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023.6.17

by 노마 장윤석

2023.6.17자다 깨었다.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무언가를 쓰다보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는 나를 발견한다. 너는 시선인가. 기대인가. 욕심인가. 이제는 정말로 힘을 빼고 싶은데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맥이 탁 풀려버리고 반가운 눈물이 흘러내렸으면 좋겠다. 살다보면 세상은 별 거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 내 친구, 엄마, 아빠, 우리들, 떠난 사람들, 집, 길, 밥 그렇게 평범하고도 귀한 것들. 모든 말들 앞에 기후를 놓고 살았던 지난 시공간은 미쳐있었다. 같이 미쳐있었다. 그 시공간은 지금도 종종 떠올리면 한 구석이 시큰하다. 이것은 결국 떠나기 전에는 짐작하기 어려울 마음일 것이다. 소중하다는 것만 확언할 뿐. 이 것을 글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시공간에서 비롯한 것이겠다. 그걸 은혜라고 이름 붙인다.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 미쳐있는 동안 내가 가장 놓쳤던 것이 이렇다. 고향을 등 뒤로 하고 떠나는 이들은 그 시공간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잊는다. 어쩌면 잊어야 나아갈 수 있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서는 그리워하거나, 그 그리움도 잊거나 하겠지. 어느날 스치듯이 다다른 우연한 시공간에서 다시 연결될 때 마음이 울음바다가 되겠지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걸까? 이 질문을 꺼낼 때 마음이 어떤 지 잘 살펴야 한다. 긴급과 조급은 한 치 사이고, 절실과 절망도 아주 미약한 틈새 차이고. 사람이 감각할 수 있는 시공간은 유한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도 다를 바가 없다. 비극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랑하는 이들에게 빛과 어둠의 공존을 슬기롭게 풀어갈 지혜가 길가다 발에 채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언어는 정말 그릇과 같이 담겨 있는 무언가의 모양을 결정하는 것 같다. 얼마 전 못하는 영어로 말을 해야했는데, 정성, 부탁, 진심을 뭐라고 써야 할 지 몰라서 어려웠었다. 내가 달고 사는 이 언어에서 내가 사랑하는 말들이 아주 고유한 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다른 언어에도 저마다의 컨텍스트가 있을 것이다. 모국어를 마더텅이라고 쓰는 것이 나는 좋았다. 그리고 내가 이 언어로 시작한 이상, 나는 어느 곳에 어떤 방식으로 있든지 연결되어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안정된 순환이자 굴레에 나는 자리해 있다. 왜 자꾸 허수경 시인의 말들이 생각나는 지 모르겠다. 사랑하면서 떠나는 마음을 나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정말로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혼자가 되지 않고서 같이가 될 수 없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너무나 소중한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되어 무상한 마음으로 처음부터 되돌아보고 싶다. 우리는 평생 함께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어디서 어떻게든. 먼저 떠난 수많은 사람들도, 이미 스러지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도 그렇게 곁에 있었다. 그것에 대한 믿음 없이 적어도 나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적고 나면 나는 아픈 게 틀림없다. 조금의 자존심인지 객기인지 나는 그 아픔을 너무 미워하지는 않고 나에게 찾아온 귀한 손님으로 여기고 싶은 것 같다. 어떻게 대접할까. 돌솥밥에 정갈한 미역국으로 상을 내갈까. 아쌈에서 자란 홍차가 나는 좋더라. 아픈 것에 원인을 찾는 시도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보고 싶다. 원인 같은 것은 지나가면 다 찾아지는 법이므로, 그리고 하나의 단일한 인과 관계가 사람에게 적용될 리도 없으므로. 그저 그 아픔을 풀어가는 법에,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 내가 이름붙이기로는 앎, 앓음,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 어떻게 서로 지내고 있는지를 살피고 싶은 것 같다. 그러나꺼 내가 이렇게 미쳐있고 아프지 않았다면 너를 만날 일이 없었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아름답기도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을리도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잡소리가 너무 길었다. 말이 많은 것은 나의 가장 못난 점 중 하나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 하고 싶어서 비롯된 버릇이다.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똑똑한 척하는 버릇도 비슷한 것일 것 같다. TMI다. 비대한 자아는 같이 흘려보낼 것이지 굳이 주저리 주저리 할 필요가 있을까?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 중 어떤 것을 삭제하고 어떤 것을 남기고 어떤 것을 말해야 하는 걸까. 나는 남성이 싫다. 그리고 내 안의 모든 남성적인 것들이 싫다. 그러나 내가 남성이라는 것을 부정할 도리는 없다. 결국 여기에서 나의 부조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 오래토록 미쳐있는 동안 까먹고 있던 문제를 이제 슬슬 마주해야 하는데 아직 마음에 슬픔과 한이 서려있다. 나는 언제쯤 나를 제대로 마주하게 될까. 내가 공동체의 하나로 있고 싶어서 나는 이를 대면하고 싶다. 나에게 정성어린 손길이 먼저라. 오늘 우리들을 보면서 고향집에 온 것 같아서 너무 들떴다. 동네 멍멍이 야옹이까지 인사를 하고 싶은 기분 같은 것이었다. 어쨌거나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은 우리와 함께 시작한 것이니까, 나는 이 은혜를 잊을 도리가 없다. 곳곳에서 나오는 어려움과 고민들에 미안한 마음이 앞서고, 경게에서 어중간하게 있었던 나의 치사함에 부끄러워지는 한편, 그럼에도 우리 앞의 난제를 정성으로 마주하고 대했던 친구들의 노고와 시간에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하다. 조금 아파도 뭐 괜찮은 것 같다. 자다 깨서 말이 좀 미쳤다. 귀엽게 봐주세요는 투머치고 그간의 우정으로 양해를 구한다. 아 나는 사족이 참 길다.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평안 정도겠다. 정성과 평화룰 담아, 윤석, 성화.

작가의 이전글꽃피는학교: 앓음, 앎, 아름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