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 그리고 생명. 이들이 세상사를 좌우한다는 생각이 든다. 강릉에 처음 왔던 건 세월호가 가라앉았던 해 여름이었을 거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아이러니한데, 우리는 어떻게 바다로 수학여행을 올 수 있었을까. 비극의 충격도 잠시 내 일기장은 좋아하는 마음에 대한 끄적임으로 차있었던 것 같다. 그 나이 또래 애들이 다 그렇듯이, 라고 하면 너무 납작한가. (지금 와서 보면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또 그렇게 이상하게 봐야 할까도 싶고.) 으레 그러듯이 초당순두부마을에 가서 먹는 둥 마는 둥 순두부를 먹었고, 당시에는 꽤나 힙했던(당시에는 ‘쩔었던’ 이라고 말했었나) 안목커피거리에 가서 젤로 인기 있다는 파란 지붕 커피집 산토리니에 가서 먹을 줄도 몰랐던 커피를 마셨다. 십 년 정도 밖에는 안 된 이야기다. 하지만 십 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 옛말은 진짜 그랬고, 바다 빼고는 – 물론 바다도 만만치 않게 변화라는 위기를 맞았지만 – 다 바뀌어버렸다. 순두부 거리에는 서로 원조임을 자랑하고자 할머니를 팔아 내세운 간판들이 즐비하고, 커피거리는 상업화된 경쟁의 말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듯하다. 당시에 반짝했던 커피집에는 먼지가 쌓였고, 커피맛은 – 그때는 맛도 모르고 정신도 팔렸어서 객관적인 비교란 우습지만 – 맛이 없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데 와서 커피를 맛으로 마시나 추억팔이로 마시지 싶지마는. 실은 이 초라한 세월의 변화를 알아차린 지는 꽤 되었다. 강릉을 매년 한 두 번은 뭣 때문인지 들렸으니까. 그렇지만 왜 알면서도 정신없는 순두부 마을과 파란 지붕 커피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걸까. 이 시공간에 쌓인 이야기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싶은 주책일까. 시간이 멈춘 듯 카페에서는 그 시절 유행했던 겨울왕국 ost를 틀어주고 있다. 케데헌 ost가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방황 같은 건 잘하지 않게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막무가내로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뛰쳐나가지도 않고, 수능이든 시험이든 뭔가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저항에 몰두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운동과 변혁 이런 말에 그다지 끌리지도 않게 되었다. 물론 나는 계속 이 일들을 하고 있고 해 가겠지만 무언가를 뒤엎고 갈아엎고 바꿔내고 하는 소동이 그때처럼 절실하고 유의미하게 여겨지지 않는달까. 아직 이십 대 끝자락인데 살만큼 산 것처럼 이런 소리하는 것도 조금 웃기게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일정 정도는 현명해진 것이다. 삶의 목적을 변화에 붙들어 매고, 한동안 미뤄왔던 ‘그래서 사람은(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고민은 저짝에 치워두었던 시기를 알게 모르게 졸업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보다는 기운이 많이 없고, 순수함을 어느 정도 잃어버렸을 거고, 낭만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체념한 것에 가까울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무엇에 몰두해야 하는가. 아니, 꼭 몰두해야만 하는가? 사랑이든 대의든, 어떤 계획이든, 좋아하는 그 무엇이든 이렇게 쓰면서도 나는 이 물음에 그다지 정성과 집념이 서려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동안은 머리 싸맬 일이 줄어든 것이니 골치가 덜 아프게 됐군 하면서 안도를 하기도 했던 것 같다. 미칠 것 같지 않고 안정된 삶이라니 좋지 아니한가? 하지만, 나는 내가 안정된 삶을 갈망하지만 안정된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안정은 어떤 의미로 불편하다. 그런 점에서는 아빠를 빼다 닮았는지도.
상봉샘은 무엇이 당신을 가장 아프게 하세요 하고 물었다. 나는 기후든 전쟁이든 여러 가지를 입에 올렸지만, 사실 내가 그다지 아프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마음이 빼꼼 찔렸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꼭 무엇에 그렇게 아파야 하나요? 꼭 아픔에 기대어 앎을 찾아가야 하나요? 하지만 이 질문은 나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아픔에 기대어 길을 찾아가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아픔이라는 정직한 감각에 기대지 않는다면 길을 잃어버리기 또한 십상이기에. 아픔에 서 있지 않은 말과 생활은 놀이, 혹은 말장난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오늘날의 종교가 그다지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박사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 알 것도 같지만 사실 모른다. 진심인가? 절실한가? 진지한가? 그냥 마땅치 않아서 길을 걸어가는 것일까. 나는 솔직하게 내가 왜 이 길을 가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 병역거부도 군대가 싫어서, 이기도 하지만 그냥 가고 싶지 않아서가 더 정직한 이유일 수도 있다. 헷갈린다. 삶의 어디에 무엇을 어떻게 집중해야 하는지. 시간은 빠르고 꽤나 빠르게 지나가고 있는데, 허송세월을 보내는 건 아닌가 괜스레 걱정이 스쳐 지나간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만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되는 걸까. 노트를 챙겼지만 펜을 챙기지 않은 어리숙함인 것일까.
이번에는, 꼭 그간의 삶의 흔적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왜 손이 안 가는 걸까. 나는 과거와 대면하기가 무섭나 보다. 귀찮나 보다. 하지만 그 시간들에, 혹은 물질성을 지닌 공간들에 기초하지 않고서 다음으로 걸어갈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걸어야 한다. 아, 걸어야 할까.
List
컴퓨터와 옛 폰
연락처와 명함들
이메일들, 톡방 텔방들
녹음들
사진들
SNS를 정돈하자
가계부와 재정계획
노트를 정리하자
책장을 구하자, 책들을 정리하자
수초를 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