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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neon Jul 08. 2017

시인과 고독

박준 김경주 장석주의 이야기들 감히 발췌


50.

나는 그곳에서 배달 음식 같은 것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철지난 사랑이나 함부로 대했던 지난 시간 같은 것에 기웃거린다. 마음처럼 되지 않았던 과거의 일들과 마음만으로는 될수 없을 미래의 일들을 생각한다. 독선의 끝에는 더욱 날 선 독선이 기다리고 있음을 목격한다. "나는 시간 속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영원을 향해 몸을 돌려보았다. 발을 딛고 설 수조차 없는 곳이었다"라는 에밀 시오랑의 문장을 종종 떠올려보기도 한다.

그렇게 며칠 동안 고립의 시간을 보내다보면 그제야 내가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고 무겁게만 여겨졌던 내 인연들의 귀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맑은 눈빛을 다시 보고 싶어한다.

몇 해 전 좋아하는 선배 시인과 차를 마시면서 이런 나의 괴팍한 습관을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 선배는 자신도 나와 비슷한 버릇이 있다고 반가워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고독은 외로움과 다른 감정 같아.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 생기는 것일 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그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다 다시 금새 고독해지기도 하면서."


                                               - 박준, 고독과 외로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난다, 2017>




103.

고독은 외로움과 다르다. 외로움이 자신의 살에 대한 그리움에서 오는 시간이라면 고독은 자신의 피를 생각하는 시간에 다름 아니다. 살은 외로울 때 피 바깥에서 더욱 붉어지지만 피는 고독할 때 살 속에서 가장 희미해진다. 외로움이 자신의 감정에 길들여지는 애조哀調라면 고독은 자신의 감정을 밀어내는 산조散調에 가깝다. 우륵의 가야금이 외로운 소리를 내듯이, 왕산악의 거문고 소리에 피들이 문득 고독해지듯이, 외로움은 언제나 타자를 향해 외치지만 고독은 타자로부터 가장 멀리 있을 때 스스로의 단독으로 의사소통을 시작해간다. 외로운 자들은 늘 뜨겁지만 고독한 자들은 늘 서늘하다. 우주는 고독한 생명을 조금씩 알아가는 세계이다. 한 사람의 우주에 대해 우리가 자신의 피를 거쳐 태어난 시간을 마련해갈 때 사랑이 시작된다. 그때부터 -사랑을 시작하기 시작하는- 그 사람의 눈은 어느 이름 모를 행성의 궤도처럼 떠다니기 시작한다.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은 하나의 행성에 잠시 머물러보는 거다. 그 행성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돌아가는 방향을 잃어버리는 이미지를 제공해줄 뿐이다. 고독은 방향이 없는 이미지다. 자신의 태생을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아직 태어나지 못했다는 태기胎氣를 끊임없이 느끼고 살아야하는,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심술스럽고 우아한 이미지, 고독은 자신을 다른 인간으로 옮기고 있는 자의 현실이다. 외로움이 섬의 이미지에 충실하다면 고독은 아직 발견되지 못한 채 물속 깊이 떠다니는 슬픈 대륙의 이미지다.

                                                                                                                그들은 핏줄이다.


고독에 관해 궁금해질 때, 절실하고 우수에 가득 차 있으면서 우아한 간증이 그리울 때마다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꺼내본다. (...)

자시늬 피를 그리워하도록 태어난 생명체는 그리움을 앓는다. 그는 자신의 피 속으로 흘러 들어가기 위해 수백 년 동안 바람이 되고 음악이 되고 짐승이 되어 떠돈다. 사람들은 그의 날카로운 송곳니나 그의 놀라운 수명壽命에 압도당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그리움에 경악한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드라큘라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피 눈물이 고인다.

                                                        그는 핏줄을 찾고 있다.

                                                                                            그는 고독하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고독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들어와서 특별한 피가 되어 울렁이는 고독의 세계에서 그는 죽지 못한다. 피가 말라가는 고통으로 밤마다 눈을 뜨고 피를 데리고 떠나는 몸으로 그는 여행을 멈추지 못한다. 시를 쓰는 우리의 언어는 늘 그 피 곁을 서성거린다.


                                        -김경주, 핏줄 몸속으로 숨어버린 살, <밀어: 몸에 관한 시적 몽상, 문학동네, 2012>




270.

태어나는 순간 내가 울음을 터뜨렸던 것은 고독했기 때문이다. 낯선 것들과 대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공적으로 지탄 받을 만한 행위도, 비밀스러운 그 무엇도 아니겠지만, 나는 어쩐지 고독했다. 먼저 태어난 사람들에 의해 바다 저쪽으로 함부로 던져지는 느낌이 들었다. 약간 수치스러웠고, 약간 혼란스러웠다. 나는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는 없었던 탓도 있다. 납득이 가는가? 이 지구에 막 도착한 한 신생아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혼자 막막하게 낯선 세계에 도착하는 여행자를 상상해보라. 해는 저물고, 황혼의 붉은 빛이 길게 거리를 비춘다.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낯선 도시에 여행자는 지금 막 도착했다. 여행자의 마음을 파고드는 불안을, 외로움을, 두려움을 가만히 만져보라. 누군가가 죽고 누군가는 태어나서 이 세계에서 나는 혼자다. 혼자라는 자각과 동시에 고독이 쇠꼬챙이처럼 날카롭게 몸을 꿰뚫는다. 미처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피도 나지 않는 그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찰나에 눈에서는 눈물이 솟는다. 나는 깨닫는다. 고독하니까, 사람이다!

고독이 삶의 희귀한 사태는 아니다. '고독한 개인'은 어디서나 발견되는 흔한 현상이다. 고독의 본질은 '혼자'라는 데 있다. 악의 진부함에 물든 무리에게서 떨어져 '혼자' 떠돌 때, 낙오자의 느낌을 갖는 건 불가피하다. 무리를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새벽에 나는 고독했다. 그래, 이 새벽의 빛과 어둠, 바람에 부스럭거리는 마른풀 소리, 일찍 깬 수탉의 울음소리, 교접하는 자들의 저 짐승 같은 신음들, 죽어가는 자의 처절한 단말마, 신생아들의 울음소리를 남김 없이 기억하마! 나는 이 고독으로 빚어진 단 하나의 문장을 완성할 것이다 흙벽을 긁어 입에 털어넣으며 나는 내 뼛속에 고독의 문자 하나하나를 각인했다. 내가 기댈 수 있었던 위안은 사람은 고독 때문에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고독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된다. 다만 사람들은 제가 고독하다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고독하다는 것은 어쩐지 내면의 나약성을 드러내는 징표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고독은 나약함이 아니다. 고독한 순간은 내면의 견인주의를 키우는 계기적 순간이다. 고독한 자만이 강해질 수 있다. 고독이 올 때 겁먹지 말고 그것을 회피하지 말자.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씩씩하게 받아들이자. 혼자 밥 먹고, 혼자 일을 도모하고, 혼자 잠든다. 섣부른 사교의 쾌락이나 노릿한 연민은 거절하라. 징징대지 말고 그렇게. 그렇게 고독의 제왕학을 배우고 익히며 묵묵하게 10년, 20년, 30년을 견뎌보자. 고독은 나의 자아에 떨어진 벼락이요, 불꽃이다! 그 불꽃으로 나는 빛의 영혼이 되어 타오를 수 있다. 나는 나를 낳은 고독의 태반을 삼킨다. 나의 고독은 나의 명예!

한때 나는 고독 씨에게 박해를 받고 폭행을 당했다. 미처 고독 씨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고독 씨는 낯선 방문자였다 절대적이고 무서운 타자였다. 나는 고독 씨를 피해 무작정 달아날 궁리만 했다. 엉거주춤 하다가 고독 씨에게 뒷덜미를 붙잡혀 버렸다. 그 순간 나는 곧 깨달았다. 고독 씨야말로 저를 토벌하는 세계에서 도망친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고독 씨는 마른 꽃잎보다 더 메마르고 나약하다. 그런 고독 씨가 어쩌다가 나의 내면을 은신처 삼아 도피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엾은 고독 씨! 무리의 세상은 무수한 고독 씨들을 하나하나 발본색원해서 모조리 처형하고 그 삼족마저 말살시킨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나의 내면을 은심처 삼아 숨은 고독 씨는 늘 불안에 떤다. 그 고독 씨가 어느 날 아침 내 문을 두드렸다.

"혼자 있기 싫어." 고독 씨는 뱀처럼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무슨 고독이 그러냐?" 내가 말한다. "날 뭐라고 비난해도 좋으니 나와 함께만 있어줘." 고독 씨의 표정이 한없이 불쌍하다. "고독이라면 고독답게 굴어. 왜 이래? 아마추어도 아니면서." 나는 쌀쌀맞다. "난 혼자 있는 게 두려워. 불안이라는 도끼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내 이마를 찍어!" 고독 씨는 사뭇 애절하다. "고독의 가문에서는 혼자 있는 걸 오히려 영예롭게 여겼어. 혼자 있는 게 두렵다는 건 고독답지 않아. 고독의 가문이 쌓아온 명성을 갉아먹는 짓이야. 한마디로 더러운 행위지." 나는 더욱 쌀쌀맞다. "혼자 있으면 죽을 것만 같은데." 고독 씨가 헐떡이며 말한다. "그래도 견뎌봐. 넌 고독이잖아." 나는 끝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저 고독 씨의 눈에 가득한 불안을 보라. 고독 씨의 영혼은 불안하다. 고독 씨야말로 진짜 고독한 처지다. 내가 그걸 안다고 해서 고독 씨를 어떻게 해줄 수는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고독 씨는 바로 내 그림자니까.

고독은 내면 자원을 소모시키는 사태가 아니다. 고독을 재능의 도약대로 삼아라. 고독의 통찰력을 빌려 써라. 고독은 문명발달과 모든 예술 창조의 원동력이었다. 고독이 없었다면 파르테논 신전도, 타지마할도, 석굴암도, 스톤헨지도, 금강경도, 코란도, 성경도, 우파니샤드도, 천부경도 없었을 것이다. 고독이 없었다면 예수도, 부처도, 바울도, 가섭도, 단테도, 괴테도, 퇴계도, 다산도 없었을 것이다. 고독은 곧 어머니, 대지, 하늘이다. 고독이 민주주의와 시장과 학문과 예술의 변영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바다. 나는 고독의 자궁에서 나와 고독을 머리에 이고 고독을 딛고 꿋꿋하게 서 있다. 내 안에 고독이 울울창창하다. 내 안이 도서관이라면 고독은 무수한 장서들이다. 나는 날마다 서가에서 고독의 장서들을 꺼내와 읽는다. 고독은 한 줄기 빛, 한 소절의 노래, 하나의 정금! 제안에 벼람을 품고 사는 고독만이 세상의 모든 출생과 혼례를 축복할 수 있으리라.


                                                                   -장석주, 고독 사용법, <VOGUE KOREA , 두산매거진,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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