, ‘포덕’을 전체 목차와 세부 목차가 순환되는 프렉탈 구조로 구성하였다. ‘개벽’장에서는 서로를 살리는 개벽을 살펴본다. 안과 밖의 변화를 추구함과 동시에 얽혀가는 관계를 인지하고 감각하는 것에서 공동체적 얽힘과 개인의 풀림은 서로를 지지할 수 있다. ‘살림’장에서는 비극 속에서 전환을 피워내는 생명과 사회의 흐름을 살펴본다. 한국의 죽임의 역사와 살림의 역사를 톺아보며, 생태와 경제를 살림으로 재번역하여 활로를 모색하였다, ‘풍류’장에서는 풍류도와 동학 검무의 관계를 살펴보고 동학 검무의 영성적 특성을 반영한 재창조 작업을 제안하였다. 이상을 바탕으로 개벽, 살림, 풍류라는 틀로 한국학을 발굴 및 발전해 가려 한다.
1. 다시
번개와 범(汎)으로 다시 개벽 말하기
다시 개벽이다. 최제우의 개벽이 처음 세상에 나온 지 백육십여 년이 지나간다. 우리는 다시 개벽을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개벽파 선언이다. 다른 세상을 열자는 염원과 인식, 그리고 그 동학이다. 이 연구는 개벽을 첫 낱말로 동학을 통해 다시 한국(철)학을 정립하려 한다. 그렇지만 한국학은 참 묘하다. 있는 듯 없는 듯,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와 같이 반은 정의하고 반은 정의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상태로 있는 듯하다. 풍류도를 말하는 다음 문장을 살펴보자.
“풍류도는 말 그대로 실체가 없다. 왜냐하면 실체가 있으면 개별적인 다른 개체들을 완전히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체가 있으면 포함(包含)할 수 없다. 제 자신의 성격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을 자기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제 자신이 타자이기 때문이다. 노자의 도처럼 낳고도 소유하지 않는다(生而不有).”
김상일은 이런 풍류도의 특성이 한국사상사 전반에 나타난다고 하였다. 없는 것 같지만 분명하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학은 없는 것처럼만 보인다. 무슨 까닭일까. 한국의 참으로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역사 속에서 우리는 한국학을 알지만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서구중심주의의 근대성에 매몰된 학문 기조와 체계가 자리 잡은 이후 한국학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외면받은 학문은 힘을 잃었고, 지금의 한국학은 한국 사회가 처한 현주소를 진단하고 청사진을 보이지 못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학을 재정립하는 시도는 무의미한가. 혹자는 한국학은 구시대의 산물이라고, 개벽은 때 지난 말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그러나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해서 밑동을 자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가을이 와 벼가 익어가고, 흐르는 물에 뿌렸던 씨알들은 어느새 자라나 있다. 귀한 것은 늦게야 빛을 본다고 했던가. 몇 년 전부터 다시 한국학을 말하고 만나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들의 모습과 이름은 다양하다. 곡성에서는 2019년부터 <이화서원>이 꾸려져 『주역』과 『도덕경』, 동학 경전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나고 있다. 2020년 겨울에는 <다시개벽>잡지가 창간되어 『개벽』 잡지의 창조적 복간을 내걸고 계절마다 흩어진 한국학의 씨알을 모으고 있다. 비슷하게 창간된 생태전환매거진 <바람과물>도 에콜로지에 뿌리를 두고 한국의 기후·생태위기 대응과 문명 전환의 목소리를 모아가고 있다. 2021년 원주에서는 무위당 장일순의 뜻을 이어받은 <생명협동교육관>이 개관해 <무위당대화학교>를 열었고, 남원의 실상사에서는 문명 전환을 위한 <지리산정치학교>가 만들어져 전환 정치의 거점을 만들어가고 있다. 한국사회의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가겠다는 <다른백년>과 당면한 지구적 전환에 대응하고 미래의 한국학을 모색하는 <지구인문학연구소>도 있다. 각양각색이다. 어느 신문에도, 방송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학 운동이 세를 불려가던 것과 같이 우리는 나날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다. 2022년 9월 24일 광화문에서 열린 기후정의 행진에는 삼 년 전보다 몇 배가 늘어난 수만 명이 문명과 체제를 전환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개벽은 실패하지 않았다. 슬그머니, 그리고 어느새 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 중 하나로 어느 날 번개처럼 생겨났다. 이름하여 번개벽파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져 도원결의로 이어졌다. 희연은 평화학과 동학 연구자로, 한국과 유럽을 시작으로 인류세의 생명평화사상을 정리하고 있다. 지용은 춤추는 사상가를 지향하며, 동학 등 한국사상을 연구하고 그 수행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공연이나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윤석은 기후·생태위기를 화두로 연구활동하고, 한국철학과 함께 녹색전환의 길을 찾고 있다.
우리는 개벽 3세대라 할 수 있다. 개벽 1세대와 2세대는 폄하되고 잊힌 개벽의 사상과 운동을 발굴해 혁명과 생명으로 재해석했고, 우리는 이런 선배 세대의 학문적 노력과 운동을 계승하여 가고 있다. 우리의 특징은 번개의 시대적 긴급성과 범(汎)의 포괄성을 가져가는 점에 있다. 우리는 “인류가 지구에 입힌 손상을 처음으로 깊이 자각한 세대이자 번영과 발전의 정의를 바꿀 수 있는 마지막 세대다.” 우리는 같은 뜻을 가지고 학문 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서로 다른 분야를 포괄적으로 엮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정이 중요하다. 단순히 같은 시공간에 있음을 넘어서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만남을 통해 새로운 길을 내고자 한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우리가 되고자 하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다시-개벽-포덕의 방법론
이 글은 다시-개벽-포덕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자연계의 프렉탈(Fractal) 구조와 같이 연구의 대목차와 소목차에 걸쳐 반복된다. ‘다시’는 ‘옛것을 다시 보는 것으로’ 한국사상의 고전이나 기존의 개념들을 다시 보는 것이다. ‘개벽’은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한다(法古創新)는 것’으로 옛것을 어떻게 해석, 적용, 접목하여 창조할 것이냐에 대한 이야기이다. ‘포덕’은 ‘덕을 세상에 편다는 뜻’으로 어떻게 창조하고 펼칠 것인지 풀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개벽’, ‘살림’, ‘풍류’를 각각 ‘다시’, ‘개벽’, ‘포덕’하여 본다.
이 연구는 빙하시추 작업과 같다. 인류의 기술이 진보하여 빙하시추가 가능해지면서 과학은 새 국면을 맞이했다. 표층 지구에 국한되어있던 과학연구가 심층 지구까지 확대된 것이다. 이는 인류를 비롯한 생물의 역사를 밝히는데 큰 기여를 했다. 우리의 연구는 이와 같이 개별 학문의 영역을 뛰어넘는다. 우리의 연구는 통합성, 총체성, 다양성을 지향한다. 우리는 전환의 주체와 대상을 분절적으로 이해하는 분과학문체계의 습(習)을 넘어 다학제성을 추구하고, 학문 안팎의 수평적 사고와 수직적 사고를 넘나드는 다층위적 연구를 지향한다. 이미 이 연구 안에는 철학, 인류학, 평화학, 사회학, 경제학, 생태학, 미학, 신학 등 다양한 학문들이 ‘개벽’, ‘살림’, ‘풍류’라는 핵심 낱말로 얽혀 있다. 식민화되어 고루하게 작용하는 기성 관념의 족쇄를 넘어갈 것을 과제로 삼는다. 앞으로의 연구는 이 낱말들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방향으로 향해갈 것이다. 현실과 괴리된 학문은 점차 효용성을 잃고 있다. 눈앞에 닥친 기후위기나 세계전쟁의 위기가 학문의 역할이 무엇인지 되묻는다. 한국학 역시 그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그러한 물음에 우리는 각자의 학문을 깊게 알며, 서로의 얽힘을 넓게 가져가려 한다. 수직과 수평의 층위들이 반복적으로 연구에 쓰이는 까닭이다.
또한, 이 연구에 아름다움이 있다. 함석헌은 “앎은 앓음이라”, 현경은 “앓음은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우리는 앓고, 알고, 끝내 아름다우려 한다. 한국학이 다시 시작하는 토양은 부서지는 세상이었다. 부서지는 지구를 사랑하는 앓음의 마음으로 우리가 처한 시대의 길을 알아간다. 그리고 그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가운데 아름다움을 찾아간다.
2. 개벽
다시: 우리는 어떠한 시대를 살고있는가
대전환이라 말한다. 한국의 맥락에서 개벽이라 말할 수 있다. 수운 최제우가 다시 불러낸 ‘개벽’ 개념은 통상적 정의인 ‘천지가 처음으로 생기는 것’의 의미를 넘어 문명 전환의 의미를 담는다. 최근 문명 전환에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는 말이 등장했다. 서구의 과학자들이 처음 제안한 이 단어는 인류가 지구에 미치는 지배적 영향력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지질 시대와 구분된다. 인류세는 인간이 가진 힘이 자연의 힘을 변화시킬 정도로 커졌다는 것을 함의한다. 반면, 이는 인간의 한계 역시 명확하게 드러낸다.
지금까지 인류는 수많은 상상을 통해 과학기술을 발달시키고, 사회를 확장해왔다. 하늘을 보면서 이상을 그리고 현실로 만들어갔다. 하지만 인간에 의해 변형되는 자연이 삶에 균열을 내며 인류의 시선을 옮기게 한다. 하늘로 가있던 시선이 땅을 향한다. 이제는 땅을 볼 시간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내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식하게 한다. 나아가 내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무엇으로 인해 살아가는지 직면하게 한다. 인간이 가진 이상이 아닌 현실적 조건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간은 위기나 재앙이면서 동시에 자기 배움의 시간이다.
도법 스님은 문명 전환이 말세라는 말로 지금껏 쓰였다고 말했다. 문명의 전환은 계속 우리 삶에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이를 단절적인 혼란과 종말의 상징으로만 보았다. 생명보다는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평화보다는 폭력에 집중했다. 문명이 전환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공존과 협력은 파괴와 분열에 가려졌다. 그러나 인류세를 논의하는 지금, 자기배움을 행하며 지구를 다르게 바라보는 사람들로 인해 시선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잊혀졌던 다른 감각들이 드러나고 있다. 아직은 정리되지 않았다. 포월과 폭력의 시선이 혼재한다. 지금의 시대는 시선이 뒤엉켜있는 시대다.
개벽: 어떠한 방향이 서로를 살리는 길인가
시선의 뒤엉킴은 존재의 행위 주체성이나 내적-작용(intra-action)을 단편적으로 보게 한다. 뭉쳐있는 지점에만 집중하게 하며 흐름과 감각을 무디게 한다. 하지만 서로를 살린다는 것은, 즉 공생한다는 것은 주체적 개입이 언제나 주체의 단독적 개입이 아니라 다른 물질적 존재들과 더불어 구성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얽힘의 존재라는 것을 감각하는데서 시작한다. 김지하는 자연과 인간을 비롯한 인간의 여러 차원의 공생 관계가 네트워크로 연대하여 기반을 갖추는 것을 새로운 문명 시대로 보았다. 서구에서는 카렌 바라드(Karen Barad)가 인간이 ‘행위 속에’ 혹은 ‘행위로’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공생을 존재와 행위로 풀며, 물질의 존재가 “입자나 파동의 어느 한 양식이 아닌 양립하기 불가능한 상태들의 얽힘 속에 있다”고 말했다.
인간세계는 서구적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지구와 분리되었다. 그러면서 인간의 힘만으로 그 세계를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인간 세계만의 자기 완결적 서사는 인간을 뿌리 없는 풀로 만들며 불안을 심었다. 오늘날 인류세 철학에서는 근대적 인간이 넘어서야 할 지점을 ‘행성성’으로 이야기한다.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에 의하면 행성은 타자성으로 해석된다. 이는 “인위의 한계를 넘어선 곳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근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근대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그다음을 생각하자”는 지구 시스템적 사고와 맞닿아있다.
이러한 사고는 사실 서구 이전의 한국학과 동학에 포함되어 있었다. 동학은 민중에 의한 주체적이고 자생적인 학문이자 활동이었다. 그 주체성의 바탕에는 토착적으로 내려온 하늘공동체를 향한 의지가 있다. 이는 “안으로는 기존의 유교적 세계관을 탈피함과 동시에 밖으로는 서학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면서, 동방의 하늘공동체라고 하는 오래된 이상의 실현을 추구한 새로운 형태의 한국학”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서로를 살리는 개벽은 안과 밖의 변화를 추구함과 동시에 얽혀가는 관계를 인지하고 감각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공동체적 얽힘과 개인의 풀림은 우연성과 필연성을 가지며 서로를 지지할 수 있다.
포덕: 평화는 어떻게 살아나는가
공존은 존재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은 가이아의 개념을 통해 ‘함께 산다는 것은 하나의 존재로서 산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관계의 복잡한 생리 과정들을 통해 지구가 하나의 몸처럼 살아간다는 것”이라 말했다. 인류는 지구에 존재하는 생물들을 나무 형상으로 계보적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모든 존재들은 똑같이 진화를 거쳤다.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공생적인 관계이다. 모두 공통의 세균 조상에서 나온, ‘고등한 존재’도, ‘하등한 동물’도, 천사도, 신도 아닌 진화하여 살아남은 존재이다.
평화는 복합적 관계망을 이해하고 실현할 때 살아난다. 티모시 모튼(Timothy Morton)에 의하면 “생태적 사상은 상호연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관점에서, 서구의 관점에서 평화를 보았다. 그것은 평화보다는 전쟁에 가까웠고, 지구보다는 자원에 가까웠다. 이제 우리는 존재의 공존의 관점에서 시선을 옮길 필요가 있다. 이는 “인간이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지구가 인간과 만물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3. 살림
다시: 살림을 말하다
살려야 한다. 죽어가는 우리의 지구와 사회를 살려야 한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뿌리뽑히고, 왜곡되고, 추출적인 자본주의 경제는 지구와 사회 생태계의 붕괴를 초래했다. 기후·생태위기의 시간표에서 사회가 현재의 경로를 유지한다면 이 문명은 여섯 번째 멸종을 10년 이내 확약받는다. 이러한 비극의 상징성을 가지고 생태학살(Ecocide)이라는 낱말이 등장했다. 먼 미래의 위기가 아니다. 근시일 우리가 겪은 코로나 펜데믹과 기후위기의 상관관계가 이미 입증되었듯이, ‘지금, 여기’의 위기다. 우리는 파국과 붕괴가 엿보이는 죽임의 시대와 문명에서 살고 있다. 다시 살림을 말할 때이다.
“해월은 모심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라도 양천주(養天主)의 기름, 살림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의 모든 실천은 한마디로 말하면 ‘살림’이라고 할 수 있다. 살림은 죽임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살림이며, “인간이 자기와 이웃과 자연 안에 내재해 있는 우주생명을 키움으로써 ‘자아’와 ‘공동체’와 ‘생태계’의 공진화를 도모하는” 살림이다. 이 살림은 때로는 죽임의 폭력, 기존 봉건 세력과 제국주의에 맞서는 강력한 저항의 원리가 되기도 한다. 동학농민혁명도 그러한 살림운동의 차원에서 평가할 수 있다.”
해월의 말처럼 살림은 ‘자아’, ‘공동체’, ‘운동’ 등 여러 각도에서 살필 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살림은 세계관이자 세계감이다. 살림의 세계관은 근대의 독성이 극에 다른 죽음의 문명에서 생명이 살아나는 생태 문명으로 전환을 내다보는 세계관이다. 그런데 세계관 등 관점을 말하기 전에 죽어가고 있는 문명이 피부의 감각으로 먼저 와닿는다는 점에서 살림은 세계감이라 할 수 있다. 살림의 세계감은 죽어가는 것들을 느끼고 감각하며 그 연결됨 속에서 상호작용, 물질대사, 피드백한다. 이렇게 살림은 죽음과의 연결 속에서 생명력을 발굴하며 비극 속에서 희망을 찾는다.
살림은 뒤틀린 현재를 바로잡기 위한 지향성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시대는 경제가 생태를 잡아먹은 꼴이다. 사람이 물과 공기 없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경제가 생태 속에 묻어들어가(Embeded) 있다는 간명한 사실을 잊은 대가는 참혹했다. “근대과학과 자본주의는 한없는 ‘확대·성장’의 추구라는 공통분모를 지니는 수레의 양 바퀴 같은 관계”로 경제성장의 이름으로 사회와 자연을 모두 악마의 맷돌에 갈아 넣었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는데, “지금까지 정반대의 이론과 현실을 가지고 있었다.” 현실과 정합성이 떨어지는 이론은 결국 기후·생태위기의 실체와 위험성을 놓쳐버렸다. 이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는 몇 시간 만에 지구를 한바퀴 돌 수 있지만, 몇 년 만에 지구를 떠나야 할 위기의 목전에 다다라 있다. 학문이 원초에 가지고 있던 목적성을 다시 말해야 한다. 죽임을 방관하거나 일조하는 학문이 아니라 살리는 학문이 필요하다.
살림은 마음이다. 기후·생태위기와 인류세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하는 시구처럼 기후우울의 허무한 물음을 낳곤 한다. 하지만 오염된 땅도, 멸망하는 세계도 우리의 터전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는 윤동주의 시구처럼 우리는 모든 생명을 ‘포월(包越)’하여 품어 안아 넘어야 한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남긴 역설적인 말처럼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이다. 다시 살림을 말한다.
개벽: 죽임과 살림의 한국사
우리는 죽임의 역사를 견뎌왔다. 한국의 역사는 사회와 자연을 ‘투입’해 강한 독성의 경제를 성장시켜온 죽임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한강의 기적’으로 자평되는 경제성장의 역사 이면에는, 드높은 자살률로 상징되는 해체 직전의 사회와, 최소한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조차 비가역적으로 잃어버린 자연이 있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 속담은, 정권마다 실로 산이고 강이고 헤집었던 토건 개발의 역사 안에서 실현되었다. 이 경로의존성은 지금까지 이어져, 2022년 현재에도 17개의 광역지자체와 226개의 기초지자체는 기후위기 대응 정책은 고사하고 지역마다 신공항 등 각종 토건 개발 사업에 덮여 침몰할 지경이다. 기후·생태위기로 지역에 찾아오는 위험들의 양상이 날로 심각해져 대응이 긴요한데, 한국의 현재를 좌우하는 정책은 미래를 팔아 현재를 사는 근시안적 정책이거나, 자연 혹은 생태를 팔아 (회색)경제를 살리는 이분법적 정책이거나, 그마저도 노동과 생명을 팔아 체제를 지탱하는 소외적 정책이다. 미래, 자연, 생명을 팔아제낀 사회와 경제가 지속 가능할 리가 없다.
우리는 동시에 살림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살림의 역사는 이 죽임의 역사에 대항하는 생명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무위당 장일순과 김지하 시인을 주축으로 1989년 한살림 선언이 작성되었다. 선언은 시대를 정확히 보고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을 낳았다. 2000년 초에는 지리산에 댐을 건설하려는 시도에 맞서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이 만들어졌고, 이어서 귀농운동본부가 결성되었다. 원주와 남원의 이 두 시도는 생명평화 운동의 주된 뿌리가 되고, 대기업과 토건 경제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자연을 살려야 한다는 이 흐름은 한국의 녹색사 전반의 큰 줄기를 이룬다. 죽임의 역사 속에서 새만금 공사,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제주의 강정해군기지 건설, 밀양의 송전탑 건설, 성주의 사드 배치 등 어느 하나 이루 말할 것 없이 지역의 생태와 사람들을 상처입힌 비극이었다. 대부분 강행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생명평화 운동은 이를 계기로 커지고, 깊어졌으며, 넓어졌다. 살림이라는 말은 이 운동 과정에서 나타났다.
죽임과 살림의 한국사가 남긴 과제는 명료하다. 생태와 경제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생태(Ecology)와 경제(Economy)를 살림으로 다시-번역해야 한다. 경제와 생태는 공동의 집과 관리를 뜻하는 라틴어 오이코노모스((οiκονόμος)에 언어적 기원을 두고 있다. 생태와 경제의 관계는 죽고 죽여야 하는 상충관계가 아니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처럼, 생태 속에 경제가 묻어들어가 있다. 생태와 경제를 다시 살펴보자. 먼저 생태는 무위당 장일순의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는 말처럼 작고 큰 것이 따로 없이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상시 변하는 것들의 관계를 다루는 생태학(Ecology)은 연결의 학문이다. 동시에 생태주의(Ecology)로서 생태계의 질서이자 이 질서를 회복하는 운동성을 뜻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경제는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일반적인 경제학 교과서는 “사회가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관리하는 지 연구하는 학문”으로 경제학을 정의하지만, 생태를 살리는 경제를 구상하려면 이 정의를 재설정, 재사유(Rethinkings)하는 것이 먼저다.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 제이슨 힉켈(Jason Hickel)의 “적을수록 풍요롭다(Less is More)”는 살리는 경제의 메시지이자 구호라 할 수 있다. 기후위기에 세계적 해법으로 떠오르는 생태경제학(Ecological Economics)은 이러한 맥락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들은 기후위기에 맞서 경제와 사회를 살리는 모델을 만들어가며, 경제학 전반의 패러다임을 오래전부터 바꾸어가고 있다. 살림을 바탕으로 한 경제는 이미 출현하고 있다.
살림의 발견은 사회의 발견과 닮아 있다. 실제 사회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사회(Society, 社會)라는 개념은 나온 지 오래되지 않았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공기처럼 인지되지 못한 채 함께 있던 사회가 악마의 맷돌이 굴러가는 근대 자본주의 질서의 폭력적 제도화로 해체되고 나서야 비로소 발견되었다고 본다. 사회가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생명으로서의 사회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실제로 조직과 사회 시스템에는 고유의 생명력이 있다.” 사회 시스템에는 고유의 생명력이 있다. 사회는 살아있다. 사회처럼 살림 또한 죽임으로 인해 발견되었다. 이는 살림의 역사적 동학을 설명한다. 공기처럼 존재하던 생태와 경제의 붕괴가 전환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기후위기의 심화는 녹색전환 담론을 요청한다. 생태학살(Ecocide)과 같은 비극적 사태는 급격한 전환의 바탕이 된다. 죽임의 역사가 살림의 역사를 요청한다.
포덕: 살림은 전환의 동학이다
살림은 전환의 동학(動學)이다. 비극 속에서 전환을 피워내는 생명과 사회의 놀라운 흐름(流)의 이름이 살림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전쟁터에서도 태어나고 걸어 나오는 아이’들이 있고, 폭격으로 불탄 들판에도 봄은 온다. 이 동학은 생명력이다. 함석헌은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고 했다. 앎음을 통해 생겨나는 앎은, 비극이 낳는 고통과 슬픔을 애도와 분노로 전환해 역사의 다음 페이지를 열어간다.
동시에 살림은 전환의 동학(東學)이다. 전환은 주체, 청사진, 동학 세 가지가 설명될 때 시작될 수 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 나에게도 너에게도 우리에게도 터져나올 때 전환은 시작된다. 우리에게는 한 때 인구의 삼 할을 차지했던 동학도들의 혁명과 같은 역사적 선례가 있다. 철학자 김상봉은 “나는 너를 통해 내가 된다”고 했다.” 한발 나가면 나는 ‘너’를 통해 내가 되고, 우리는 ‘만남’을 통해 우리가 된다. 살린다는 공통의 지점으로 이루어지는 만남이 전환을 쥐도 새도 모르게 도래하게 할지도 모른다. 살림은 전환이다. 전환은 생(生)과 떨어뜨려 놓을 수 없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너와 살기 위해서, 우리가 살기/살아남기 위해서 전환을 말하게 된다. 전환의 ‘환(渙)’자는 주역의 59괘 풍수환(風水渙)괘에 그 바탕이 있다. 그러니 살림이 어찌 풍류가 아니겠는가. 전환은 바람과 물처럼 흘러오고 이처럼 살아난다.
4. 풍류
다시 : 풍류와 동학을 다시 보다.
풍류도(風流道)와 동학을 다시 본다. 전환의 시대 앞선 이야기와 같이 한국의 민중들은 개벽과 살림의 말로 대안적 관점을 제시하고 문명을 전환하고자 했다. 개벽과 살림의 말들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동학이다. 그리고 동학 이전에 풍류도와 한국사상의 ‘맥’으로부터 이어져 왔다. 이것은 단지 이론이나 사상일 뿐 아니라 수련으로 체화되고 문화로 향유된 흐름이다. 주로 민중에 의해 이어졌으며, 바람과 물처럼 보이지 않을 때에도 역사의 깊은 곳을 흐르다가 필요할 때면 여지없이 용솟음쳐 나왔다. 19세기 동학농민혁명이 그랬고 3·1운동이 그러했다. 촛불혁명 때도 그러했다. 인류세로 지구적 위기를 맞은 지금. 다시 풍류도와 동학을 보자. 그리고 다시 느껴보자. 나아가 창조적으로 되살려보자.
동학은 유불선(儒佛仙)과 기독교를 포함하고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무(巫)와 선(仙)을 체계화하고 문화한 것이다. 그러나 동학을 무와 선의 층과 연결하려면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그 연결고리가 ‘풍류도’이다. ‘풍류도’는 우리 고유의 사상이고 무교(巫敎, 샤머니즘)에 바탕하여 발전된 선도(仙道)라고도 한다. 이는 샤먼이었던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 고대 우리나라에서 행해졌던 제천의례, 팔관회·연등회, 마을굿에 이르기까지 흥과 신명의 장으로 이어졌다. 이 선맥(仙脈)은 다시 동학으로 이어진다.
김상일은 최제우가 구한말에 이런 선맥의 전통을 부활시켜 내는 데 성공했던 것으로 보았다. 또 “천년이 지나 고운의 27세 손인 수운 최제우는 다시 심화된 유불도와 새로 들어온 서학까지 수용하여 품격으로서의 풍류도로 다시 되먹임시켰다.”고 평가하였다. 범부 김정설 또한 수운의 동학 제창을 풍류도를 되살린 '획기적인 역사적 대사건'으로 적극 평가한다.
개벽 : 풍류도와 동학 검무의 영성적 측면
최근 생태운동 또는 대안 공동체 운동에서는 종교의례를 현대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세계관의 전환과 세계감의 전환을 체화하기 위해 워크숍이나 퍼포먼스의 형태로 현대화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 중심의 근대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고대 원주민의 의례나 수련 그리고 동양의 사상과 수련에 대한 관심이 높다. 조애나 메이시(Joanna Macy)가 불교의 사상과 수련을 중심으로 만든 ‘재연결 작업(WTR : Work That Reconnects)’이나 아리랏(Areeradh K Tri-Siddha)이 불교와 요가의 사상을 바탕으로 만든 ‘댄스만달라(DANCEmandala)’도 이런 작업 중 하나이다. 그러나 동양사상과 수행을 활용한 작업들은 동양사상과 수행에 대한 이해가 얕은 면이 있으며 그 범위도 중국과 일본, 인도, 동남아시아이거나 불교 또는 요가 철학 중심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앞서 살펴본 개벽과 살림의 말들이 가진 대안적 특성을 돌아보면 한국사상과 수련 전통이 미래 문명에 전환적 세계관과 세계감을 체화할 수 있도록 - 한국사상과 수련 전통이 미래 문명에 전환적 세계관과 세계감을 체화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것이다 본 글에서는 풍류도와 동학사상 그리고 동학 검무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동학의 수련 중에 풍류도의 수련과 연결 지을 수 있는 것은 검결(劍訣;칼노래)과 검결과 함께 추어졌던 동학 검무(劍舞;칼춤)에 잘 드러나 있다. 풍류도를 수행하는 화랑들은 신라의 국선(國仙)이었다. 이는 풍류도(화랑도) 수련이 영성적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랑들은 평상시에도 종교적 ‘수련’을 하였고 나라의 제사에는 국선으로서 천제(天祭) 즉 ‘제의(祭儀)’를 담당하였다. 또한 이런 종교적 수련과 제의는 무교적 신비체험과 선도 전통의 하늘경험 즉 ‘강령’적 특성을 보인다. 더불어 화랑들에게는 검을 통한 수련도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이런 풍류도의 수련은 영성적이면서도 검을 통해 수련했던 동학 검무(劍舞)와도 비슷하다. 동학 검무의 영성적 측면 또한 수련, 제의, 강령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러한 특징은 동학의 1차 문헌에서도 찾을 수 있다. 풍류도와 동학 검무의 연관성에 대해 최재목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검결(劍訣)」은 선교(仙敎)의 전통에서 보여지는 ‘무(武)’와 ‘무(巫)’의 합체적 요소를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예컨대 범부가 ‘화랑(花郞)’에는 「종교적 요소(巫)+예술적요소(風流)+군사적요소(武)」가 합체되어 있다고 보는 것과 맥락이 통한다.
최재목은 「검결」과 함께 추어졌던 동학 검무가 화랑의 사상이었던 풍류도와 관련이 있다는 것으로 보았다. 동학의 여러 1차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동학 검무와 「검결」은 수련의 성격을 가지고 제의적 성격을 가지며 강령이 중요한 요소였다. 동학 검무의 과정과 목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단(檀)을 설치하고 제천의식을 행하는 도중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강령 주문을 외워 강령이 되어 황홀경에 들면 나무칼을 잡고, 처음 시작할 때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일어나 칼춤을 춘다. 칼춤을 추면 한 길 이상 공중으로 솟기도 한다. 그리고 최제우는 동학 검무를 통해 개인적 치유와 신비체험뿐 아니라 당시 시대 상황의 문제였던 서구 침범에 대한 문제도 해결하고자 했다.
앞으로 이런 풍류도와 동학의 사상 그리고 동학 검무의 영성적 측면에 기초하여 서구적 근대 문명의 위기와 인류세라는 지구적 위기에 대응하는 사상과 이론 그리고 워크숍이나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가 있다.
포덕 : 동학 검무의 현대적 재창조와 적용
앞선 글에서 인류세와 지구적 위기에 대응하여 세계관과 세계감의 전환이 필요함을 이야기했다. 세계관의 전환에대한 노력으로서 동학과 한국사상을 기초로 인류세 논의를 풀어가는 학술적 노력이 있다. ‘지구인문학연구소’의 ‘지구인문학’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된 저서로는『지구적 전환』,『지구인문학의 시선』,『근현대 한국종교의 생태공공성과 지구학적 해석』등이 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세계관의 전환만으로는 부족하다. 몸으로 감각하고 문화로 체화하는 세계감의 전환이 필요하다. 풍류란 감각하고 누리는 것이다. 사상적으로는 ‘포함’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서는 것 즉 ‘포월(匍越)’하는것, ‘개벽’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풍류를 감각하고 누리며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서는 구체적 방법으로 ‘동학 검무’를 제시한다. 동학 검무를 현대적 재창조에 대한 제언을 해보고자한다. 박길수는 동학 검무를 계승하여 오늘날의 수련 행태로 정립하기 위한 과제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다양한 형태의 검무를 시행(試行), 둘째 '응용' 형태를 도입하여 확산, 셋째 교단 차원에서 검무를 공식적으로 연구하고 제도화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도 박길수의 의견에 동감한다. 박길수의 이러한 과제 제시는 동학 검무를 현대적으로 재현하고 창조적으로 계승하는데 중요한 방향이 되어줄 것이다.
또한 필자는 이에 더해 수련과 제의적 특성 그리고 강령 체험이 다루어지도록 워크숍이나 퍼포먼스 형태로 동학 검무를 재현 계승하는 것을 제안한다. 필자 또한 동학 검무를 워크숍과 퍼포먼스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지구의 몸짓’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사상과 수행 그리고 동학 검무를 포함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개발하고 있다. 또 이미 서구에서 개발된 프로그램이나 이론도 학습하고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서구사회는 산업화에 따른 지구적 문제를 먼저 겪었고 이에 따라 관련한 이론과 활동 그리고 교육이 먼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서구의 성취와 언어를 학습함과 더불어 깊이를 더해 재 발신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동안 서구인들이 동양사상과 수행을 활용하면서도 접근하지 않았던 한국의 사상과 수행도 소개하며 재 발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동학 검무를 통해서는 우리가 하늘(신성함을 모신 모든존재)로서, 한울(한+우리: 무한히 크면서도 하나인 우리)로서, 한생명으로서 존재하는 감각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개벽은 아주 크면서도 작은 영역을 다룬다. 문명의 개벽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의 개벽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둘이 아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하늘이자 ‘무궁아(無窮我)’이자 ‘한울’이다. 한사람 한사람의 개벽이 문명개벽의 시작이자 끝이다. 동학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내 한 몸 꽃이면 온 세상이 꽃이리” 개벽은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으키는 봄바람, 풍류를 타고 온다. 그 풍류의 바람이 개벽의 봄을 가져올 것이다. 마지막은 원불교 2대 종법사인 정산종사의 말로 가름한다. “풍류로써 세상을 건지리라”.
5. 포덕
이렇게 개벽, 살림, 풍류를 화두로 한국학을 풀어보았다.
‘개벽’장에서는 지금의 시대를 다시 보았다. 인류의 시선이 하늘에서 땅으로 옮겨지는, 옮겨질 수밖에 없는 지금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에 죽음과 폭력에 집중했던 감각이 평화와 공존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밝힌다. 그 과정에서 뒤엉킴이 얽힘으로 가지 못하는 한계를 말하며, 서로를 살리고 풀어내는 개벽을 제안한다.
‘살림’장에서는 기후위기에 마주해 죽어가는 우리 시대를 살릴 길을 찾아보았다. 한국의 죽임의 역사와 살림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생태와 경제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 갈등을 전환하려 생태와 경제를 살림으로 다시 번역하였다. 살림은 전환의 동학(動學)이자 동학(東學)이다. 살림은 비극 속에서 전환을 피워내는 생명과 사회의 놀라운 흐름(流)의 이름이다.
‘풍류’장에서는 풍류도와 동학 검무의 관계를 살펴보고 동학 검무의 영성적 특성을 반영한 재창조 작업을 제안하였다. 사회적 지구적 위기 등 서구중심의 근대문명에 대한 극복 방법으로 동양의 사상과 수행을 재해석한 워크숍 퍼포먼스 프로그램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서구인들이 접근하지 못했던 한국의 사상과 수행을 소개하며 재발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풍류도를 중심으로 동학 검무의 배경을 탐구하고 동학 검무의 영성적 특성을 풍류도와 연관지어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동학 검무를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는 것에 대한 제언을 하였다. 한 몸 한마음이 꽃피어서 불어오는 시대의 바람과 흐름 (풍류)을 타고, 지구적 위기의 파도를 넘어보자. 다시 개벽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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