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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neon Oct 13. 2017

아름다움 잔혹사

2017.09.17, 타지마할의 근위병

단 한번 봤을 뿐인데 너무나 강력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는 이야기를 종종 만난다. 최근에 만난 중엔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이 그러하다.

관람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 무대 연출, 배우들의 표정, 대사까지 기억이 난다. 한 번만 더 보고 싶은데 이번 주면 막을 내린다고 하니 하찮은 리뷰로 아쉬움을 나 혼자 달래 보려고 한다. 글은 길어질 것이고 스포일러는 난무할 것이다.





타지마할은 인도 무굴 황제 샤자한이 사별한 아내를 위해 세운 묘소이다. 당대 최고급 건축자재와 온갖 금은보화를 각국에서 들여와서는 2만여 명의 인부를 써서 착공하고, 22년 만에야 완공했다. 완벽한 좌우대칭과 모자이크 장식, 하얗게 빛나는 대리석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 불린다. 샤자한은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이 유일무이하길 바라며 공사에 참여한 2만 명 인부의 손을 모두 잘랐다고 한다.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은 그 2만 명 인부의 손을 잘라야 했던 무굴 왕국 최말단 근위병 후마윤과 바불에 관한 이야기다. 


후마윤 최재림과 바불 이상이 / 사진은 달컴퍼니


후마와 바불이 4만 개의 손을 잘라야 했던 이유는 하나다, 황제 샤자한의 명령. 이는 단순하고도 절대적이다. 하는 일이라고는 밤새 타지마할을 등지고 서서 보초를 서는 게 전부인 최말단 근위병들이 감히 이 명령에 거역할 수는 없다. 그래서 둘은 인부 2만 명의 손 4만 개를 자르고, 잘린 자리를 인두로 지진다. 단 하룻밤 사이에 그 일을 기어이 해낸다.


<타지마할의 근위병>은 후마와 바불이 손을 자른 현장을 그대로 재현한다. 무대 위엔 피가 흥건하고 핏내가 진동한다. 잘린 손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고, 배우들이 움직일 때마다 핏물이 객석 사방팔방으로 튀긴다. 충격과 공포의 현장 가운데, 후마와 바불이 있다. 


Omar Metwally and Arian Moayed at Atlantic Theater Company / Photo by Doug Hamilton


쉽게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후마는 순간적으로 눈이 멀고, 바불은 손에서 칼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4만 개의 손을 하룻밤만에 잘랐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흥미로운 건 이제 그다음부터다. 상황을 받아들이는 두 친구의 태도가 다르고, 그에 따라 극을 해석하는 방향이 또 다르다. 



1. 체제에 순응하는 자와 반발하는 자 

후마와 바불은 절친이지만 성격은 정반대다. 후마는 아무도 관심 없는 보초 업무도 성실하게 해내는 원리원칙주의자인 반면, 바불은 수다스럽고 호기심 많은 자유이상주의자다. 후마는 고위직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성공하는 미래를 추구하며, 바불은 아름다움이나 후마와의 우정 같은 가치를 추구한다. 4만 개의 손을 자른 후의 태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후마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견디기 힘든 업무였지만 위대하신 황제의 명령이고, 그걸 어기는 건 불가능했다. 어쨌든 어려운 일을 해낸 걸 인정받고 승진해서, 결과적으로 꿈의 직장인 하렘(!)에서의 근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바불을 위로한다. 그러나 바불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타지마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그 아름다움을 만든 손을 잘랐으니, 세상에 더 이상의 아름다움은 없을 것이고, 그러니 본인이 바로 아름다움을 죽인 것이라며 울부짖는다. 정신이 나가서 황제를 죽여버리겠다고 말한다.  

후마는 어쩐지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소시민의 모습 같이 보이고, 바불은 뱀에 물림으로써 B612로 돌아가는 어린왕자나 세상에 적응 못하다가 물에 빠져 죽는 한스 (수레바퀴 아래서)의 모습 같이 보인다. 웬만한 책이나 영화 등에서 후마 캐릭터 = 비판과 자기반성의 대상으로, 바불 캐릭터 = 연민과 사랑의 대상으로 그려지는데...



2. 거기엔 더 나쁜 것도, 혹은 더 나은 것도 없다 

<타지마할의 근위병>에서는 조금 다르다. 후마는 나빠! 바불이 불쌍해!라고 전혀 단언할 수 없다. 우선 후마에 대한 변론을 좀 하자면, 

(1) 그 역시 자신이 행한 일에 괴로워한다. 그도 바불 못지않게 자유와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세상에서 새가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고, 새들의 울음소리를 다 구분한다. (뻔한 얘기지만 새는 원래 자유의 상징) 그런 이가 아름다움을 죽이며 바불만큼 슬프지 않았을 리가 없다. 

(2) 다만 다른 방도가 없었을 뿐이다. 그는 평생 황제is진리인 세상에서, 아버지에게 인정 못 받아 기죽은 채 살아왔다. 게다가 본인의 생사가 달린 문제인데 황제의 말을 거역하는 건 어불성설.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다만 수습하고 내일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침이면 죽을 만큼 싫어도 출근해야 하는 나나 당신처럼.


반면 바불은 아름다움을 죽였다고 슬퍼하고 후회하지만, 그런다고 그가 손을 자른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생각난 건 <더 리더>의 주인공 한나.

The Reader, 2008

한나는 2차 대전 때 아우슈비츠 교도관으로 일을 했다는 죄로 재판에 불려 나간다. 그는 사실 문맹이라 나치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본인의 업무를 했을 뿐인데. 어리바리한 한나는 같이 일했던 이들의 죄까지 덤탱이로 쓰고는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교도관으로 일한 게 뭐가 잘못인 건지 이해하지도, 반성하지도 못하던 한나는 훗날 감옥에서 글을 배우고 나서 자신이 저지른 일을 깨닫고는 죄책감을 못 이겨 자살을 한다. 그리고 본인이 평생 모은 돈을 아우슈비츠 피해자들을 위해 기부한다. 하지만 아우슈비츠 생존자는, "그래서 어쩌라고"라며 그 돈을 받지 않는다. 한나가 문맹이어서 모르고 행동한 일인들, 그가 나치에 부역하고 유대인들을 죽게 한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바불이 아무리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고 그래서 평생을 괴로워했다고 해도 그가 4만 개의 손을 자른 사실, 아름다움을 죽인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물론 비난의 대상은 바불이 아니라 그런 엽기적인 일을 명령한 황제, 그의 탐욕스러움과 오만함, 독재정권일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바불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3. 우리 모두는 4만 개의 손을 잘랐다 

누가 더 잘했고 못했고를 따지고자 하는 게 아니다. 아름다움을 죽인 후마와 바불 역시 자신들의 삶을 구원할 길이 없는 건 마찬가지. 비록 최말단 근위병이지만 그들의 삶엔 과거 숲에서 뛰놀던 날들을 떠올리거나 새소리를 듣고, 상상 속 발명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다. 그 소박하고 인간적인 즐거움, 행복감은 4만 개의 손과 함께 절단되어 버렸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죽인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셈. 이런 상황에 비이성적인 현실을 납득했든 아니면 반발을 했든 그 태도는 따질 것도 못된다. 더불어 우리에겐 잘잘못을 비난할 자격도 없다. 

<타지마할의 근위병>은 아름다운 타지마할에 얽힌 잔혹한 설화를 소재로 한 시대극이지만 한 장면 한 장면 모두 현시대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힘의 논리로 세상의 정의, 평화, 아름다움이 죽어가고 있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 그 상황에 나라고 자유로울 수 있나? 아니다. 나 역시 아름다움의 말살 현장에 후마 혹은 바불로서 참여하고 있다. 이를테면 성추행과 폭언이 오가는 회식자리에서 나 혼자 살겠다고 화장실로 숨어버리며. 마두역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나물 파는 할머니에게서는 시선을 돌리고, 그 앞 키오스크에서 오천 원짜리 로또를 사며. 그리고 로또를 사면 부모에게도 말 안 하고 나 혼자 쓰겠다고 상상을 하면서. 그렇게 사소하고도 평범하게, 나도 4만 개의 손을 잘랐다. 후마 바불과 함께, 평생을 아름다움을 죽이는 데 쏟고 있다.

아름다움을 죽이며 후마와 바불의 소소하고도 평범한 일상이 파괴되었다면, 내 경우는 예민한 감각이 무뎌지고 있다. 불의를 보고도 무력감과 패배감만 느껴질 뿐 뭔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덜하다. 누군가는 이걸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말을 했지만, 내 영혼이 함께 파괴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모든 게, 이렇게 끝나버릴까?



4. 아름다움은 죽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 중 다행이라면, 늙어버린 후마는 여전히 새의 울음소리만으로도 이름을 기억해낸다는 것. 바불과 숲 속에서 뗏목을 만들어 숨어놀았던 어린날을 그리워한다는 것. 그러면서 자신의 행동을 자책한다는 것. 그는 과거보다도 더 보잘것없고 나약한 존재이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신만 붙들고 있으면 무서운 뱅갈호랑이가 나타나도 잡아먹히지 않는 듯이, 그의 삶이 산산조각 났을지언정 마음 한편에 아름다움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다. 

Raffi Barsoumian and Ramiz Monsef / Photo by Michael Lamont


이 극이 시사하는 게 단순히 "권력이 아름다움을 파괴한다" 혹은 "우리 모두 공조자"라고 읽는다면 너무 비극적인 해석이다. 다행스럽게도 아름다움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정말 촌스런 비유지만 판도라의 상자의 구석 끝에 희망이 있었던 것처럼 아름다움은, 인간의 죄책감 안에서 생명을 유지해나간다. 물론 이 죄책감 (혹은 자기반성, 양심)에게 대단한 힘은 없다. 후마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늙고 힘없는 근위병으로 늙어버린 것처럼. 또한 아름다움이 죽지 않는다고 해서 그 대척점의 힘/권력이 약해지거나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의 세상이 전례 없이 잔혹한 것처럼 말이다.

다만 아름다움에게 온전한 패배란 없다. 피떡이 되도록 매 맞고 손발이 잘려나가게 되는 잔혹한 역사 속에서도 살아나간다. <타지마할의 근위병>이 무대 위에 피 웅덩이와 썰린 손을 흩뿌려두고, 배우들의 온몸에 피칠갑을 하면서까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렇게 사실적이고 다행스러운 이야기다. 사실적이라 너무 슬프고, 다행스러워서 아름다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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