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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Nov 11. 2024

앓음

앓음-앎-아름다움 중 시작 

앓음에서 시작하는 게 맞겠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뒤늦게 읽었다.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문장들이 서늘했다. 아팠다. 얼마나 아팠을까.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며 놀라는 지점은 역사 교과서에서 읽었던 이야기들이 내 삶과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거. 이를테면 광주의 그날로부터 불과 십팔 년 뒤에 내가 태어났다던가. 책에 나오는 동호는 아마 나의 엄마 아빠와 비슷한 또래일 거라던가. 그 세대의 심장에 새겨진 광주의 기억에 대해서 한 걸음씩 생각하게 되었다. 한 발자국 더 걸어가면 내가 배울 때는 없었을 새로운 이야기들이 교과서에 쓰이고 있다. 저 책이 출간되기 두어 달 전 나와 한 살 터울의 아이들이 탔던, 침몰한 세월호라던가. 이번 내 생일 즈음에 이 주기를 맞았던 이태원에서의 참사라던가. 몇 차례 전쟁이 터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시대와 세대에 속속들이 새겨지는 비극이 더는 그리 낯설지 않다. 


온 세상에 아픔이 가득하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세상에 눈물이 너무나 많다. 마음이 눈에 보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최은영 소설가가 썼었다. 그는 눈물이 배인 마음을 꺼내어 쭉 짠 다음 햇볕에 타닥타닥 말려 다시 개키어 넣어주고 싶다고 썼다. 그런데 왠지 마음이 눈에 보인다면, 그 한들이 너무나 크고 깊고 많아, 온몸이 굳어버릴 것만 같다. 짧은 생에서 배운 것들 중 가장 남는 것은, 세상에 너무 슬픈 일들이 많다는 것이다.


멀고도 가까운 이야기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평안도 사람이었다고 한다. 따뜻한 사람이었다는데, 내가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기억이 어렴풋하다. 어느 정도 크고 난 뒤에, 가끔 길바닥에 옹기종기 채소를 파는 할머니들의 채소바구니를 사들고 돌아오면 엄마가 말을 이었다. 너 우리 아빠 닮았나 보다. 그는 지식인이었고, 기자였고, 남한으로 왔고, 마음이 여렸고, 때론 무능력했다고 한다. 다만 미담과는 다르게 그 시대의 악인 전두환과 꼭 닮았다. 그와 꼭 닮은 할아버지가 그와는 꼭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게 사뭇 낯설었던 것도 같다. 이산가족을 찾는 방송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그의 이야기가, 가끔 엄마가 농이자 장기자랑으로 꺼내는 이북 사투리를 들을 때 기억의 물결에서 일었다가 흩어진다. 그가 돌아갔을 때 나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엄마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했다. 내가 태어날 때 즈음 외할머니가, 동생이 태어날 때 즈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출산을 준비하던 엄마에게 친척들은 외할머니의 입원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첫 아이, 나를 낳고서야 외할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엄마는 마음의 사경을 헤매었다고 한다. 둘째 아이, 동생을 낳고서 외할아버지가 쓰러진 것을 알았다고 하고. 급하게 치러진 장례식에서 엄마는 충분히 애도하지 못해 마음고생을 오래 했다. 그 시간들은 내게도 알게 모르게 깊게 남았다. 나의 생의 한편에 죽음이 서려있다는 것이니. 아직도 나는 손톱을 문다. 내 나이만큼 이어져오는 버릇이 되었고. 


엇비슷한 나이일 나의 친할아버지는 경기도 화성 토박이였다고 한다. 아빠가 중학생 때 돌아가셨다는 안동 장씨 부안파의 어느 장손. 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들은 바가 없다. 할머니가 만트라처럼 외우는, 멋지고 잘생겼고 주변 친척들이 다 그런 사람 없다고 그랬다 뿐이었다. 그리고 저번 할머니의 일주기에서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전쟁 때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찌 피난을 안 가고 화성 용소리에서 숨죽이고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버틸 수가 있었나 하고 큰아버지에게 물었더니 처음 듣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할아버지의 친한 친구 중 하나가 좌파 지식인이었다고, 그리고 전쟁 때 찾아온 북한군인들과 대화를 나눠 마을을 무사히 넘어가게 했다고. 그러나 다시 남한군인들이 올라왔을 때 밀고로 잡혀서 처형당했다고. 그리고 할아버지는 그 수상한 시절에 북한 편에 섰다는 의심을 받지 않으려 빨치산 토벌대에 자원했다고. 거기서도 마음 약한 사람이라 총은 못 들고 지게만 들었다고.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준비하면서, 내 안에 흐르는 어떤 피가 저곳에서부터 내려오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할머니 장례식에서 돌아오던 날, 온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울지 못한 사람이 나의 아빠였다. 아빠는 우는 법을 까먹은 듯했다. 가족 모두가 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낱낱이 봤던 날이지만, 아빠가 우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 눈물의 수도꼭지가 꽉 잠겨 버린 과정을 헤아릴 길이 없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아픔들과 동떨어진다. 혹은 괴리된다. 역사 교과목, 사회 교과목 이렇게 떼어놓다 보면 그것이 나의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것은 실로 나의 이야기이다. 이해한다. 우리는 슬픔과의 거리두기를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눈물이 말라버린, 눈물이라는 수도꼭지를 잠가버린 어딘가 고장 난 라디오 같은 아저씨가 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비단 우리 아빠만의 과제는 아닐 것이다. 가깝게는 나의 과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에겐 봉인된 슬픔을 해방해야 할 과제들이 남겨있는지도 모른다. 


학생회장 부회장으로 운동권에 합류했었다는 아빠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잘 모르지만 그들은 저마다의 아픔과 서사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물려준 아픔과 혹은 입힌 상처들을 통해 저 어느 소설책에 나올 것만 같은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가 된다. 아픔을 대물림하는 것을 치유로 승화할 것인가, 아픔의 반복으로 남길 것인가는 우리 손에 담긴 일일 것이고. 이 이야기들이 먼 이야기처럼 여겨지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좁은 나라에서 이 정도의 슬픔은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한 이야기이기에. 시간이라는 약에 잊혀야 살아갈 수 있었던 시절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망각은 아픔의 온전한 약이 될 수는 없다. 


우리가 보고 들은 아픔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을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아픔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서는 어느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게 된다면 그것은 거짓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솔한 이야기는 아니겠지. 그런 점에서 눈물만큼 정직한 것은 없다. 현실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때 우리는 볼을 꼬집는다. 고통은 실존을 증명한다. 잠시 눈을 붙인다. 왜 어떤 슬픈 마음이 턱 끝까지 찾아오면 눈이 감겨오는지 모르겠다. 서 있는 곳이 위치를 좌우한다지. 내가 보고 듣고 쓰는 모든 것은 내가 서 있는 자리와 살아온 길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아마도, 많은 이야기들이 아직 풀어지지 못한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다림에 응답하여, 잘 계셨나요 하고 안부를 건네가고 싶다. 그 응어리진 한을 풀어가는 데 짧은 생이 요긴하다면, 그거야말로 더할나위 없겠다. 


이 이야기는 철학자 함석헌이 썼던 이 문장들에 빚지고 있다. 앎은 앓음이다. 눈에 눈물이 맺히면 그 렌즈로 하늘나라가 보인다. 아픔에 머무르면 죽는다, 고 쓰면 너무 잔혹한 것일까. 살아가는 것은 아픔에서 도망치는 과정이자, 아픔과 직면해 승화하는 과정인 것 같다. 앓음-앎-아름다움의 서사 내지는 순환이 그 이야기이다. 울음이 웃음으로 가는 여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일 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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