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6~7.17

나의 할머니 박정순

by 노마 장윤석

2023.7.6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씻고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었다. 할머니가 생의 대부분을 살았던 수원 화성으로 가고있다. 조모상, 이라고 하는데 낱말이 와 이리 생경할까. 굳이.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언젠가 시간이 나면 할머니가 살아온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다. 시간은 핑계일 것이다. 아빠의 엄마, 아빠는 지금 엄마를 잃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 나이가 든다는것은 이렇게 어려운 일들을 더욱 자주 느끼게 된다는 걸까. 조금 졸리다. 자고 일어나면 비몽사몽한 채 꿈과 현실을 분간하


2023.7.8

장례를 마쳤다. 한 사람, 한 생이라는 것은 실로 엄청나다 싶었다. 일에 치여 마음을 돌보지 못하는 것을 걱정한다. 눈물, 슬픔, 다정함, 미안해요,


2023.7.11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다음에 어떤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정말 생과 사를 가르는 어떤 지점에 서면 그 이전의 모든 것이 부질없개 느껴진다. 삼일간의 장례식, 그리고 삼일간 뭔가를 하는 둥 마는 둥 손에 잡히지가 않고 그저 멍하니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남은 생이 있는 나는 어째야할까. 옛날에 부모가 죽으면 3년상을 치르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우리는 그에 비해면 참 야박하고 멎쩍고 그런지도 모르겠다. 회사에 출근해야 하고, 마감을 끝내야 하고, 밀린 연락을 받고 걸어야 하고 등등. 1929년에 태어난 나의 할머니 박정순은 일제강점기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갓 시집와서 6.25전쟁을 겪었으며 이른 나이에 남편과 사별을 했고, 큰 딸을 사고로 잃었고 큰 아들이 어린 자식 둘을 남겨놓고 죽었다. 그 속에서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을 때까지 농사를 지었다. 할머니는 그 삶을 어떻게 지나온걸까. 내가 사는 시대의 눈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역사책 속 이야기들 한복판에서 살아온 사람. 나의 핏줄 한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 할머니는 나에게 어떤 사람아었을까. 아버지의 아버지, 조부는 아버지가 어릴 적에 돌아가셨고, 어머니의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고 몇 달 뒤에, 어머니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뒤 몇 년 새 돌아가셨다. 나에게 유일했던 조부모였라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비교할 대상이 없다. 사랑과 정이 넘치는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도 조건이 없는.


2023.7.12.

마음이 다치기 싫어 쓴다. 또다시 반복되었다. 이것에는 두 가지의 배경 혹은 원인이 있다. 첫 번째로 나는 가닥도 갈피도 못 잡고 있다. 그러므로 계속 혼란하며 부유하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흐리고 정신이 경황 없어질 무렵에 점점 더 그냥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그런 느낌 같다. 게임 중독인 까닭이다. 마음을 그렇게 버리지 말자. 상처를 그렇게 입지 말자. 나를 그렇게 상처입게 두지 말고 나에게 찾아오는 닥친 일들을 만나자.


2023.7.13.

이렇게 마음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아침에는 늘 이유를 알 수 없이 괴로워했고,g hsfksgks akdmaemfd 혼란한 마음들을 살피는 듯, 살피지 않는 듯 마냥 그냥 지나왔다.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그대로 몸을 내맡겨보려고 한다. 그냥 편하게. 편하게. 숨을 쉬듯이 숨을 쉬듯이. 죽음이라는 게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나에게는 남에게 적당히? 잘 보이는 어떤 공 사를 나누는 선이라는 게 없는 것 같다. 끊어진 것마냥 그런 생각 못하고 다 흐리멍텅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가진다. 그게 나의 고민이다. 장단점. 늘 함께 있는 장담점. 뭘 써야한다는 것을 버리고 그냥 풀어내듯이 쓰자. 뭔가를 써야 한다는 생각을 전부 갖다 버리자. 그리고 내가 되자. 그냥 편안한 내가 되자. 그러면 비로소 조금 나아질지도 모르갰다. 깊이 들어가려는 것이 인위적이면 깊이 들어갈 수 없다.


2023.7.17.

짧은 휴가를 다녀왔다. 이렇게 돌아온 게 못내 아쉽다. 건강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었다. 비가 소름끼치도록 내렸고 이 부분이 못내 아리는 것은 사실이다. 건너 건너면 아는 사람이 섞여있는데 참 이 나라가 좁아서 한 다리 두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일텐데. 알고 모르고를 떠나 닥친 비극들은 늘 공기를 무겁게 한다. 할머니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 아주 간간이 생각을 하는데 도무지 짐작이 되지가 않는다. 나보다 70여년을 오래 사신 할머니. 그 날 장례식장에서 나는 세상 모든 걸 잃었던 것 마냥 울었었다만 벌써 까마득하다. 딱 일주일이 그렇게 지났다. 고작 일주일밖에 안 지났는데 체감은 한 달은 넘었다. 정신적으로 저번 주의 밀도가 낯설다. 감도 안 잡히게 부유하고 했던 것 같다. 감당할 수 있는 크기를 지나치고 벗어나서 등. 뭔가를 쓰려고 끄적여도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냥 쓰기가 부담스러웠다. 지금도 나는 내 상태를 모르고, 앞으로의 내 상태도 모른다. 다시 일을 시작했다, 정도만 내가 알 수 있는 한 부분이지만. 그 정도만 내가 알 수 있는 부분이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알고 있을까.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읽고 있다. 세 번째 읽는데. 가만보면 처음 아마도 제작년 2021년의 겨울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봤던 것 같은데. 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만큼 혼란스러웠다가, 다시 아니었다가 한다. 그래도 일상은 계속되니까. 사람이 죽어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단순한 사실, 오래된 사실. 할머니의 장지에 찾아온 할머니의 친구들이 생각난다. 친구라기에는 치고박고 많이 한 분들도 계실테지만. 잘 걷지 못하는 다리를 떨며 울며 절을 하셨다. 꼬깃꼬깃한 돈을 흙묻은 봉투에 넣고 삐뚤삐뚤한 글씨로 용소리 누구누구 적었다. 그 할머니들은 당신 차례를 생각하지 않으실 수 없었을 것 같다. 나이가 들어, 아주 많이 들어서 죽는다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호상인데 호상이라는 것은 없기도 하다. 비극이 짙은 삶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한국의 근현대사를 거쳐온 노인 중에 애환 없는 이가 누가 있을까. 우리 시대에 팽배한 노인에 대한 불신이 안타깝다. 이상한 말이지만 정치적으로 과하게 한들이 얽혀있다. 진중하고 분명한 정치는 부재하고. 남도의 낡은 한옥을 고쳐서 거미들과 모기들과 개와 고양이와 사는 집에 있으면서, 내 말년 혹은 중년을 생각했다. 아마도 군대든 감방이든 어디서든 다녀오고 나면 나는 어느 한적한 곳을 찾아갈 지도 모르겠다. 할머니가 살았던 100년이 다 되어가는 집도 이제 향방을 잃는다. 나름 마을에서 가장 낡은 붉은색 기와가 올라가 있는데. 아버지는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꿈을 내려놓았다. 나에게나 시골이 낭만있지 아버지한테는 힘겨운 유년시절을 소환하는 곳이다. 그리고 내 피는 못 속여서 아버지는 유랑하는 삶을 꿈꾼다. 늙어가기를, 성숙하기를 두려워하는 아버지가 나는 괜한 걱정이 된다. 장례식장에서 펑펑 못 울고 집에 와서 닭똥같은 눈물 흘리며 자기 감정이 이상하다는 아버지가 가여웠다.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 나도 그렇게 감정이 꼬여버린 아버지와 다를바가 없다. 증조할머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할아버지 등 내가 생전 얼굴을 제대로 본 적 없는 이들이 삶에 와서 아른거린다. 조상이라는 주제가 특히 더 그렇다. 일을 하러 가야할 시간이다. 나에게는 내 주위와 내 삶이 있다. 내가 제대로 애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라도 뭔가 말들을 터져내지 않고서는 내일을 못 살아갈 것 같다. 옛 사람들이 왜 3년 장씩 했는지를 알 것 같다. 사람의 자연스러운 마음의 속도라는 게 있을테니까.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 빠르다. 위기도 빠르고 일상도 빠르고 대응도 긴급하다. 그게 주는 정신착란 외 부조화가 있다. 백 년을 산 생의 시야로 지금을 보면 어때야할까.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후손이자 조상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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