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드릴게요>, 정세랑의 글을 읽고 적은 글 1
모두가 자기중심적인 세상에서 조금씩 이타심을 배우며 살아간다. 세랑의 글은 선하다. 세랑의 글은 겨울날 언 몸을 녹여주는 따뜻한 어묵 같다. 그 말캉한 살이 내 안의 어쩌지도 못하는 매듭을 풀어버린다. 팔월의 한여름, 여느 휴가처럼 숲엘 다녀왔다. 이번엔 대전 치유의 숲. 정식 개장 전이라 한산했다. 거기서 새로운 걸 배웠다. 우리가 흔히 아는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그 아카시아나무는 명칭이 잘못된 거란다. ‘아까시나무’가 본래 것이라고. 인상적인 건 그 나무의 보호방식. 어린 것일수록 줄기가 얇고 가시가 많단다. 점점 커가며 줄기는 아름드리 나무가 되고 강해진 나무는 더 이상 가시가 없어진다고. 한참을 바라봤다. 입추가 지나자 바람은 선선했고 아까시나무는 향수처럼 공기 중에 흩뿌려졌다.
갓 심겨진 아까시나무보다 나는 나이가 많은데. 내가 너보다 가시는 더 많구나. 왜지?
내게 있는 가시를 생각했다. 수용소에 갇힐 때까지 남을 찌르는 줄도 몰랐던 사람들. 집단 면역이 형성되는 괴물이라 서로 해를 가하지는 않지만 밖으로 나가면 살아있는 바이러스가 되는 그들.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위해가 무섭다는 것을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생계를 턱밑까지 위협받고서야 속도를 줄이고 주위를 둘러보게 하는 것들. 옳다고 믿었던 삶을 스스로 전복시키고야 마는 것들. 코로나 19바이러스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이다.
내게 무해한 가시가 타인에게는 작고 날렵한 과도일 수 있다. 내게 선한 가시가 타인에게는 몸서리 칠만큼 도망치고 싶은 불쾌함 일수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해지 놓지 못했던 가시가 결국은 내 문제라는 것. 산림치유지도사(이하 산치사)가 말했다.
“스스로 강해지면 가시는 필요 없습니다.”
산보로 가벼워진 몸을 요가매트에 뉘였다. 여기는 무수정. 없을 무, 근심 수. 근심이 없는 정자라고 했다. 들숨 날숨을 내뱉는 사이 산치사가 밥그릇을 매만진다. 싱잉볼 명상.
찰나지만 고집과 아집들이 소라 등에 붙은 등껍질처럼 만져진다. 인지하는 즉시 고동 먹듯 하나씩 떼어 내고 싶은데 어림도 없다. 알긴 아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황망히 누워있는데 금세 잠이 든다. 산에서 내려와 세랑의 글에서 그 답을 얻게 됐다. 결국은 사랑. 가시를 녹일 수 있는 건 사랑밖에 없다. 옳다고 여기는 것을 물 제비처럼 던질 수 있는 것.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무엇을 위해서. 승균에게는 그것이 연선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의 목소리는 기꺼이 제단 위 인어가 된다. 나는 어떤 제단에 시장 바닥에 내팽겨진 생선처럼 나를 던질 수 있을까.
입추가 지나고 한더위도 복숭아처럼 물러졌다. 땡볕에 물러진 것이 몸뚱이인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마음까지 물컹해졌다. 연초에는 아삭했던 열심들이 점점 그럴듯한 변명으로 포장되어 간다. 팔월의 한복 더위를 지나며 묻는다. 목소리를 던지는 승균처럼 내게도 연선 같은 존재가 있는지. 가을날 성성하게 된 머리털이 핑계가 되지 않도록, 두 눈 부릅뜨고 해내야할 무엇이 너의 여름에 아직 남아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