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예전에 읽었던 책 중에서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을 골라보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먼지가 잔뜩 쌓여 있는 책장을 정리했습니다. 책을 정리하다 보니 예전에 제가 사용했던 다이어리 몇 권이 문득 눈에 들어왔습니다. 10년도 훌쩍 넘은 업무용 다이어리였는데 갑자기 옛 추억에 잠겨 이곳저곳 페이지를 들춰보니 그 당시 개인적으로 또는 업무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의 연락처와 그 사람들에 대한 간단한 메모가 적힌 리스트가 있더군요. 한참 사업을 왕성하게 했던 때라 그랬는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의 리스트가 생각보다 길었고, 나름 중요한 사람들의 경우는 꼼꼼하게 그 사람의 성격, 취향, 관심 사항 등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관계가 소홀해졌거나 아니면 제가 의도적으로 관계를 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낼까 궁금한 사람들도 몇 명 있긴 했지만, 많은 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금의 미련이나 아쉬움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일찌감치 관계를 끊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의 유형을 정리해 봤습니다.
첫 번째 유형 ‘나 말만’씨
대학교 후배의 소개로 만나게 된 같은 대학 출신의 선배였는데 누구나 알만한 잡지사에서 광고영업 일을 하다가 퇴사하고 나와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몇 번 술자리를 같이 했었는데 그 선배는 자기가 아는 광고주들이 많은데 기회가 닿는 대로 영상 제작일을 주선해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몇몇 대기업 홍보팀장과 조만간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몇 번을 약속했는데 말뿐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실제로 그런 일은 성사되지 않았고 계속적으로 부도수표만 남발했습니다.
처음부터 신뢰가 가지는 않았는데 그 정도로 빈말만 남발하는 캐릭터였는지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어느 정도 그분의 성향을 파악한 이후로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그분은 시도 때도 없이 저를 도와주고 싶다는 그럴듯한 이유로 저희 사무실을 계속 찾아왔고, 나중에는 황당한 거래까지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저희 회사 법인카드를 주면 자기가 적극적으로 영상 제작 영업을 해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길래 저는 단호하게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분에 대한 신뢰도 없었을뿐더러 그렇게까지 영업을 해서 일을 진행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게 되는데 이렇게 말만 그럴듯하게 하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말만"씨가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말로는 하늘의 별이라도 기꺼이 따다 주겠다는 사람,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자기한테 맡기면 확실히 해결해 주겠다고 큰소리 떵떵 치는 사람 등 행동보다는 항상 말이 앞서는 사람이 너무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주위에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이런 ‘나 말만’씨들은 무조건 피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두 번째 유형 ‘마이웨이’씨
이 유형의 사람은 주위에서 뭐라고 하던 자기의 고집대로 자기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회사생활 할 때 옆 부서에서 근무하던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는 고객이 싫다고 하는 것도 자기가 직접 만나서 설득해 보겠다고 나서는 타입이었습니다. 악의를 품고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자기 생각이 무조건 맞다는 이상한 신념에 사로잡혀 자기 의견만을 고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같이 일하는 동안 그 친구와 의견 합의를 보는 것은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을 통과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다 아니라고 부정하는 일도 그 친구는 자기가 맞다고 고집을 부리니 순조롭게 진행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친구 의견을 무시하고 일을 진행하기에는 일 처리 과정상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 친구와 같이 일하기 힘들다는 불만이 계속 터져 나오자 결국 회사에서는 그 친구를 다른 부서로 전출시켰고, 그 친구도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고 나갔습니다. 서로 협력하며 일해도 하루하루 버텨 내기도 힘든 세상인데 자기 생각만 맞다고 고집부리는 사람과 일한다는 건 다 같이 망하는 지름길인 것 같습니다.
세 번째 유형 ‘감정 롤코’씨
감정기복이 롤러코스트를 탄 것같이 오르락내리락 극단을 치닫는 유형을 말합니다. 기분이 좋을 때는 모든 게 다 오케이였다가 한순간에 기분이 틀어지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감정 조절이 전혀 안 되는 사람 있잖아요. 제가 거래하던 클라이언트 중에 그런 분이 있었는데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여간 힘들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간신히 합의점에 도달하고 이제 일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려고 하면, 말 한마디 또는 세부 계획안의 토씨 하나를 트집 잡아 일을 원점으로 되돌리기 일쑤였습니다.
저녁 식사자리에서 술 한잔 오가다가도 뭐 때문에 기분이 틀어졌는지 버럭 화를 내며 술자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기분 상했다고 먼저 자리를 뜬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렇듯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과 같이 일한다는 것은 마치 살얼음판을 몇 명이서 어깨동무하고 걷는 것과 같습니다. 한두 번 같이 일을 진행하고 난 후 저는 단호하게 그 사람 전화번호를 연락처에서 삭제했고, 그 회사에서 같이 일해 보자는 제안이 와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한사코 거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제가 관계를 끊었던 사람들의 유형은 일 처리가 느려도 너무 느린 사람,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만 의존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의지나 노력을 1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 자기가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얌체 근성이 뼛속까지 배어 있는 사람 등이 있습니다.
위와 같이 스쳐 지나갔던 관계들을 정리해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습니다. 제가 관계를 끊었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혹시 그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저와 관계를 끊은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모든 관계는 상대적인 것이니까요.
저에게 소중하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 강제 정리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주기적으로 제 자신을 들여다보고 마음가짐을 가다듬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사진 : Unsplash의 Kelly Sikke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