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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는언니 Jul 13. 2016

15. 밥

나쁜 여자는 살아서 가고 싶은 곳, 어디든지 간다.


카오산 로드의 여행자 식당. 주문한 볶음밥이 뜨거운 김을 솔솔 내며 나온다. 지금쯤 남편도 밥을 챙겨 먹고 있겠지?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며 밥 한술을 뜨려는 찰나, "Hey~ Bob(밥)!" 건너편 자리에 앉아있던 여행자가 말을 건네온다. 밥? 의아해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그는 말했다. 난 아일랜드에서 왔는데 Bob은 친구란 뜻이야. 그거 맛있어? 나는 볶음밥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국말로 이걸 '밥'이라고 부르거든. 응. 맛있어.

   

'밥'이라는 말에 괜스레 놀란 나. 아줌마들이 잠시라도 집 떠나기를 망설이고 주저하는 것도 알고 보면 다 그 놈의 '밥' 때문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에세이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를 읽다가 빵- 터진 대목이 있는데 그녀가 외출을 할 때 남편이 꼭 묻는 한마디가 있다고 한다. 


그럼 밥은? 







밥 걱정. 이건 정말이지 만국공통인가 보다. 우리는 인사말도 밥으로 시작하지 않는가. 밥은 먹고 다니냐? 송강호의 명대사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남편은 아내가 곰탕과 카레를 한 솥 끓이기 시작하면 덜컥 겁부터 낸다는우스개 소리가 있다. 또 어디 가나 싶어서. 곰탕은 남편용, 카레는 아이들용! 나도 몇가지 반찬을 만들어 놓고는 멀리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많다).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열어보니 아 글쎄. 반찬들은 그대로 있고 싱크대에는 언제 먹었는지 모를 늘러 붙은 냄비와 라면 봉지, 빈 치킨 박스만 나뒹굴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그저 꺼내서 먹기만 하면 되는데! 얼마나 쉬운 일인가? 이보다 더 쉬울 수는 없는 일이다.


1. 냉장고 문을 연다. 
2. 반찬 통을 꺼낸다. 
3. 뚜껑을 연다. 
4. 먹는다! 


그랬더니 냉장고에 반찬이 있는지 몰랐다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장에 친구들에게 서베이를 실시했다. 그 결과, 예상과는 달리 남편은 ‘정상’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다른 집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남자의 뇌 구조에는 '냉장고에서 음식 꺼내먹기' 센서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다. 여자의 뇌 속에 '고장 난 기계 고치기' 센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듯이. 


나는 작전을 바꿨다. 마치 성경을 읊듯이. "밥을 할 줄 아는 자는 밥을 먹을 것이요, 라면만 끓일 줄 아는 자는 라면만 먹을 것이니, 이는 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니라..." 이렇게 선포하고 위풍당당하게 집을 떠나도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밥 걱정이 들어앉아 있다. 밥 먹다 말고 밥 챙겨 먹으라고 카톡을 보낸다. 그 시간, 그는 축구를 보며 라면을 끓여 먹고 있을 것이다. 안 봐도 비디오지. 라면이 생명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면 회사에 감사의 키스라도 날려줘야 할까. 굶어 죽지 않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낯선 곳으로 향하는 기내 안. 드디어 밥 시간! 이 시간이 되면 잠들었다가도 저절로 눈이 떠지고, 아직 자고 있는 낯 모를 이웃 승객을 식사하시라고 깨우게 된다. 패키지 여행을 간다는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불쑥 묻는다. 
아가씨는 결혼했수? 
네. (아가씨는 결혼했냐니?! 참 이상한 질문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출장가나 봐? 
아뇨.. 여행가요
혼자? 그럼 신랑은 어쩌고?
. . . . .


아주머니는 나란히 앉은 아저씨와 서로 다른 메뉴를 주문해 오순도순 즐겁게 나눠 드신다. 더하고 빼고도 없이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착한 여자는 죽어서 천당에 가고, 나쁜 여자는 살아서 가고 싶은 곳, 어디든지 간다고 했던가. 어쩌나. 나는 끝까지 나쁜 여자로 남을 것 같은데. 단점이라면 치킨이냐 생선이냐의 사이에서 갈등해야 한다는 것. 혼자 먹는 기내식 밥이 조금 쓸쓸하기는 하다. 하지만 달고 맛나게 먹는다. 왜냐. 아줌마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바로, '남이 해준 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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