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국제다큐영화제 / 죽음을 경작하는 사람들 - 페르난도 E. 솔라리스
<죽음을 경작하는 사람들>은 아르헨티나의 농업과 환경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이번 DMZ 국제다큐영화제에서 '마스터클래스(번역 : 거장의 초청 강연)'으로 선정된 페르난도 E. 솔라리스 감독의 작품이다. 그는 몇 편의 극영화를 성공시켰지만 다시 '다큐'라는 장르로 돌아와 80세라는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두 발로 뛰며 사회 저변의 고발에 앞장서고 있다.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기대를 안고 본 작품이다.
제목을 참 잘 지었다. '죽음을 경작하는 사람들', 죽음을 경작한다는 문구가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경작은 보통 생존을 , 삶을 위한 무언가를 키울 때 쓰는 말이지 않는가. 하지만 감독은 다큐를 통해 우리가 키우고 있는 저 식물이 삶을 위한 것인지, 죽음을 위한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 질문보다는 외침에 가까우리라. "지금 우리는 죽음을 위한 식물을 키워내고 있다"고.
다큐의 개괄은 DMZ다큐영화제 소개글을 빌려왔다.「다국적 기업들이 개입된 ‘콩’ 생산의 확충을 빌미로 산림을 포함한 땅이 파괴되고, 일할 곳이 없어진 농부들은 정든 곳을 떠난다. 유전자 변형 작물의 생산에 화학물질 등의 독소가 투입되면서 환경 제반에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물과 공기 등의 환경 문제로 중독된 사람들은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농산물 특허권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다국적 기업은 권력자들과 연계해 어떤 저항에도 끄떡하지 않는데, 미디어조차 이런 문제를 논하지 않는 게 아르헨티나의 현실이다.」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몬산토가 개새끼라는 - 다소 과격하지만 자명한 - 결론이 나온다. 몬산토를 필두로 한 다국적 대기업들의 수법은 무척 교활하다. 먼저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유전자 이식 품종을 만들어 특허를 확보한 후, 무료 배포한다. 아르헨티나를 장악한 콩 모종의 경우에는 라운드업 레디(Roundup-ready) 작물로 자사의 라운드업(Roundup - 글리포세이트를 주 성분으로 한 제초제)에 내성을 가지고 있다. 즉, 몬산토의 모종을 심고 몬산토의 농약을 뿌리면 모종을 제외한 모든 잡초와 해충이 죽는다. 따라서 라운드업 레디 콩을 경작하기 위해서는 초강력 제초제 '라운드 업'을 필수적으로 구매하게 되고, 몬산토는 모종을 무료로 배포했지만 결코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며 GMO 작물 배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최종적으로는 나라 전부를 콩밭으로 만들어버린다.
몬산토의 작전은 원숭이 꽃신 이야기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처음에는 꽃신을 그냥 준다. 원숭이는 신나 하며 꽃신을 신고 더 이상 맨발로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리지만, 두 번째 꽃신부터는 가격이 올라 원숭이는 울며 겨쟈 먹기로 꽃신을 살 수밖에 없다. 몬산토도 마찬가지다. 몬산토의 씨앗은 재파종이 불가능하다. 『죽음의 밥상 GMO』의 한 구절을 빌리자면, '악랄한 몬산토는 작물을 수확 후 파종할 때 농부가 보관해둔 씨앗을 심으면 찾아내어 고소한다. 수확한 씨앗으로 재파종을 금지시킨 악랄한 기업'이다.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하다. 하이브리드 씨앗의 경우에는 F2(다음 세대)의 형질이 나빠 재파종을 할 수 없고, 몬산토의 특허 중 하나인 터미네이터 씨앗(Terminator seed)은 씨앗의 씨눈을 죽여 재파종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 생물학적 특허권은 점점 가격이 오르고, 농부들은 점점 가난해지다가 마침내는 자살까지 이르른다. 인도의 종자주권 운동 나브다니야의 <자살의 씨앗 Seed of suicide> 보고서에 따르면 인도의(그리고 전 세계의) 농민 자살이 시장 자유화 정책 - 그중에서도 종자 산업 - 에 따른 참담한 결과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의 농업사회에서 농민들의 다양한 선택으로 이루어진 종자 다양성은 이렇게 종말을 맞는다. 기존의 많은 품이 들었던 농업이 GMO + 농기계 + 제초제 & 살충제 농업으로 대체되며 농민들은 일자리를 잃는다. 그나마 남은 농민들은 종자 값과 제초제 값에 치이고 결국은 설 자리를 잃는다. 몬산토와 같은 악질 기업이 인간의 탈을 쓴 누군가로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은 암담하게만 느껴진다.
생물학적 특허권, 유전자에 주인이 있다는 말은 이상하게만 느껴진다. 유전자가 우리의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잠깐 화분 하나를 가졌다고 해서 내가 그 식물과 그 식물이 가진 가능태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일까? 잠시 왔다 갈 뿐인 인간의 오만한 생각이지 않은가. 특허를 미시적으로 부여할 경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각종 착취는 가려진다. 다큐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특허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만 죽어나간다.
질을 양으로 대체하는 '생산적인' 사고방식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학 논리에서, 특히 '생산성'개념에서 두드러진다. 생산성이란 일정한 면적에서 어떤 투입 대비 산출량으로 계산된다. 예를 들어, 1헥타르의 토지에 세 명의 인부와 농기계와 제초제 비용 100만 원을 들여 옥수수 10톤을 산출했다는 식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지금의 산업농은 이 계산에 따라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라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다큐를 본 후 이는 '가짜' 생산성이고 '가짜' 효율성이라는 생각이 명확하게 자리 잡았다. 위의 계산법에는 고려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다. 산림파괴로 삶의 터를 잃은 원주민과, 농약의 독성으로 죽은 사람들의 몫숨 값, 불임 - 난임과 증폭된 기형율로 세상의 빛조차 보지 못한 생명들까지 저 계산법에는 어느 하나 들어있지 않다. 감상적(?)이라는 비판을 방지하기 위해 반다니 시바의 지론을 덧붙이자면, 단위 면적당 수확량으로 계산되는 지금의 생산성 개념은 영양학적으로 따져볼 때 '비생산적'이다. 단위 면적당 영양분으로 계산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먹고 있는 언뜻 튼실해 보이는 작물이, 영양학적으로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는 말과 같다. 『이 세계의 식탁을 차리는 이는 누구인가?(반다니 시바)』
다큐 속의 인물들이 기억에 남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두 가지 있어요. 시간과 정성이에요." 잘린 고목을 바라보며 이제는 터전을 잃어버린 농부의 말이다. 농약과 기형의 상관관계를 밝혀낸 한 과학자는 "과학이 사회 아닌 시장의 요구를 들어주면 안 됩니다. 지금의 과학은 권력의 하인입니다."라며 학계서 큰소리로 외쳤다. 그중에서도 한 시골학교 교장선생님의 인터뷰는 유독 기억에 남았다. 강한 어조로 비행기가 머리 바로 위에서 농약을 뿌리고 학생들도 하나 둘 떠나간 이야기를 하던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울먹거리며 "끔찍하게 무기력하고 고립된 것처럼 느껴져요."라 말하는데 그 심정이 이상하리만큼 공감이 가 울컥했다. 이들은 이처럼 절박하게 몬산토와 그들이 불러일으킨 재앙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나를 비롯 내 주위의 사람들은 조금의 절박함과도 무관한 것 같아 괴리감이 들었다.
'죽음을 경작하는 사람들'은 페르난도 감독의 성찰기와도 같은 다큐다. 페르난도 감독은 처음에는 "설마요!", "세상에." 같은 감탄사를 내뱉는, 비극을 관람하는 관람객의 위치에 있었다. 애도하고, 안타까워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런데 다큐의 중반 즈음 한 과학자가 채혈 분석을 권유하고, 페르난도 감독은 의아한 표정으로 검사를 수락한다. 그의 혈액에서는 앞서 말한 몬산토의 '라운드 업'제초제의 주 성분 '글리포세이트'가 위험 수준으로 검출됐다. 당장 입원하지는 않더라도 추후 있을 수많은 잠재적 질병의 가능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연구원의 담담한 설명에 페르난도 감독은 망연자실 그 자체다.
다큐의 후반부는 비극을 물리칠 희망을 찾아 떠나는 페르난도 감독의 모습을 담는다. 국제녹색당 정치인, 생태농업 농부, 유기농 라디오 DJ 등 골리앗에 맞서 싸우는 수많은 다윗이 있다. 그중에서도 젊은 의대생들이 참 멋지다. 앞서 언급한 - 농약과 기형의 상관관계를 밝혀낸 - 과학자의 지휘 아래 수많은 의학 대학원생들이 자료를 수집해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마을 사람들을 검진해 그들의 건강을 챙긴다. 무척 고되고도 방대한 작업이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그들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의사'의 사명감이 참 멋있었다.
다큐를 보고 나서 한동안 이상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물론 다큐에서는 대안을 찾는 사람들도 보여주었고, 이에 고무되는 면이 없진 않지만, 안타깝게도 이 근본적인 무력감을 달래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어떤 기반부터 잘못된 무언가를, 구조를 어떻게 바꾸어나갈 것인지 머리에 명확히 잡히지 않는다. 몬산토를 비롯 거대한 '무언가'와 싸워나갈 자신이 전혀 없다 해야하나.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 앞에 나는 무력해질 수밖에.
그래도 나아갈 길이 분명하게 그려진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는다. 다국적 기업은 우리의 건강과 지구의 활력을 담보로 이윤을 얻고 있고, 수천 년에 걸쳐 우리가 얻어 온 지혜를 훼손하고 있다. GMO 작물은 설령 그 자체가 '무해하다'할 지라도 GMO 작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회 저변의 일들이 그것이 '무해할'수 없음을 시사한다. 무력감에서 헤어나오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물으려 한다. 우리가 무엇을 경작하고 있는지 말이다. 우리가 경작하는 것이 삶이 아닌 죽음이라면 나는 기꺼이 반대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