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iwan, 2015.04.30 - 2015.05.04]
영국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 Amber는 나의 대만 여행에 이틀간 동반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맨 처음 내가 페이스북을 통해 그녀에게 연락을 했던 건 그냥 저녁이나 함께 먹잔 의도였는데, 그녀 자신은 물론 친구들의 주말까지 나에게 헌납하는 호의를 내게 베풀어준 것이다.
5-6년 만에 첫 만남. 그 인연의 질김보다 놀라웠던 것은,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형편없나 하는 것이었다. 그녀에 대한 나의 모든 기억은 틀려 있었다.
1. 나는 그녀가 나보다 어린 동생인 줄 알았는데 실은 4살 많은 언니였고
2. 그녀의 sister 제시가 그녀의 언니인 줄 알았는데 실은 동생이었다.
3. A, B, C, D 등등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린 줄 알았는데 그런 적 없었는데, 왜냐면
4. 그녀는 내가 영국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주로 떠났기 때문이다.
이건 무슨. 티비는사랑을싣고를 통해 첫사랑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가가가가가'가 아닌 것과 같은 경우.
이 정도면, 거의 반십년만에 연락한 나에게, 너는 누구니?라고 그녀가 물어도 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자신 있게 그녀에게 연락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장의 엽서 때문이었다.
그녀가 영국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내온 엽서 한 장. 그 안에 분명 그녀와 내가 딱 붙어서 브이를 하고 있으니까. 뒷면 편지엔 대만에 꼭 오라고도 쓰여 있으니까. (물론 나도 역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한국에 꼭 오라고 말하고 다녔다) 나의 모든 기억은 그 엽서에 기대고 있었고, 그녀도 마찬가지. (진실인진 알 수 없지만) 그녀 방에는 우리가 찍은 사진이 아직도 붙어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사진 한 장에 의존하는 우리의 기억은 얼마나 미약하고, 형편없으며, 못 미더운가. 나는 그녀와 기억의 조각을 맞출 때마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계속 생각했다. 애이드리언이 한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그녀와 내가 가진 부정확한 기억들이, 엽서 한 장과 만나면서 빚은 확신. 그게 우리의 역사이고 관계였다. 나는 이제 모든 기억이 모호하다. 우리가 영국에서 어디를 함께 놀러 다녔는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헤어졌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고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 다시 또 부정확한 기억을 가지고 불충분한 문서를 쓰려하고 있다. 여행이 끝난지 벌써 3주. 많은 것들이 다시 또 희미해진 이 시점에 나의 여행을 기록하는 것이다. 앰버와 함께 다녔던 곳도, 혼자 다녔던 곳도, 내가 본 몇 안 되는 지점들과, 먹었던 음식들까지. '정확함'과 '충분함'을 객관적으로 계량할 수는 없지만 부디 이 기록이 전보다는 더 사실에 가깝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