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일처리가 한국대비 굉장히 느리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독자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 거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느리냐면, 기관을 막론하고 일반 메일문의는 보통 2주 정도 대기한다. 그래도 답변이 없으면 전화나 메일을 다시 보낸다. 관청에 어떤 신청서를 넣었다면 대기기간은 평균 4~8주다. 6주 안에 처리되면 상당히 무난한 속도이고, 12주가 넘어가면 한 번쯤 문의해봐야 한다. 비교적 답변이 빠르다는 대학도 마찬가지로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고 1~2주 기다리는 건 매우 일반적이다.
즉, 아무리 느리다고 해봐야 통상 "답변을 받기까지" 12주(3개월)를 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장장 56주(14개월)를 기다리게 한 곳이 있다면 믿어지시는가?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독일의 연말정산은 상당히 까다롭다. 한국처럼 원클릭 정보 불러오기나 친절한 연말정산 도우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 세금포털을 사용하거나(가독성 매우 떨어짐), 프로그램 혹은 앱을 개인적으로 구매해서 할 수 있으며, 모든 항목을 채우려면 아무리 빨라도 서류 뭉치를 들고 2-3시간 이상 씨름해야 한다. 게다가 자영업자 거나, 수입 루트가 여러 곳이거나, 해외 이주나 독일 내 이사를 했거나, 이직 등의 이벤트가 있었다면 더 복잡해진다.
나와 남편은 10년가량 연말정산을 혼자 해왔는데 2023년에 유독 여러 가지 이벤트가 있었고, 2024년 초에도 너무 바빠서 타인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일반 세무사들은 월급쟁이 개인 고객을 업무가중 이유로 잘 받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생겨난 협회가 '근로소득세 상담 협회(Lohnsteuerhilfeverein)'로, 일반 직장인들에게 맞춤 연말정산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비슷한 협회로는 Steuerring, BVL 등이 있다. 이런 단체에 소속된 상담사는 면허를 보유한 세무사는 아니지만, 세무 관련 교육을 받은 직원들이다. 따라서 상담 및 처리비용이 일반 세무사보다 저렴하며 '협회 회원비' 명목으로 연단위로 지불한다. 우리는 2024년 2월에 협회에 가입하고 곧바로 모든 서류를 제출했다(원래 독일 연말정산은 다음 해에 진행된다).
일반적인 속도라면 세무서에 서류 제출 후 약 2-3개월 후에 집으로 '세금 통지서(Steuerbescheid)'가 온다. 이 편지에는 연말정산 최종 결과와 추가납부, 혹은 환급 여부가 적혀있다.
그런데 우리는 3개월을 기다려도, 6개월을 기다려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쯤되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정산을 시작했다, 문제가 생겼다 등등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담당자에게 메일을 2-3주마다 남기고, 업무시간 외에는 자동응답 메시지를 남겼다. 업무시간에 전화하여 어시스턴트에게 빨리 답변을 요청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 우리는 무려 14개월 동안 30번 이상의 연락을 시도했으나, 단 한 번도 콜백이나 답장을 받지 못했다.
그 와중에 연말정산 제출일이 지나 세무서에서는 독촉 편지가 왔고, 우리는 더욱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직접 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건 최선이 아니었다. 이미 협회에 수 십만 원의 협회비를 낸 상태였고, 우리의 개인정보 및 세무정보는 담당자가 갖고 있으며, 실제로 어디까지 진행됐는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임의로 한다고 협회에서 돈을 돌려줄 것 같지도 않았다. 어디나 그렇듯, 독일도 돈을 내기는 쉽지만 돌려받기는 매우 어렵고 분쟁으로 이어지기 쉽다.
혹시 담당자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었지만, 3주가 넘는 휴가도 멀쩡히 가고 예약이 찼다는 멘트도 나오는 걸로 보아 분명 신변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답답하지만 '정공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먼저 소득세 협회 본부에 정식으로 클레임을 하고, 세무서에는 상황 설명을 하고 증빙을 덧붙여 제출 기한일 연장을 요청했다. 또한 독일 소비자협회에 문의할 메일도 미리 작성해 두었다. 동시에 우리가 충분히 연락을 시도했다는 사진, 메일, 자료들을 모았다.
독일에서 어떤 분쟁에 휘말린다면 전화나 이메일, 심지어 메일에 쓰인 단어 하나조차 매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따라서 화부터 내기 전에(어차피 화내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를 악물고 조용히 증거를 모으는 게 현명하다. 물론 이 과정은 매우 피곤하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크다.
그로부터 4주 뒤, 본부에서 조차 답변을 받지 못하고 있다길래 우리는 휴가를 내고 직접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랬더니 왠걸, 담당자 지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강아지 3마리가 아주 밝은 표정으로 우리를 맞아주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날 역시 우리는 유의미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사흘쯤 지났을까, 담당자에게 장문의 이메일이 왔다. 무려 14개월을 꼬박 채우고 15개월째 받은 메일이다. 메일엔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다른 모든 일들을 제쳐두어야 했다"고 적혀있었다.
그래, 살다보면 별 일이 다 있을 수 있다. 부모님이나 아이, 혹은 가족이 아플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이 맡은 업무는 엄연히 본인의 직업이자 책임이지 않나. 아무리 급해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몇 개월 미뤄진다"는 메일 한 줄 정도는 쓸 수 있던 거 아닌가? 메일 쓸 시간이 없으면 전화기에 대고 한마디 말 할 시간쯤은 있지 않나? 그것도 안되면 어시스턴트에게 말을 전하면 될 걸, 그녀는 그중 단 한가지도 하지 않았다.
전혀 업데이트가 없는데 우두커니 14개월이 넘도록 돈만주고 기다릴 고객이 몇이나 있을까? 이건 아무리 참을성 좋은 독일인이었어도 한계치를 넘어 "업무태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상황이 그렇게 급박했다면 메일이 아니라 휴가를 가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는 독일의 느린 행정과 절차를 이미 지겹도록 겪어왔고, 일정 수준의 지연은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 일은 단순한 느림이 아닌, 책임 회피와 직무 유기로 느껴졌다. 시스템의 허술함도 문제지만, 결국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의 태도가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것이다.
신뢰는 그냥 주어지는게 아니라, 작은 응답 하나, 한 통의 메일 속에서 조금씩 쌓여가는 거라는 점을 그들은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이번 사건으로 우린 그 협회에서 완전히 탈퇴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추천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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