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잉골드의 인류학 강의
15년 전 오늘, 내가 있는 이곳에서 약 1,200km 떨어진 일본 동부 후쿠시마현에서 미증유의 재난이 빚어졌다. 9.1, 일본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의 지진은 일본 본토와 지구의 자전축을 움직일 정도로 강했고 쓰나미는 후쿠시마 다이치 제1핵발전소를 덮쳤다. 40년 전 체르노빌을 핵사고를 제하면 비할 데가 없는 최악의 참극(국제원자력사고등급 INES 7등급)을 기록했고, 현재의 기술로도 폐로 시점이 미지수인 원자로와 반감주기가 수십에서 수십만 년에 달하는 방사성 물질들을 고려하면 재난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1]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류가 늘 이 문제를 숙고해 왔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9)”지만, 후쿠시마 이야기와 같이 이번 세기에 들어서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고 더 이상 되돌릴 수도 없는” 티핑 포인트를 직면하면 “인류 역사상 지금보다 이런 철학이 더 필요했던 때는 없었다(13)”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인류학의 바탕을 사유하면서, 팀 잉골드는 현대 문명의 위치성에 대한 진단을 반복해서 제시하며 시대와 조응한다. “누구도 해답을 갖고 있지 않(43)”지만 “폐허에서 길을 찾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과제(13)”라는 그의 말에 힘입어, 15년 전 오늘을 애도하며 이야기를 열어본다.
스무 살이 되고 계속 사회과학을 배워왔다. 이 ‘사회과학’은 기본적으로 “사회로 과학 한다”는 식의 전통에 입각해 있었다. 사회라는 범주를 과학적 방법으로 분석하겠다는 시도에는 나무랄 것이 없지만, 그 범주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고, 무엇이 과학적 방법이며, 어떻게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연구 윤리와 태도로) 분석하겠다는 것에 따라 갖은 논의가 일어났다. 하지만 그 넓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사회과학은 잉골드가 말하듯이 실증주의적 유산 혹은 “실증주의의 옹호자들과 반대자들 사이의 끊임없는 논쟁에 의해 발목이 잡”혀있다(184-186). 어떤 점에서 가치 있는 논쟁일 수 있지만,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의 논쟁들을 접하다 보면 그 논의가 우리 시대 도처에서 분출되고 있는 문제들에 무력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이를테면 15년 전의 핵사고와 같이, 현대 ‘사회’의 감당 가능한 폭을 한껏 벗어나버린 문제들 앞에서 그 사회과학은 어떤 분석과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가. 인류세와 기후위기를 포함해 근대적 스케일을 벗어난 여러 현장들 앞에서 “사회에서의 사실들을 철저히 과학적인 이해에 맡기자는 것으로, 자연의 객관성과 권위와 동일한 객관성과 권위로 기록하고 분석할 수 있다는 확신(184-186)”은 너무나 무력해지고 만다.
이는 지식과 지혜에 대한 논의와도 맞닿는다. 잉골드는 “오늘날 우리는 지식에 급격하게 기울어져 있고 지혜로부터는 멀어져 있다(22)”며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 “지식은 너무나 많았던 것에 비해 지혜는 너무나 적었다”고 말한다. 과거의 데이터에 기초하여 반복해서 생산하는 지식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 쓸모가 체감하고, 어쩌면 AI를 위시하여 나아가는 작금의 시대는 세계에 대한 이해의 수단으로 생산했던 지식이 과포화 수준에 다다른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시 주어지는 질문은 이렇다. “우리는(학문을 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에 대한 대답을 위해 ‘인류학’에 기대를 걸게 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경험과 상상력으로 얻은 지혜를 통해 과학이 남긴 지식을 조절하고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인류학의 임무(22)”라며 “우리는 객관적인 ‘지식’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찾는 것,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바로 ‘지혜’다(20)”라고 강조하는 잉골드의 ‘미래를 위한 인류학’에 기대를 걸게 된다. “우리는 ‘사람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연구한다(24)”며 연구대상과 주체의 관계 배치를 바꾸고, “다른 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28)”이라며 연구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그의 지적이 울림을 가지는 것은 그간의 ‘사회과학’을 비롯한 학문들이 가장 크게 놓쳐왔던 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열거한 그 ‘사회과학’의 한계를 ‘미래를 위한 인류학’이 넘어설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지금까지의 담론의 지형에 깊게 새겨진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는 데에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실증주의의 이분법 외에도 문화와 자연 사이의 이분법,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이분법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1988년의 어느 날을 언급하며 이 이분법을 넘어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이미 인간을 두 가지 요소, 즉 인격체와 유기체로 분리하여 사회와 자연이라는 각각 분리된 영역으로 나누는 것에 점차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1988년의 어느 날, 인격체와 유기체는 인간 안에 함께 존재하는 동료가 아니라 하나이며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즉 그 환경에 있는 유기체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과 동일하다는 것을 말이다(144).” “다시 말해, 인간은 생물사회적 존재biosocial being이다. 인간이 유전자와 사회의 산물 때문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생물로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을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인격체와 유기체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153-154).”
이것은 “한 발은 자연에, 다른 발은 사회에 딛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이 양립하는 개념(인간과 유기체)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151)”는 주장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학문의 사유 방법 및 이야기구조에 대한 제언이기도 하다. “전체적인 그림을 보려면 두 의견을 하나로 모아야(151)”하고 “어느 것도 혼자서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둘을 하나로 모아 생각해야(144)”한다는 것이다. 그의 다른 저작들에서 강조하는 ‘조응’, ‘중동태’ 등의 개념도 이러한 이분법적 지형을 파훼하는 ‘삼분법+’ 혹은 비非분법적 이야기구조에 있다고 본다.
[1] 2011년 3월 11일 일어난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해 일본 본토가 평균적으로 동쪽으로 2.5~2.6m 움직였고, 지구의 자전축도 16.5cm 움직여 자전속도가 1.8μs(마이크로초) 빨라졌다.
[2] “예전과는 달리 현대의 기반이 된 실존주의적 확실성이 세상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갔음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만들어야 한다. 이 접근법을 통해 세상을 아는 방법과 그 안에서 존재하는 방식, 사이, 그리고 자연과 과학 사이의 파열을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42)”
[3] “문화와 자연 사이의 이분법은 특정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까지, 또 마음에서 물질까지 대립된 두 가지를 융합시킨다. 자연과 문화의 담론이 제기하는 혼란과 모순의 대부분은 이 대립된 두 가지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에서 비롯된다(50).”
[4] “나는 이런 상황을 보며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구분이 서구 지성사의 거대한 비극을 키울 뿐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모든 비극과 마찬가지로 그 구분은 고전시대부터 서구 사상의 특징이 되어온 어떤 필연성으로 드러났다. 즉 자연과 인류를 분리하고 자연 속에서의 존재 방식과 세상을 알아가는 방식을 분리함으로써 인정받은 그 필연성 말이다(87).”
참고문헌: 팀 잉골드, 2018(2020), 김지윤 역, 『팀 잉골드의 인류학 강의』, 프롬북스.
* 이 글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류학 박사과정 수업 <인류학의 쟁점 2> 과제로 제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