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사무실에 앉아 계란 껍질을 깐다. 한 손안에 감기는 묵직함에서 ‘탁’ 경쾌한 소리로 바뀌기 전까지의 고요가 두렵다. 이번엔 잘 까질까. 엊저녁 냄비 앞에 서 있던 나를 소환한다. 업무 시작 전이지만 이른 아침부터 만나는 직원들은 대개 비슷하다. 달걀 깨는 소리에 사무실의 정적이 잠시 흔들린다.
사랑과 증오는 매일 만나는 흰자와 노른자 같다.
껍질을 깠을 때 뭉근하게 보이는 흰자는 일상의 층위를 이룬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냉장고 앞 칸을 열어 유산균을 먹는다. 전날의 일기를 쓴다. 샤워 전 다시 주방에 들러 새싹보리를 타 마신다. 흰자는 이런 것이다. 굳이 포크가 없어도 되는 것. 달걀 샐러드를 만든다고 으깨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굴러가는 것이다. 내게 사랑은 평일의 시간 같다. 그것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할 필요는 없다. 공기 같이 편안하다. 때로 미세먼지가 있지만 그런 날은 그런 날대로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퇴근 후 밥을 차려먹고 좋아하는 차를 마시며 출근길에 아껴둔 책을 펼치는 일. ‘사랑’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지 않아도 한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면 나는 늘 그 자리에 있는 나의 하루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증오했다. 오래전 교실에서 배웠던 지구의 핵과 마그마처럼 노른자는 일상 안에 있다. 때때로 아침에 샤워하면서 어제에 잠식된다. 할 일에 밀려 한켠에 쌓아둔 감정들이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오롯이 나를 향해 부서져 내린다. 속수무책으로 하루를 맞이하는 것이다. 묵은 감정을 벗겨낼 시간도 없이 출근 시간만 야속하게 다가온다. 그럼 다시 노른자를 품고 매끄러운 흰자의 세계에 올라탄다. 지하철에는 단정하게 차려 입은 개별적인 흰자들이 있다. 죄다 스마트폰에 충성이라도 맹세했는지 언제나 머리를 조아리며 손가락은 그저 공손하게 올려져있다. 답답하다. 한번은 피아노 건반 누르듯 맞은편에 앉은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빤히 쳐다본 적이 있다. 그 누구도 누군가 자신들을 응시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순간 아껴둔 치즈에 곰팡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슬픔이 차올랐다. 불행히도 인생을 바꿀 치트키는 저 유튜브에 있는 것이다. 매일 20분이라도 구독하는 재테크 영상도 좀 보고, 전날의 시황도 체크하고 주요 경제 헤드라인이라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윌라를 듣고 마스크 속 입술을 오므렸다 벌리면서 오늘의 문장도 좀 읽어줘야 내일의 흰자가 있는 것이다. 노른자는 자신을 보고 패배감에 빠진 나를 놓아주질 않는다. ‘어서 너도 들어와야지. 그리 태평하게 앉아 갈 일은 아니잖아?’ 속삭인다.
그렇게 나는 매일의 지옥철에서 흰자 밑에 있는 노른자의 세계로 잠긴다. 먹고 사는 게 다는 아니지만 동시에 잘 먹고 잘 사는 게 전부인 이 삶을 증오한다. 기계에 기름칠하듯 더 나은 부품이 되기 위해서 기름칠하고 조이는 일상에 넌더리가 난다.
사무실에 앉아 계란 껍질을 깐다. ‘탁’하고 죽비처럼 노른자의 세계가 닫힌다. 텀블러 가득 물을 채우고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는다. 그렇다. 당신이 아는 흰자의 세계가 다시 열렸다. 진짜 계란은 노른자를 품은 것이다. 노른자 없는 계란은 부드럽고 때때로 목 막힘에 야쿠르트도 필요 없겠지만, 그것은 계란이 아니다, 생(生)이 아닌 게다. 그 어원대로 ‘초목의 싹이 땅을 뚫고 올라오듯’ 내면의 노른자를 끌어올려 우리는 진짜 생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