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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Feb 26. 2024

시간은 중요하지 않아. 오직 생명만이 중요하다

『탈성장을 상상하라』 서평

우리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이하 생지연)은 주체성이 흘러넘쳐서 늘 읽는 것보다 더 많은 글들이 올라온다. 『탈성장을 상상하라』 책도 그중 한 권으로 ‘탈성장’을 키워드로 꾸린 첫 책이라 설렘을 안고 쟁여놨었다. 이 책을 일 년 좀 안 되게 묵혀놨다가 이어지는 탈성장 책을 쓰고 만들면서 이제야 읽어나간다.     


최근 몇 년 사이 탈성장에 관한 여러 번역서(『적을수록 풍요롭다』, 『디그로쓰』, 『미래는 탈성장』)가 반짝반짝 등장하며 트렌드의 신호를 주고 있다. 그런데 실은 『탈성장 개념어 사전(그물코, 2018)』이 나오기 이전에 한국에서 탈성장에 관한 책은 세르주 라투슈의 번역서 몇 권을 제하면 없다시피 했다. 그만큼 『탈성장 개념어 사전』은 각별한 책인데, 수십 명의 저자가 탈성장의 다채로운 가능성을 52개의 키워드로 연결해 선보이는 넓은 고원의 광활함을 느낄 수 있다. 처음 생지연에서 이 책을 옹기종기 읽으며 신승철 선생님이 “우리도 언젠가 이런 책을 같이 써야지요.”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꿈이 이뤄져 꾸려진 책을 집어드니 감회가 새롭다. 나아가 삼 년 전『탈성장 개념어 사전』의 필자들이 중심이 되어 바르셀로나를 거점으로 탈성장 대학을 만들어낸 것을 상기하면, 생태전환대학 설립을 논하고 있는 ‘지금, 여기’의 생지연에 있는 힘과 가능성을 기쁘게 살피게 된다.  


이 책의 강점은 뭐니 뭐니 해도 다채로움이다. 탈성장이 지닌 가능성의 대표 주자는 다양성인 것 같다. 탈성장과 토지개혁, 대안 화폐, 사회적 금융, 데팡스와 리추얼, 농업, 기술, 협동조합, 교육, 영성, 순환공동체 등의 낱말이 날줄 씨줄을 오가며 실뜨기를 하고 있다. 탈성장의 대안 경제 구조와 사회 전략을 읽으며 머리가 뜨거워지다가, 일상에서의 탈성장 이야기를 읽으며 여러 상상을 그려보다가, 영성으로 돌아와 경건하게 책을 잠시 덮고 눈을 감았다. 모든 저자의 글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한가득 이지만, 오늘은 이 다양성 자체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다채로움의 이면에, 남은 아쉬움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자. 경제부터 사회와 미래, 영성까지 가로지르는 스물한 꼭지의 각양각색 글들이 자칫하면 중구난방으로 읽히지 않을까 고민이 남았다. 탈성장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드는 답답함과 막막함이 어김없이 일어났는데 이 감정에는 이유가 있다. 내게 탈성장에 대한 뚜렷하고 분명한 청사진과 로드맵과 시나리오와 전략에 대한 기대와 갈망이 커서 그렇다. 사람들이 탈성장하면 “팬티 벗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식의 오해를 하는 것도 답답하고, 마치 마법의 단어인 양 모든 곳에 붙여 쓰지만 “탈성장이 그래서 뭘 하자는 거야?”하는 질문에는 속수무책인 것도 막막하다. 우리에게 긴급한 건 뚜렷하고, 체계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 아닐까. 이 질문에 고개를 저을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과연 시간에 쫓기는 마음으로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까.


책에서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무른 문장이 있다. “시간은 중요하지 않아. 오직 생명만이 중요하다(288, 영화 「제5원소(뤽 베송)」 재인용).” 탈성장은 그 목적만큼이나 과정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낱말이다. 기후위기를 깨달은 이후에, 우리 뇌리에 박힌 1.5도의 모래시계는 우리를 쉽게 울적하고 초조하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탈성장을 외치는 우리 중 다수는 생명을 깎아내는 듯이 바쁘고 초조하게 갈아 넣으며 살아간다. 『탈성장 개념어 사전』을 읽던 5년 전에는 1.5도까지 7년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새해를 맞아 1.5도가 지났다는 뉴스를 듣는다. 지구가 시한부 판정을 받더라도,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기다린다. 기후위기의 긴급함 속에서 우리가 상기할 것은 오직 생명만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아닐까.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그 위치성을 자각하고 공간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신승철 선생님은 서문에 “더욱이 탈성장은 아직 현실태가 아닌 잠재태이고 우리가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접속이 가능하다(4).”고 썼다. 인정하자. 우리는 아직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탈(脫), 벗어나자는 구호 이상으로 상상하고 그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절망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이데올로기보다 힘이 세다”는 도나 해러웨이의 문장을 좋아한다. 이론과 담론의 중요성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구성하는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라는 번역 혹은 통역 구조를 갖춰야하기 때문이다.


조급할 것 없다. 탈성장 관련 소식들을 팔로우 하다 보면 곳곳에서 추상적인 담론에서 구체적인 전략과 운동의 차원으로 성숙해가고 있는 징후가 읽힌다. 약 반세기 전, 70년도에 시작된 성장의 한계에 대한 여러 층위의 지적들이 당시에는 콧방귀도 안 뀔 망언으로 치부되었는데 지금은 기정사실이자 귀 기울여야 할 금언이 되어있다. 물론 우리가 잠재태인 탈성장을 현실태로 만들기 위해서 가야 할 길이 꽤 남은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그 길은 홀로 걸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탈성장 이야기들이 우후죽순 나오고 이들의 연결망이 차츰차츰 얽혀서 보다 촘촘해지면, 해상도가 높아져 탈성장에 대한 전망, 전략, 비전, 시나리오, 로드맵이 이어질 수 있을 거다. 이미 그러고도 있고.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니 이데올로기가 구성되기까지는 금방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책이 쓰여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신승철 선생님은 서문에서 저자들(조합원이자 연구원이자 구성원들)에게 이렇게 헌사를 썼다. “저자들은 ‘어느 시간, 어느 장소, 우리 중 어느 누군가’라는 꿈 이야기 구조로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한계로부터 도약하여 용감하게 운을 떼고, 색다른 주체성을 상상하고, 새로운 전환사회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5).” 주저하지 않았다는 마지막 문장에 눈길이 계속 머무른다. 이런 서문을 내가 받았다면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


실은 이 책의 다음 책으로 구성된 ‘2030 탈성장의 징후’ 책에서 그럴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작년에 선생님이 돌아가시며 책도 풍랑 속에 갈피를 잃고 난항을 겪었다. 2024년의 트렌드로 탈성장을 제시하는 책의 취지상 해가 넘어가기 전에 나와야 했지만, 어디 계획대로 되면 그게 인생이던가. 새해를 맞아 필진들 중에서 자원하여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나타나고, 새 마음으로 제목과 목차도 같이 지어가며 순항에 들어섰다. 생각하면 탈성장을 향해 가는 과정 자체가 탈성장의 항해 같다. 이 항해 속에서 “시간은 중요하지 않아. 오직 생명만이 중요하다.”는 문장이 왜 이리 마음에 와닿는지. 다음 서평은 곧 선보일 새 책 『탈성장들(가제, 조만간 출시)』로 찾아뵙겠다. 많관부, 많은 관심과 기대를 부탁드린다.


*이 글은 생태적지혜연구소 미디어에 2월 26일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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