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를 만드는 개미

랩 걸(Lap Girl) - 호프 자런(Hope Jahren)

by 노마 장윤석

오래간만에 여운이 가시지 않는 책을 만났다. 만나게 된 연유는 부끄럽지만 책이 '예뻐서'였다. (알라딘 사은품도 탐났고) 인문-사회계 책만 편식하지 말고 고루고루 읽자는 명분 아래 충동구매 해버렸지만, 뚜렷한 목적 없이 구매한 책이 읽힐 리가 없었다. 사은품만 챙긴 채 몇 개월 숙성시킨 후 - 방치의 다른 말 - 한가해진 작금에 책장속에서 구출되었다.

한 5년 만에 읽는 '과학책'이려나. 지금은 철학·문학·사회를공부하는 문과문과한 나지만 5년 전만 해도 진지하게 과학자를 꿈꾸고 있었다. 중학생 때 다른 건 몰라도 과학만큼은 한자리 수 안에 들었고, 고등학생 때도 이과를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아직도 이과냐 문과냐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게 했던 교육제도에 원망이 가득 차있다. 나는 문과를 선택했고 불가피하게 과학을 포기했다. 지금 와 하는 말이지만, 학문의 경계는 이과, 문과로 그리 쉽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과학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혹은 철학적인 것'은 둘 중 하나만 함양하기에는 둘 다 너무 중요하다. 아직도 우리의 학교는 이과문과 나누기에 한창이라니, 애석함을 감출 수 없다. 지금은 양성자와 중성자도 헷갈리는 과학 몽총이가 되어버렸지만 나에게는 과학에 대한 동경이 흐릿하게 남아있다.

1526609955367.jpg 저자 호프 자런

호프 자런(Hope Jahren)은 나의 과학에 대한 갈증을 해박한 전문성으로 채워주면서도,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책을 읽는 내내 감동을 선사한 보기 드문 과학자였다. 뻣뻣한 과학 논문을 읽다가 피곤해지면 장 주네의 소설을 집어 든다니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랩 걸(Lap Girl)은 '뿌리와 이파리', '나무와 옹이', '꽃과 열매' 세 챕터로 나누어 자런의 인생을 담은 에세이 자서전이다. 식물학자인 그녀는 자신이 인생의 대부분을 연구하고 바친 나무에 빗대어 자신의 인생을 소개한다. 학교를 마치고, 연구를 하고, 친구를 얻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자식을 키우는 그 모든 과정이 나무의 삶과 어우러져 책을 장식한다. 자칫 평범할 수 있는 인생사가 특별해질 수 있는 까닭은 그녀가 사용하는 언어에 있다. 과학자라 가능하지만, 대개의 과학자가 하지 않는 자런만이 가능한 언어다.


"그러나 다 자란 단풍나무가 자손들에게 제공하는 한 가지 믿을 만한 부모의 사랑이 있다. 매일 밤 자원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자원인 물을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길어 올려 약한 어린 나무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하루 더 버틸 힘을 얻는다. 어린 나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이 물 뿐만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고, 100년 후에도 그 자리를 지키는 나무가 단풍나무이려면 이 어린 나무들이 얻을 수 있는 도움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어떤 부모도 자식들의 삶을 완벽하게 만들어질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돕는다." -329p


아이였던 자런이 커가는 과정을 독자로서 지켜보는 것은, 마치 포켓몬을 키워 떠나보내는 것 같은 - 비유 상태가? - 기분이었다. 처음의 꾀죄죄한 실험실에서 번듯한 하와이의 첨단 실험실까지의 과정이 책 400p에 걸쳐 진행된다. 지우가 피카츄를 얻듯, 자런도 평생의 동료 '빌'과 만나고 그들의 플라토닉한 우정은 보는 내내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이 책도 빌이 써달라 부탁해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의 부드러운 은유와 문학적 표현들, 드라마 시트콤을 보는 듯 재밌는 서사도 좋지만,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그녀가 가진 '과학자'로서의 태도다. 하루 종일 실험실에 틀어박혀 질량분석기를 돌리고 약품을 만지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녀는 삶 전반에 걸쳐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어렸을 적의 호기심, 젊을 때의 과학이 지니는 새로운 시각, 중년기의 관성을 넘어 이 광활한 우주 가운데서 나무의 배아를 배양하고 연구하는 것이 무슨 가치를 지니는지 그녀는 고민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장 종교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젊었을 때는 종교 타도에 열정을 불태웠던 '과학자'들이 인생의 후반기에 가서는 너도나도 신을 믿기 시작한다는 그런 이야기. 처음에는 음? 하고 의아해했지만 나이 든 천체물리학자의 인터뷰를 보고 나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평생을 바쳐 우주를 연구했지만, 지구에 존재했던 그 어떤 사람보다 우주에 대해 잘 알지만, 우주의 크기와 광활함과 원리와 방식 그 모든 것에 대해 개미만큼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고.

자런은 스스로를 개미에 비유한다. 그녀가 이전에는 단풍나무며 버드나무를 이야기했기에 어떤 나무가 나오려나 궁금해했지만 그녀가 꺼내 든 것은 '개미'였다.


"과학은 일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또 하루가 밝고, 다음 주가 되고, 다음 달이 되는 동안 내내 일을 할 것이다. 나는 숲과 푸르른 세상 위의 빛나는 어제와 같은 밝은 태양의 따사로움을 느끼지만 마음속 깊이에서는 내가 식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오히려 개미에 가깝다. 단 한 개의 죽은 침엽수 이파리를 하나하나 찾아서 등에 지고 숲을 건더 거대한 더미에 보태는 개미 말이다. 그 더미는 너무도 커서 내가 상상력을 아무리 펼쳐도 작은 한구석밖에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하다.

과학자로서 나는 정말 개미에 불과하다. 다른 개미들과 전혀 다르지 않고, 미흡하지만 보기보다 강하고, 나보다 훨씬 큰 무엇인가의 일부라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는 함께 우리의 손주들의 손주들의 경외감을 느낄 무엇인가를 건설하고 있고, 그것을 건설하는 동안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남긴 투박한 지시사항을 날마다 들여다본다. 과학계를 이루는 작지만 살아 있는 부품으로써 나는 어둠 속에서 홀로 앉아 수없는 밤들을 지새웠다. 내 금속 촛불을 태우면서, 그리고 아린 가슴으로 낯선 세상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오랜 세월을 탐색하며 빚어진 소중한 비밀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누구나 그렇듯 나도 누구에겐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염원을 품고 있었다. " - 398p, 마지막 페이지


세상이 때로는 너무 커서 나라는 작은 존재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회의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나라는 존재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은 내가 살아갈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무기력해지기 일수다. 나도 가끔 내가 이것저것을 공부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노라 노력한다 해서 무엇이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답답할 때가 많다.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있다. 특히나 학자로서의 삶을 마음먹고 살아가면서 나의 무지와 게으름에 대비되는 한 아름의 세상은 광활하고 두렵게 느껴졌다. 내가 온갖 별짓을 다해도 '바꿀 수' 없겠구나 하는 처절한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을 무렵 자련의 글을 읽고 기운이 다시 생겼다.

얼굴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들과, 얼굴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손주들의 흐름을 상상하면서, 괜스레 위안을 얻어 마음이 평온해졌다. 자신을 개미로 받아들이는 것, 지구에 수없이 등장했다 사라지는 '보통의 존재'로 인정한다는 것이 그녀의 메시지일 테다.


"우리 모두 일하며 평생을 보내지만 끝까지 하는 일에 정말로 통달하지도, 끝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좀 비극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대신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 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우리의 비커와 온도계와 접지봉을 관리할 것이다." -272p


징검다리를 만드는 개미가 되어야겠다.




P.S 그녀는 에필로그에서 '세상이 조용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말한다. 인류 문명은 4억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생명체를 식량, 의약품, 목재 단 세 가지로 분류해버렸고 이에 대한 집착은 끊임없이 증가하여 식물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이 속도라면 600년 후에는 모든 나무가 그루터기만 남는다니, 징검다리를 만들 새도 없겠다. 그녀의 부탁은 가볍다. 한 해에 나무 한 그루씩만 심자. 이것이 어렵다면 나무를 뽑는 사람이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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