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면 강원도로 열흘간 캠프를 떠난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게 오랜만이라 사뭇 긴장도 되지만 내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까 궁금한 호기심도 있다.
아무도 보지 않겠지만, 이 ‘끄적임’ 매거진은 내 공개 일기장이다. 난 일기마니아라 언젠가부터 끄적여논 것들을 읽기조차 벅찬 지경에 이르렀다. (워낙 주저리주저리 두서탈출이라..)
나를 소개하자면 '취미;인생'이라 할 수 있겠다. 자의식이 강하고 나르시시즘 중병환자라 나에게 관심이 넘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철학적 호기심부터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도덕적 성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대한 자기진단까지. 홀로 쓰는 두꺼운 A4 크기의 일기장에는 복잡한 감정과 단상들을 풀어놓기에 바빠 정리와 진단에는 한계를 겪는 것 같아, 누군가 볼 수 있는 곳에 글을 써 아무도 보지 않더라도 시선을 의식해 정돈된 글을 쓰게 된다는 아이러니한 방법론을 채택했다.
제목을 정하는 일은 늘 어렵다. 이유는 모르겠다. 일단 터져나오는 감정과 복잡한 생각들을 써내려가고는 봤는데 글자들 요놈이 제목을 붙여달라 아우성을 쳐 멘붕이 온다 해야하나. 또 지독한 결정장애라..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 말을 가져오는 건 무리수?)일단 써낸 것에 본질을 부여하는 게 제목 붙이기니 말이다. 간혹 힙한 제목(본질)이 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끄적임(실존)이 앞서서..
이곳에 쓰는 글은 제목이 없다. 끄적임과 뒤에 붙는 숫자가 전부다. 각각의 글이자 전부가 하나의 글이다. 각개의 글을 분류는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모두 ‘나’에 대한 관찰기니까. 나는 초등학생 때도 중학생 때도 있었고 지금 현재의 나를 포함해 미래의 나까지 있지만 그건 모두 '나'니까. ‘나’에 대해 이어가고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작년 말에 우울증을 겪었다. 작은 트라우마, 세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무력감. 바꾸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막막함 등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사실 우울증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유와 감정에 기인해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다. 지나와 왜 그랬었지 하고 이유를 찾더라도, 그것이 다음 우울증을 예방하지는 못한다. 다만 우울함이라는 감정을 대하는 법이 조금 능숙해질 뿐. 이 끄적임들의 대부분은 우울함에서 빠져나오려 몸부림치는 과정이었다. 보는 사람이 없더라도 ‘내가 지금 이래요’하고 내 상태를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위안이 되니까.
우울은 무기력이라는 친구들 데려온다. 인싸라 장장한 친구가 많나보다. 허락도 안 맡고 데려온다. 그래서 꽤 많은 시간을 무기력하게, 멍하니 있었다. 특히 정초부터 열흘을 몸져눕고 일어나니까 뭐 할 마음이 안나더라. 그렇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은 다시 치열하고 에너지 넘치는 나로 돌아와있다. 발끝부터 손끝까지 흐르는 에너지를 느끼는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지. 미세먼지가 걷히고 푸른 하늘이 드러날 때처럼 짜릿하다.
이전 같았으면 “난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어”라고 말했을 테지만 ‘정상’이라는 단어는 피하겠다. 우울은 비정상이 아니니까. 삶에 존재하는 하나의 상태이자 감정이다. 그렇다고 그 자체가 ‘당연한 것’은 아니지만, (우울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기제들에 대해서는 분개할 자신이 있다.) 하나의 삶의 속성이라는 깨달음은 사고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킨 부분이 있다. 우울이 가져오는 무기력은 지친 몸을 뉘이게 했다. 그리고 내가 누운 것은 다시 도약하기 위함이었지 않은가. 미세먼지 덕에 푸른 하늘에 감사할 수 있듯이 우을의 기간 덕에 지금의 나를 감사하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맑은 정신으로 명료하게 앞을 내다 본다. 내가 할 것은 힘을 모아 미세먼지를 없애는 일. 우울이 내 삶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컨트롤 하는 일. (명상을 시작했다. 올해에는 진심을 다해 요가를 배워보고 싶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인생이 행복한 것이라는 전제를 놓고 있다. 하지만 행복은 디폴트가 아니다. '인생은 원래 불행한 것이니, 다만 신나게 살라(김상봉, 호모에티쿠스 서문)' 이 말처럼 오히려 불행과 부조리가 디폴트에 가깝겠다. 왜 나는 행복하지 않을까 하고 괴로워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그보다 음, 지금의 나는 이런 상태구나. 나는 요새는 힘이 좀 없고 조금 우울하고 그러는구나. 이렇게 마음을 돌보면 다시 소소하고 작은 일상의 행복들이 찾아온다. 내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이런 소소하고 작은 일상의 소확행이 군데군데 숨어서 깜짝깜짝 놀래켜 주는 곳. 안전과 평화의 가치를 사랑하는 까닭이다.
힘이 없으면 뉴스를 보지 못한다. 페북을 못 들어간다. 기사를 클릭하지 않는다.
그간 감수성을 갖추려는 훈련을 했다. 특히 남성으로 살아온 유년의 경험을 가지고 젠더 이슈에 마음가득 고민하기는 어려운 일이니까. 다분한 노력이 필요했고 앞으로도 필요하다. 그러나 작은 것과 미묘한 것에도 마음을 쓸 수 있는 여리고 섬세한 나를 만들어가려 했더니, 세상의 아픔에 잠식되어 스스로를 갉아먹는 사람이 되었다. 사회운동가의 길을 걸을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모순인 것 같다. 이를테면 뉴스를 보고 세상의 부조리와 잔악함에 급격하게 우울해진다던지. 멋진 이론과 대안을 머리로 알지만 내 앞에 존재하는 세상과의 간극은 점점 더 커진다던지. 분노할 때 분노하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일은 다분히 어려웠다. 감정이입과 분노에 휩쓸려 일상 박살내기가 지금껏 내가 해온 일이다. 말로는 세상을 열번도 더 바꿨으면서. 내 일상을 박살냈으니 당연히 읽은 것도 행동한 것도 없고 아무 것도 한 게 없다는 부채감과 무력감에 시달리게 된다. 같은 레파토리를 이년을 반복하니 깨닫는 것이 있다. 살기 위한 깨달음. 세상을 바꾸면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단단한 내가 있어야한다. 외부와 차단된 나만의 고요한 시간을 가지려 한다. 명상을 하고 산책을 하고 달리기를 하고.
웃기게도 내가 다시 기력을 찾았다는 걸 느낄 때는 뉴스를 보고 빡이 칠 때 라는 것이다. 섣부르게 하는 분노가 일상을 좀먹는다는 것을 알기에 성급히 분노하는 나를 한켠에서는 걱정스럽게 바라보기도 한다. 커피를 마실 때처럼 미래의 에너지를 한순간으로 끌어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걱정. 에너지를 다 쓰면 소진되어 몸져눕는. 그런 불안정한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이번 신년 키워드는 노력, 치열, 학문이 아니다. 안정과 건강이다. 특히 정신건강.
그래도 분노로 말미암아 열정적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말을 하는 내 모습을 사랑하는 건 부정할 수 없겠다. 우울에 휩싸여 몸져누워 있는 나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투사처럼 싸우고 토론하는 내 모습을 더 사랑한다.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기분이 함께해서 그런가 보다. 마음을 살짝 가라앉혀야 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어제도 그제도 너무 열정이 가득한 날 보면서 조금은 위험하다고 느꼈으니.
그래도 인생에 대해서 조금은, 아아주 조오금은 감을 잡은 듯하다. 한 언니는 나에게 "윤석은 참 건강하게 자라나는 사람이군요"라 말해주었다. 그 때는 내가? 나는 건강과는 반대의 길로 나를 모는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내가 건강한 길을 걷고 있다는 믿음이 마음을 채우고 있다. 마냥 강해져야겠다고만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건’강해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어찌 건강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