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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Nov 12. 2024

초겨울 산토리니 산책하기

매년 11월 1일부터 산토리니는 비수기에 들어간다. 

우리는 비수기에 유명 관광지에 가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데, 성수기에 누릴 수 없는 여유와 한가로움을 맘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비어있는 숙소 틈으로 해가 뜨는 모습을 여유롭게 관찰한다. 이 시기의 산토리니는 겨울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두툼한 외투를 입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쌀쌀하다. 


사람이 없는 실내 정원은 동네 고양이들이 돌아가며 채워준다. 



오전 10시 경이되면 해가 꽤 높이 올라있다. 이때가 활동을 시작하기 가장 좋은 시각이다. 

우리도 버스 타러 갈 준비를 했다. 



성수기였다면 빈자리 하나도 상상하기 어려웠을 버스인데, 비수기엔 이렇게 여유가 넘치다 못해 널널하다. 

사람이 적어서인지 확실히 일하는 사람들도 여유가 있다. 산토리니에 가기 전 리뷰에서 읽었던 거스름돈을 안 준다던지, 요금을 더 받는다던지, 버스 정보를 안 주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기대만큼 친절하지는 않아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는 모두 물어서 얻을 수 있었다. 



산토리니 섬의 꽃은 'Oia마을(이아마을)'이다. 

포카리스웨트 광고, 연예인들의 화보, 웨딩촬영 등 산토리니를 대표하는 풍경의 8할은 이곳, 이아마을이다.

 

11월 1일부터 비수기에 들어간 산토리니는 상점, 호텔, 카페, 식당의 약 50%가 문을 닫고 내년 4월 이후의 영업을 준비한다. 가장 인기가 많은 이아마을도 예외는 아니다. 마을 중심가를 제외하고 매우 한적했다.




독일에 살기 전엔 해가 이렇게 인간에게 중요한지, 또 내가 이렇게 햇빛에 좌우되는 나약한 인간인지 몰랐다. 영하의 추위에도 해가 풍부한 우리나라는 산토리니 못지않게 축복받은 곳이었는데, 있을 땐 그 소중함을 몰랐다. 조금 과장해서 일 년에 200일 정도 독일의 회색 하늘을 보고 있으면 웬만한 멘털로는 버틸 수가 없다. 생각이 많은 날이면 이게 사색인지 우울증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니까. 


해가 야박한 나라에 산다면 이렇게 날씨 좋은 곳으로 휴가를 오는 건 거의 살기 위한 발버둥에 가깝다. 



외국인 관광객이 워낙 많은 탓인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익숙한 산토리니다. 

하지만 이 날은 커피머신이 고장 났다며 그릭커피를 추천했다. 커피류는 웬만해서 모험을 하지 않는 나인데 반신반의하고 먹어보니, 커피머신이 고장 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맛 없이 입안을 감싸는 커피거품이 산토리니의 밝은 하늘에 뜬 구름을 입에 넣은 것 같았다. 



산토리니 곳곳에 있는 파란 눈 모양은 'Lucky Eye(럭키아이)'로 행운을 가져다주는 상징이다. 온갖 장식품, 공예품, 옷 등 산토리니에서 이 심볼이 없는 곳이 없다. 


우리는 사실 럭키아이를 터키인을 통해서 알았는데 (독일에 터키인이 워낙 많으므로), 현지 그리스 사람에게 물어보니 최초는 이집트에서 시작됐고 이걸 본 지중해 사람들이 바다의 푸른 모티브를 더하여 블루 럭키아이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돈가스의 시작은 오스트리아 슈니첼이었지만 일본을 거쳐 카츠가 되고 한국에 와서 남산 돈가스가 되어 고유 메뉴로 굳어진 식이랄까.



산토리니 역시 곳곳에 그리스 국기가 걸려있다. 그리스뿐 아니라 스위스, 덴마크 등 자국의 국기를 자랑스럽게 여기저기 걸어놓은 나라를 자주 본다. 개인적으로 나는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나라 국기를 걸어놓는 게 뭐가 문제인가? 우리나라도 관광지만이라도 태극기를 좀 더 걸어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햇빛이 따사로운 에게해의 모습. 바다가 무서운 이유는 고요하고 깊으며 끝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크고, 얼마나 깊으며, 어디가 끝일지 인간이 짐작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존재다. 



산토리니는 고양이 천국이다. 여기저기 귀여운 고양이들이 사람 손을 많이 탔는지 도망가지도 않는다. 한 친구는 우리가 다가가도 미동도 않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멀리 오는 친구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둘이 무슨 대화를 하는 걸까?



산토리니의 백색 건물은 사실 가까이에서 보면 때가 많이 타고 낡아있다. 

예쁜 곳만 사진에 담아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보수나 청소가 필요한 곳이 상당히 많다. 특히 이아마을과 피라마을 중심을 제외하고 산토리니 섬은 개발 자체가 되지 않은 황무지 땅도 많다. 건물이나 거리는 너무 낡거나 더러워서 손을 대기 싫은 구역도 있었다.


그러니, 보이는 대로 다 믿지 말자. SNS에 비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삶 전체의 1%도 반영하지 못한다. 못생긴 구역이 많은 산토리니처럼, 어떤 삶이든 어둠은 있는 법이다.



산토리니에서 만난 그리스 음식들은 친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페타치즈, 그릭요거트, 프라페커피 등 다 어디선가 들어봤는데 정확히 떠올리기는 어려운 맛. 


실제로 그리스 음식들이 그랬다. 개운하지도, 맵지도, 그리 달지도 않았다(디저트는 무지하게 달다). 여태 느끼한 음식만 복병인 줄 알았는데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그리스 음식이 진정한 X맨이었다. 결국 우리는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마라요리를 먹으러 갔다. 



숙소로 돌아와 석양을 맞이했다. 

산토리니 하면 석양, 석양 하면 산토리니일 정도로 친구나 지인들이 입을 모아 산토리니의 석양을 추천했는데, 정말이지 물감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은 자연 그라데이션을 볼 수 있었다. 



*해당 글의 사진은 모두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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