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01, Hedwig and the Angry Inch
뮤지컬배우 마이클리를 좋아하지만 이번 <헤드윅>은 예매를 선뜻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런 자막 없이 영어로만 공연을 한다고 했기 때문. 원체 무슨 노래든 가사에 집중을 잘 하지 못해서 뮤지컬 볼 때마다 정신적 에너지 소모가 큰 편인데 심지어 영어로 한다니. 아무리 믿고 보는 마이클리라고 하지만 큰 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거의 '노래 멜로디나 듣고 오자'하는 심정으로 마이클리 캐스팅을 보고 왔는데, 결론적으로는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거기엔 여러 이유가 있다.
1. 내한가수의 콘서트 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영어로 연기하는 것에 대한 명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캐스팅도 전부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연은 '독일 출신의 글로벌 톱스타 헤드윅이 대학로 홍익대 아트센터에서 내한공연을 한다'는 컨셉으로 시작한다. 헤드윅은 콩글리시를 섞어가며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이 글로벌 투어 중 한국을 방문한 외국 가수의 모습이다. 게다가 유창하고 버터리한 미국식 영어가 아니라 살짝 둥글딱딱(?)한 유럽식 영어라 알아듣는 게 어렵지 않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내용 이해가 수월하다. 또한 극 자체도 헤드윅의 모노드라마처럼 흘러가기 때문에 주인공들의 대화에 나만 못 끼는 것 같은 소외감도 별로 없다. 그러니까, 뮤지컬을 보러 간 게 아니라 헤드윅 단독 내한 콘서트를 보러 온 거라고 생각한다면 영어는 큰 거부감 없이 납득이 되는 셈.
2. 캐릭터 '헤드윅'과 배우 '마이클리'의 싱크로율
극 중 헤드윅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misfit이다. 성전환 수술에 실패하여 완전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삶을 살고, 태어난 독일에든 이민 간 미국에든 온전히 소속되지 못한다. 사랑한 두 남자, 루터와 토미에게 모두 버림을 받음으로써 심리적으로도 고립된 상태다. 거기에 동독과 서독이 통일하는 시대적 배경까지 합쳐지면 이건 뭐. 이런 디아스포라도 또 없다 싶다.
한편 마이클리는 미국이나 한국 무대 그 어디에든 완전히 융화되기엔 한계가 있는 배우. 그의 노래와 연기력 자체는 더할 나위가 없이 훌륭하고, 그 덕에 양국에서 커리어를 탄탄하게 쌓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양인으로서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기엔 역할에 한계가 있고, 한국에서는 그의 한국어 발음이나 어투 등 대사 전달력이 항상 단점으로 지적 된다. 이렇게 둘의 상황이 비슷해서인지 마이클리의 헤드윅은 더욱 진정성 있게 표현된다. 물론 영어 사용이 자유로워서 연기가 더 잘되는 이유도 없잖아 있겠지만, 관객은 뭐가 어찌 되었든 좋은 연기를 보면 그만이다. 100%로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 마음이 와 닿았으니 만족이다.
3. 극의 대중성과 캐스팅의 다양성
제작사가 굳이 왜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영어버전의 마이클리를 무대 위에 올렸는지 고민을 해봤다. 사실 <헤드윅>은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뮤지컬 중 하나. 오픈런도 아니면서 2005년부터 지금까지 11 시즌, 총 2천여 회의 공연이 이어졌다. 전 세계 <헤드윅> 중 가장 많은 회차를 열고,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게다가 <헤드윅>은 영화도 꽤나 유명하다.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명작 영화를 (줄거리라도) 접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즉 웬만한 뮤지컬 팬, 아니 넓께 보면 일반 대중들에게 <헤드윅>은 익숙한 이야기에 속하니 조금은 무리수 실험정신을 발휘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을 것.
이번 시즌 헤드윅에 캐스팅된 배우는 다섯 명이다. 선택지가 이렇게 많은데 마이클리가 영어로 연기함으로써 극의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건 오히려 반가울 일이다. <헤드윅> 자체가 소수자의 이야기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내가 본 회차만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유독 공연장엔 외국인 관객이 많이 보였다. 보다 많은 사람과 좋은 작품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물론 이건 다 내 추측이고, 제작사의 실제 의도는 '영어버전도 보고 한국어도 보고 돈 두배로 써라' 이런 거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아무럼 어떠냐. 결론적으로는 좋은 시도였다.
4. the Origin of Love를 원어로 듣는 기쁨
<헤드윅>의 줄거리는 한마디로 헤드윅이 온갖 천지 풍파를 다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극의 거의 모든 넘버가 다 좋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건 분명 the Origin of Love. 이 곡은 원작자가 뮤지컬을 구상하는 시점에 이미 완성했다고 하니, 말하자면 극의 주제곡이나 마찬가지다. 철학자 플라톤의 <향연>에 근거를 두고 쓴 가사를 원곡으로 듣는 것은 큰 기쁨인 동시에 작품을 더욱더 깊이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개인적인 생각이야 다 다를 테지만 이 곡을 원어 라이브로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마이클리 헤드윅은 볼만한 공연이었다. 헤드윅의 이야기에 공감을 하는데 영어는 생각보다 큰 장벽이 되지 못한다. 생각보다 원어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이번 <헤드윅>의 성공으로 또다른 실험적 무대가 많아졌으면 한다.
(...)
Last time I saw you, we just split in two
You were looking at me, I was looking at you
You had a way so familiar, I couldn't recognize
'Cause you had blood on your face, I had blood in my eyes
But I could swear by your expression that
The pain down in your soul was the same as the one down in mine
Oh that's the pain that cuts a straight line down through the heart, we call it love
We wrapped our arms around each other, tried to shove ourselves back together
We were making love, making love
It was a cold dark evening, such a long time ago and by the might hand of Jove
It was a sad story how we became lonely two-leg creatures
The story, the origin of love
(...)
+
<헤드윅>에는 예쁜 굿즈가 많았다. 웬만하면 프로그램북 이외에 굿즈는 안사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주섬주섬 스튜핏이 되어버렸다. 그저 에코백을 안 산 내가 대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