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 천선란의 글을 읽고 적은 글
그것을 좋아하게 된 건 초등학교 3학년, 영숙이를 알고 나서였다. 말주변이 없던 나는 혼자가 익숙한 꼬마였다. 어디에 있든 나만의 경계가 있었고 그 안에서 안전하게 행복했다. 그 울타리를 비집고 들어온 건 영숙이의 살구였다. 쉬는 시간 10분은 잘만하면 살구를 5단까지 할 수 있는 올림픽. 4단까지 익숙한 손놀림에 방심은 금물이거니와 5단은 나머지 네 알을 우아하게 흩뜨려야 받아낼 수 있는 묘기였다. 그 아이와 나는 대게 다른 편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우리 팀이 자주 이겼다. 그게 뭐라고 그것은 나를 자주 으쓱하게 했다. 어린이의 세상에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존재의 키를 한 뼘씩 올려놓는다.
열일곱. 야자가 끝나고 영숙이가 말했다. “은진아 우리 떡볶이 먹으러 갈래?” 밥도 아닌데 먹으면 배만 차오르는 시뻘건 양념 떡을 영숙이는 참 좋아했다. 떡볶이를 안 좋아하는 나는 푹 익은 어묵이라도 먹을 생각에 가끔 영숙이를 따라나섰다. 뭐든 같이 해야 친구인 것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그날 말캉한 떡을 포크로 집으며 영숙이가 말했다. “은진아, 너 우리 초등 학교때 교실 뒤에서 살구 하던 거 기억나?” “응” “그때 나,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일부러 많이 져줬다? 몰랐지?” “.............어?” 분명 얇은 사각어묵을 먹는데 마치 떡을 한입 베어 문 것처럼 목이 막혔다. “왜? 왜 나랑 친해지고 싶었어?” 물어보고 싶은 말은 ‘여기 쿨피스도 하나 달라’는 영숙이의 말에 묻혀버렸다. 쑥스러웠는지 우린 그 순간 쿨피스를 원샷했다.
이윽고 나는 길쭉한 떡을 집었다. 어묵같이 입에 착 달라붙는 감칠맛은 없어도 씹을수록 뭉근한 게 달았다. 그날은 영숙이 만큼이나 떡볶이를 많이 먹었다. 나와 친해지고 싶었다는 이 아이 앞에서 어디까지고 올라가버린 마음을 데려올 수가 없어 벌건 얼굴을 하고 떡볶이로 도망쳤다.
아니,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매운 것을 좋아하는 영숙이처럼 불타는 사랑은 아니지만, 내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이 음식을 이제 나도 먹어보기로 했다. 때로는 꼬불꼬불한 라면사리를 건져 먹고 무심히 들어있는 채 썬 당근을 치즈로 감기도 하면서. 목 막혔던 가래떡과 말캉한 어묵은 어느덧 십 칠년째 나를 채워주는 소울 푸드가 되었다. 그 시절, 힘들진 않았지만 자주 외로웠던 내게 BTS처럼 훅 들어온 나의 우상 영숙이. 앞으로도 너랑 먹는 떡볶이가 가장 맛있을 것 같다. 영숙아!
추신.
은혜가 보경에게 못 다했던 이 말을 열일곱, 내 앞에 앉은 영숙이에게 해주고 싶다.
그때 떡볶이로 도망친 내 마음이 꼭 이랬다고. 그리고 어린 날의 그 외로움을 네가 알아줘서 참 고마웠다고.
‘돌아오는 길이 외로워, 엄마. 힘들지는 않은데 외로워. 외롭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 길을 외롭다고 부를 수 있을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