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가는 기분
보름 만에 집에 돌아왔다. 급작스레 시작된 여행이 열흘간 이어지다 잔고의 바닥을 보이고는 끝맺었다. 막 복잡하지는 않다. 감정기복도, 정신상태도 나쁘지 않다. 문제는 이 ‘나쁘지-않음’의 상태가 내가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해결하고, 정리해서가 아니라 단지 시간과 망각의 힘에 의한 거라는 거다. 토하듯 써 내려갔던 ‘청천벽력’은 그 선생과 캠프에게 아무런 반향을 가져오지 못한 채 넋두리 정도로 끝나버렸다. 글을 보냈건만 답은 없고, 답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거겠지. 나만 억울한 거겠지. 믿는 도끼에 찍힌 발등은 참 아프다. 이제 누구를 감히 믿지 않아야겠다, 가 나의 결론이라는 게 싫다.
양구에서 서울 행, 속초 행 버스의 요금은 신기하리만큼 같았다. 고작 몇 백 원 차이였다. 집과 여행의 기로. 집에 가 지친 몸과 마음을 뉘이는 것이 좋은지, 속초로 가 낯설고 새로운 것들을 마주하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속초를 골랐다.
나중 와 생각하니, 나는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나에게 집은 지친 몸과 마음을 뉘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했던 대부분의 성소수자 이야기는 가망-없음의 결론을 내었고, 어머니는 성 문제만큼은 지나치게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그래도 남자-여자면 같은 방을 써서는 안 되지, 가 어머니의 사고였으니까.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얽혀있지만 그만두겠다. 굳이 옛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싶지 않다.
집이 안식처가 아닌 이유로 나는 자연 한 폭 보이지 않는 아파트를 꼽았지만 사실은 그냥 가족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들에게 받을 스트레스가 훤히 보이니까. 이게 예상된다는 것만으로 참담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 예상은 여행 중에 있었던 자질구레한 일들로 맞아떨어졌다. 그래도 가족이니 나에게 있었던 일을 알 권리가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썼던 글을 보냈다. 돌아온 답은 (네가 아직 사회를 안 살아봐서 그 조심성을 모르나 본데) 실명을 거론하면 안 된다, 라는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이었다. 합당한 비평일 수 있으나, 부모가 돼서 한다는 말이 고작 이 따위라고?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글에 써 놨잖아. 난 걱정과 위로를 바랐나 보다. 이 분노 또한 나의 기대로 인한 것인가 보다. 점점 주위로부터의 기대를 내려놓고 있다. 믿음이 사라지고 냉소적으로 변하는 내가 안쓰럽게 보인다.
여행을 이어가며 잔고는 줄고 잘 곳은 마땅치 않았다. 괜한 폐 끼치기도 싫고 내가 아프니까 나 좀 달래줘하고 찡찡대기는 더욱 싫었다. 여행 중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괜찮은 척’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친하고 편한 사람들인데도 그랬다. 내가 누군가에게 희망찬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왜인지는 아직 찾지 못했다.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속초-강릉-무주-익산-전주-김제-부안을 떠도는 날 보며 영화 ‘소공녀’의 미소가 떠올랐다. 갈 곳을 잃은 미소는 계란 한 판 사들고 친구들의 집을 번갈아가며 신세를 졌다. 갈 곳이 마땅치 않을 때에는 24시 카페에서 쪽잠을 자며 버텼다. 자정이 다가오는데도 당장 잘 곳이 없는 기분을 안다. 돈도 없고, 재워달라 할 염치도 없는 기분. 버려진 기분. 버려진 기분을 잊고자 여행을 시작했지만, 여행을 하면서 버려진 기분을 꽤 자주 생각했다. 왜 나는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는가 하는. 내가 설 곳이 점점 줄어드는 기분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점점 잃어가는 기분이다.
무엇보다 나의 풋풋함을, 열정과 믿음과 순수함을 잃어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