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5 (nullacht fünfzehn)
영팔/십오
독일서 누군가가 이 네 숫자를 말하면 독자분들은 무엇을 떠올리실 건가? 독어로 08(null acht)과 15(fünfzehn)를 따로 말했으니 날짜를 말하는 건가?
참고로 나는 처음 들었을 때 우리나라의 8월 15일, 광복절을 떠올렸다.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밖에 다른 게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앞 뒤 맥락이 없다면 청자의 정체성과 문화가 듬뿍 담긴 정서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 독일인들이 즐겨 쓰는 이 숫자배열은 한국인으로서 상상하기 어려운 뜻을 담고 있다.
독자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의 세 가지 상황을 설정해 보았다.
-여자: 오늘 데이트한 여자 어땠어? 잘될 것 같아?
-남자: 글쎄 뭐랄까... 0815였어.
-딸: 엄마, 우리 집 거실 커튼 바꿨어. 어때?
-엄마: 너희 집 커튼은 0815가 아니고 예쁘구나. 잘 골랐다.
-축구경기를 보며: 오늘 골이 완전 0815네. 공만 차면 아무나 넣겠어.
위 대화에서 짐작하셨듯 독일어 구어체의 0815 (null-acht-fünfzehn)는 '특별하지 않고 매우 진부한 것' 또는 '평범하기 그지없거나 오히려 평균 이하인 것'을 뜻한다. "팔백십오"라고 말하면 안 되고 반드시 "영팔/십오"라고 말해야 하며, 정확한 표기는 "08/15"이다.
도대체 이 숫자들은 어쩌다 이렇게 엉뚱한 뜻을 갖게 되었을까?
08/15의 유래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8년에 독일군에 도입된 기관총 명칭이 바로 'MG08/15'였는데 이 소총은 표준무기로 대량생산되어 품질이 좋지 못했으며, 매일 품질 나쁜 무기로 단조로운 훈련을 해야하는 군인들은 지루함과 진부함을 토로했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진부하다'는 의미가 생겨났다.
또한 MG08/15이 도입된 이래로 전반적으로 무기의 품질이 저하되었으며 오작동 빈도도 늘었다고 한다. 여기서 '부족한 품질'이라는 의미도 추가되었다.
추후 이 소총은 심지어 자전거나 책상 공장에서도 스페어파트(부품)를 생산할 수 있을 만큼 표준화되었기에 08/15는 '표준화시킬 수 있을만큼 지극히 평범한 것'을 말할 때도 쓰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독일에서 누군가가 당신 혹은 당신에 관한 것을 가리키며 "08/15"라고 한다면 적어도 좋은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제목 사진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