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 : 불안
거진 스무 해째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 의식은 늘 늦다. 약지 중지를 지나 검지쯤 와서야 ‘앗!’하고 의식이 시작된다. 한참 늦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설거지하려다가 손톱 밑이 시큰거리는 걸 느끼고서야 빈자리를 눈치채는 식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알고 지낸 지 꽤 오래된 문구지만 간혹 누군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머리만 긁적인다. 잘 모르지만 가아끔 훅 이입될 때가 있다, 손톱의 빈자리를 눈치채고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생각을 했다. 내 물어뜯음은 내 의식에 선행했다. ‘나’를 알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정신 차려보니 태어나버린 것이다.
의식·정신을 좇지만 때로 이들은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쓸모없다. 불안에 있어서 의식은 무능하기 그지없다. ‘나 불안하구나.’ 하는 자각은 손이 덜덜 떨리고, 눈 깜짝할 새 손톱이 모두 사라져있고, 방안을 계속 왔다 갔다 하는 날 보고나서야 가능하다. 참을 수 없어 뭔가를 적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앞이 캄캄했다. 무엇 때문인가. 왜 그런가. 대상과 이유를 묻기에 앞서 불안은 스멀스멀 기어 왔다.' 정신의 활동은 사후적이라 불안의 순간에는 조금도 쓸모가 없다. 나 왜 이러지? 왜 괜찮지 않은 거야? 왜 행복하지 않은 거야. 손 좀 멈춰봐! 이따위 말이나 내뱉을 뿐이다.
장례식을 가본 기억이 없다. 5학년 때 증조할머니 장례식을 한 번 가봤다 마는 호상이라 슬픔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죽했으면 둘러앉아 ‘꽃보다 남자’를 봤을 정도. 한 달 전 친구 외조부 장례식에 처음 다녀왔다. 위아래로 검은 옷을 입었는데 신발이 빨간 스니커즈밖에 없었다. 긴장했다. 하필 빨강색이라니, 젠장. 장례식장에 들어갔는데, 국화도 손에 들려있었는데, 절이 한 번인지 두 번이지 몰라서 안면식 한 번 없는 할아버님 영정 앞에서 초조하게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손떨림이 멈추지 않아, 굳어버린 근육이 아파 소주를 한 병 마시고 돌아왔다. 죽음은 나와 너무 먼 단어다. 가늠이 채 되지 않는다.
나의 일상은 참으로 허약해 사랑하는 친구 하나가 죽는다면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버릴거다. 나의 실존을 이어가게 해 줄 것들이 언제까지 있을까. 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답할 이야기가 얼마나 남아있을까. 그것들이 없어진다면 어쩌지. 미세먼지가 불어닥치면 나는 세상의 끝을 본다느낀다. 선조부터 이어온 –나는 약간의 윤회를 믿는지도– ‘삶’의 마지막을 본다느낀다. 몸이 무거워지다가 존재가 무거워져버린다. 존재가 무거워져버리면 답이 없다. 존재의 무거움에 일상은 비빌 바 못 된다. 살 이유를 모르겠는데 관계며 약속이며 출석이 뭔가. 캘린더에 빽빽이 들어찬 ‘해야 할 일’들은 물먹은 솜처럼 변해 나를 옥죄인다. 당당하게 내뱉었던 말들과 하겠다고 자신했던 일들이 두려워진다. 불안은 가속화된다.
어젯밤 명주의 방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서울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간 친구다. 그가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기가 꺼져있다. 명주의 그림만 간간이 본다. 명주의 그림을 보면 존재를 묻게 된다. 통속에 가려 잊고 있었던 너무나도 중요한 물음들을 꺼내게 된다.
프로필 사진 속의 나는 충만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부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지만 정말로 버리지는 않을 것임을, 확고히 알고 있었다. 일주일을 씻지 않았지만 개운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