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내가 뭐 하려고 이 세상에 왔을까. 무슨 일을 일어나게 하려고 태어났을까. 항상 생각해요. - 정혜윤’
일이 끝나고 고즈넉이 찾아오는 심야의 고요 속에서 나는 나에게 잘 살고 있는지 묻게 된다. 그러고는 삶에 잘이니 못이니 붙이는 스스로가 별로라 물음을 물린다.
알다시피 그냥 갈아 넣었다. '희생'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는 않다만, 놓친 수업들과 못써간 쪽글들과 취소한 약속들과 사라진 여유와 시간이 자꾸만 희생처럼 느껴진다.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이러고 있나.
운동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낯설기도 잠시, 삼 주의 시간이 흘렀고, 정신없이 달려왔지만 생각보다 소진되지도 지치지도 않았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힘겨웠지만 뿌듯했고 어려웠지만 잘 해냈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편하다. 빚진 마음을 안고 살다가 그 빚을 갚을 수 있게 된 것 같기도 해서 특히나 그렇다. 나는 빚진 마음이 계속 남는 사람이니까.
나는 무엇하려고 이 세상에 왔는가. 저 멀리에서 누군가 나를 보냈다면 왜 보냈을까. 인생에 의미는 무얼까. 나는 ‘변화’에서 답을 찾는다.
2.
쨍그랑. 술잔이 떨어져 깨졌다.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연거푸 술잔을 들이키다 큰 몸짓에 잔을 팔꿈치로 밀어버렸고 잔 깨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이성을 찾았다.
부족한 실력을 탓했다. 무력하고 무능한 나를 탓했다. 나에게 화가 났다. 왜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하니. 왜 그렇게 설득력이 없니. 상황과 맥락, 그리고 연대의 필요성 및 감성 포인트까지 할 수 있는 게 많았잖아. 그런데 왜 그러고 있었니. 스스로가 미웠다. 나태함이, 무지함이, 무능력이 미웠다. 설득력이 없던 나의 공허한 말들이 미웠다. 지금껏 부족한 실력을 호언장담과 허풍으로 감추어 왔나. 스카이캐슬의 이수임이 떠올랐다. 그가 얼마나 나약했는가. 지금의 시대에서 정의와 인권, 평화 따위는 얼마나 퇴색된 가치인가. 이 가치를 포기할 수 없는 나는, 왜 이 가치가 지금 이야기되어야 하는지를 또렷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했다. 부족한 실력을 울먹거리는 호소로 대체한 나의 무능이 원망스럽다.
허망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터벅터벅 길을 걸어가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어제의 일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널 설득할 수 없었다.
이른바 진보의 무능이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고이 자라서 맘 맞는 뜻 맞는 사람들과 같이 꿈을 꾸다가 마주한 참혹한 현실에 말문이 막혀버리는 것.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 자신과 이렇게 다를 수 있음에 경악을 금치 못한 후 손을 바들바들 떨다가 인류애를 잃고 붕괴되거나, 고작 내뱉는 말이란 게 "책 좀 더 읽고 와"라면 그것은 무능이다.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 책임이 항상 불편한 사람의, 바꾸려는 사람의 쪽에만 있다는 것은 화나고 미운 일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을. 변화를 희망하는 사람에게 부여된 무거운 책임인 것을. 선대의 사람들이 그 굴레에 매여 책임을 지고 살아왔듯이. 우리는 실력을 길러야 한다. 아니, 나는 실력을 길러야 한다.
나의 무능함과 무력함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좋아해 줄 사람들 앞에서 좋은 이야기들을 잔뜩 떠들고 이로 기뻐하고. 난 뜻 맞고 맘 맞는 사람들 앞에서만 유기력했다. 다른 생각과 이론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했다.
내가 앞으로 맞서 싸워야 할 것은 자본주의라는 골리앗과 신자유주의라는 망령이다. 자연을 자원으로 보는 시선과 땅과 집을 멋대로 맘대로 사고팔아도 되는 재화라 생각하는 토지사유제이며, 수천 년간 한 번도 그 굳건한 주류의 자리를 잃은 적 없는 가부장제이며, 세상의 일을 '나'와 분리해서 사유하는 이기적인 관성과 ‘나만 아니면 돼’식의 이기주의다.
나의 생각을, 내가 옳다 믿는 신념을 상대방에게 세상에게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설명하는 일에 시간을 아까워해서는 아니 된다.
3.
누가 미안하다 했다. 너가 고생할 동안 내가 일 못 맡아서 미안하다 했다. 이 말에 왜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다. 술김에 내뱉은 말은 너에게도, 나에게도 하는 말이었던 것 같다.
“우리 미안해하지 마요.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우리가 왜 미안해. 어떤 보상도 대가도 없이 바로잡자고 모인 사람들인데. 뭐가, 그리고 왜 미안해. 여러분 미안해할 거 하나 없어. 차라리 고맙다고 해. 내가 여력이 좀 없을 때 너가 해줘서 너가 열심히 수고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그렇게 말해.”
다시 말한다면, 이렇게 말하지 싶다.
“무언가를 바꾸고자 하는 당신들이 있어서 너무도 감사합니다. 그대들이 없었더라면, 흐르는 물에 씨를 뿌리는 이 수고를 이렇게 감내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잠수 타도 좋다고, 우리는 항상 서로에게 무임승차하는 존재라고, 이 일에 너무 마음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미안하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그대가 있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