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으려고 보니 오늘이 사삼이다. 나는 오늘 파주에서 내가 좋아하는 지혜의숲 창가 물가 자리에 앉아 근 며칠을 돌아보려 하고 있다. 스님은 내게 나그네라고 말했다. 늘 가방을 들고 다닌다고. 어쩌다 건네받아 차가 생기니 정말 바퀴 달린 나그네가 되었다. 기름을 30L 오만 원어치나 주유하고 나니 마음이 아깝고 미안하고 머쓱하고 그렇다. 석탄발전소와 싸워올 명분을 나는 잃어버리는 것일까. 차 없는 도시를 말하고 운동해 온 길과는 대치되는, 일종의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이전에 아빠가 차를 준다 할 때는 내가 하는 일이 뭔지 알면서도 그러냐고 욕을 바가지로 했건만) 그러면서도 차에 엄청나게 빠르게 익숙해지고 있다. 늘 낯선 영역이었던 차도에 발을 아니 바퀴를 들이고 나니, 다른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내가 지키고 살리자고 말한 세계를 야금야금 무너뜨리면서 펼쳐진 것일 테지만, 빠르고 편리하고(?) 근대적이다. 나는 이 세계를 부정하고 싶었고 맞서고 싶었고 조금은 할 수 있는 선에서 맞서오기도 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보이콧하는 맞섬의 방식으로만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반 정도는 인정하고 반 정도는 자존심 끌어올려 불화하고 있는 것 같다.
생각하면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올해의 초순 정성과 바람과 욕망과 스트레스를 한 껏 담은 잡지가 막 나왔다. 험난한 굴곡을 거쳐서 어쨌든 만들어냈다. 손에 쥔 잡지는 묘한 마음을 일으킨다. 한편에는, 안 되는 걸 되게 만들었네, 아, 그래도 해냈구나. 그래 이상한 녀석을 낳았구나 하는 마음이, 다른 한편에는 거진 400페이지에 달하는 욕심이 들어갔구나, 과거를 잇는 데는 이만하면 되었지만 미래를 여는 데 얼마나 해냈을까 하는 마음이 있다. 고집을 부리는 아저씨에 맞서 나도 고집을 이만저만 부린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잡지가 대서특필되며 언론의 주목을 끌고 어제 MBC가 방영된 이후에는 구독자 1,000명, 1억 2천만 원이라는 턱없이 높아 보이던 모금액 100%가 채워졌다. 나는 그 세대의 마음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독주하고 독재하고 독단적인 아저씨의 듣지 않는 말하기와 일하기를 보면 확 화가 난다. 그래서 열심히 애써서 맞선다. 그렇지만 맞서는 과정에서 나도 그 아저씨를 닮아간다. 그 점이 대화의 역설이다. 좀 자신이 없는 이상한 대화의 역설점이다. 아버지, 아저씨, 할아버지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게 여간 쉽지가 않다. 대화가 어려우니, 회의가 즐겁지 않고, 회의가 즐겁지 않으니 일하기가 싫어진다. 애정이 흔들리는 일에 마음을 어떻게 담아야 할지 모르니 계속 갈팡질팡한다. 이건 내가 지금 파주에 왔는데도 본가를 갈까 말까 고민하는 대목과도 맞닿는다.
내 눈에 선글라스가 씌워져 있는 것도 맞다. 실제로 그들이 걸린 ‘듣지 못하는 병’이 제일로 문제이겠지만, 그 병에 싫증이 나버린 나머지 그 낌새만 보여도 현기증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병이 나에게도 유전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녹색의 계보를 잇는 작업은, 녹색한남의 명맥을 잇는 작업일까. 이 축적과정을 순환과정으로, 생명의 이어짐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나는 내 자세와 태도를 어떻게 고쳐먹어야 할까. 절반 정도는 인정하고 절반 정도는 불화하는 이 상태를 어떻게 즐겨야 할까. 전체를 좌우하려 드는 자의식을 부리지 않고, 자기가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며, 멋대로 넘겨짚거나, 허풍을 치지 않고 단순하고 단아하고 소박하게 시간을 보내려면 어떠해야 할까. 이것은 결국 내가 어떠한 점에서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는 일이다. 알고 있지만 어려운 일이다. 그 마음 내기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한 순간에 마음속의 경계를 날려버릴 수는 없겠지만, 이 자가당착의 진퇴양난을 걸어갈 방법을 즐겁고 가볍게 가는 수밖에 없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그래야지 뭐 어쩌겠나. 마침 파주의 봄은 살갑다. 매화 향이 좋은 때에, 오전에는 함석헌 선생님을 가슴에 새긴 아저씨를 만나 책을 받았고, 오후에는 날개처럼 가볍고 귀여운 걸음걸이를 가진 사람을 만나 목련차를 마셨다. 하루 안에 앓음과 앎과 아름다움이 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