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7.
나너우리영활학앓음앎아름다움, 이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따라오다 보면 이런 질문이 들 것 같다. 왜 이런 여정을 떠나온 걸까. 어째서? 만족할 만한 답을 할 자신은 없다. 누군가의 생에 이유가 있을까. 물론 어떤 소명이나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왜 사는가 물으면 그저 웃지요’라는 말이 훨씬 좋다. 왜인지를 끊임없이 묻다 보면 문답의 순환고리에 빠지게 된다. 이를테면 왜 오늘은 눈이 내렸을까. 겨울이 와서. 그렇다면 왜 겨울이 왔을까. 지구가 자전축이 기울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구는 왜 자전하는가. 지구가 46억 년 전 생겨났을 때 있던 충돌 때문에. 그렇다면 왜 충돌이 있었을까. 우주가 탄생할 때 생긴 폭발 때문에. 어쩌면 많은 질문들이 도착하는 목적지는 꽤 엇비슷하게 우주의 탄생으로 도달할지도 모른다. 물론 딴 길로 샐 수도 있겠지만 돌고 돌다 보면 같은 답에 도달할 것 같다. 설령 그것을 신 혹은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로 부르더라도. 그래서 무언가에 이유는 늘 있는 법이지만, 동시에 무언가에만 특정된 고유한 이유는 없기도 하다. 도는 있기도 하지만 그 이름을 짓는 순간 없기도 하다(노자 도가도비상도).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로 쪼개고 쪼개었을 때 거기에는 무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양자역학 양자중첩). 이유의 유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유를 찾아가는 ‘끝없는 이야기’ - 미하엘 엔데가 쓰고 허수경 시인이 번역한 동명의 아름다운 소설이 있다 - 에 있겠다. 이 파도가 어디로 흘러갈지는 모르지만, 그 파도의 다채로움과 순환고리를 탐색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목적지는 모르나 과정이 의미 있다. 즉, 이유는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하다. 눈 나린 오늘이 꽤나 예뻤다는 말이다.
서두에 밝혔듯이 이 글들에 두서는 없다. 순서가 없어서 그렇다. 보통 종이에 글자를 쓰는 행위를 글쓰기라고 보는 것 같다. - 하지만 이 또한 우리가 빠져있는 착시인 것이 우리는 더 이상 종이에 글을 쓰지 않는다. 이 글도 노트북으로 썼는 걸 - 무슨 말이냐면, 이런 말이다. 원에 시작 지점이 있을까? 우리는 글을 읽을 때 1페이지 2페이지 이런 식으로 네모 반듯한 종이가 차곡차곡 쌓여서 이뤄지는 ‘책’을 (무의식적으로) 기대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차곡차곡 이어지는 언어의 춤사위를 기대하고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어느 날 누군가의 변덕으로 ‘책 제작과 글쓰기 관한 특별법’ 같은 게 만들어져 – 더 해괴한 변덕도 보는데 이 정도야 - 더 이상 네모 반듯한 종이로 책을 만들 수 없고 페이지 넘김도 없어졌다고 해보자. 그래서 출판인들이 고민 끝에 정말 큰 원형의 종이에다가 글을 쓰기로 했다고 해보자. 그럼 그동안 습관과 타성에 젖어있는 모든 글쟁이들은 패닉에 빠질 것이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일까? 어떤 순서로 어떤 방식으로 글을 써야 하는 걸까! 네모와 직선의 세상에 원과 곡선들이 일으킨 반란! 하나의 예시지만 이 글은 그 반란을 지지한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나너우리영활학앓음앎아름다움에 순서가 없다는 말이다. 이 연재기에 두서가 없음을 용서하길 바라며 애써 짜낸 변명이 아니라는 못하겠지만. 여하튼 앓음나영앎너활아름다움우리학 이렇게 읽어도 상관이 없다. 시작과 끝이 있으면 참 편하지만, 사실 살다 보면 생명의 복잡성 탓에 시작과 끝은 편의상의 설정과 구획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 나오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끝 어쩌고 해서 놀랐을 수 있지만 난 모른다. 어렸을 때 종종 그랬듯이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 같은 유치한 돌림노래는 아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지만,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는 엄청난 진리에 입각한 실험적 동시대 예술에 대한 도전일 뿐이다. 하하. 시간에(글에) 순서가 있다는 관성에 발을 걸고 싶었을지도.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볼까. 며칠 전에 동기들에게 크리스마스 때 뭐 할 거냐고(연애 안 하냐고) 쿡 찌르듯이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러자 인도네시아에서 온 디안과 발카가 우리는 무슬림이라 크리스마스가 별 의미가 없어하고 답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황급히 질문을 돌려 그럼 연말 연초에는 뭐 할 거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자기네 가족과 공동체는 율리우스력을 쓰지 않아 2024.12.31.~2025.1.1. 은 뭐 그저 그런 날이라고 답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니 한국에서도 아버지 뻘 세대만 해도 음력을 많이 썼고, 이 친구들은 이슬람력을 쓰고 있었다. 아이코야, 얼굴이 확 붉어졌다. 세상이 이렇게나 넓다.
그리스 철학에서 시간을 일컫는 말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단다. 크로노스는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같이 객관적이고 정량적인 시간을 말하고, 카이로스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으로 주관적이고 정성적인 시간을 말한다고 일러진다. 우리는 크로노스적 시간관에 익숙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그리고 기대하는 시간은 카이로스에 가깝겠다. 나너우리영활학앎음앎아름다움은 1시 2시 이렇게 순서대로 찾아오지 않는다. 고유의 동학과 시스템이 있겠고, 계속 발굴 중이지만 어느 날은 나에 꽂혔다가 어느 날은 앓음에 꽂혔다가 하곤 하는 것이다. 무게를 두는/무게가 두어지는 곳에(부여하는/되는 중력에 따라) 시간의 속성과 색깔 어쩌면 향기는 달라진다.
그런즉 왜 이런 걸 쓰기 시작했고, 왜 순서가 이따구로 엉망이냐고 묻는다면 그냥 웃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