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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는언니 Jul 20. 2016

16. 슬라이드

밥벌이의 지겨움, 자유의 배고픔 


인생에서 밥이 중요하기는 하다. 밥을 먹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밥을 먹어야 산다. '밥' 때문에 지겨운 직장도 버티고 떠나고 싶은 욕망도 누른다. 밥을 번다는 것. 살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해야 하고 피할 수 없는 숭고한 일이지만 솔직히, 참,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 김훈도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토로하신바 있다.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봄에, 새잎 돋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나는 늘 마음이 아팠다. 나무들은 이파리에 엽록소가 박혀 있어서 씨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면서 햇빛과 물을 합쳐서 밥을 빚어낸다. 자신의 생명 속에서 스스로 밥을 빚어내는 나무는 얼마나 복 받은 존재인가. 사람의 밥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굴러다닌다. 그래서 내 밥과 너의 밥이 뒤엉켜 있다. 나는 근로를 신성하다고 우겨대면서 자꾸만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라고 몰아대는 이 근로감독관들의 세계를 증오한다. 그러므로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에게 월요병은 없다. 단지 일요일 오후병이 있을 뿐. 일요일 오후가 되면 다음날 출근할 생각에 몸도 마음도 소파 위로 푸욱 꺼져버린다. 직장인들의 애환을 그린 <미생>에서 그랬듯이 특별한 악인이 없어도 긴장과 위기가 생겨나는 곳이 회사다. 나의 밥과 너의 밥이 뒤엉켜 있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밥'이 되는 곳. 그런데 어쩌면 밥벌이 자체가 아니라 일이 지겨워진 건 아닐까? 처음 일을 시작할 때 가졌던 신선함과 흥미가 사라진 자리엔 반복적인 지겨움만이 남았다. 인간관계도 갈수록 어려워졌다. 언젠부턴가 더이상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닌 타인이 원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한마디로 자발적 노예가 된 것이다. 어떻게 하면 다시 내가 일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아니, 아니. 그것보다 이제는 그냥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져 가던 어느날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맥주 2병 들고 결심!! 28년 직장 때려치웠다.


미국 직장인들은 지금 이 남자에 열광한다. "너무 지쳐 있었다. 해변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며 맘 편히 쉬고 싶었다." 제트블루 여객기 해프닝의 주인공인 스티븐 슬레이터. 승무원인 그는 착륙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짐을 내리려는 승객을 말리다가 욕을 먹은 뒤 잔뜩 화가 났다. 기내방송으로 "이 짓 28년 했지만 이젠 끝!"이라고 선언했고, 맥주 2병을 들고 비상탈출 슬라이드로 비행기를 빠져 나왔다. 그는 이 일로 승무원 경력이 끝장났고, 최고 7년형의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됐지만 보석금으로 풀려났다. 그의 행동에 동정론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임금은 깎이고, 동료들은 잘리고, 격무에 시달리고, 당장 때려치워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많은 직장인들에게 그는 대리만족을 준 것이다. 비록 정당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한편으론 나 역시 그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맥주 병에 키스를 날리며 비상탈출 슬라이드로 비행기를 빠져나오는 장면에 나를 넣어 마구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영화라면 해피엔딩. 나도 멋지게 비상탈출을 하고 싶지만 탈출 뒤에 누릴 자유보다는 그로 인한 배고픔의 두려움이 먼저 엄습해온다. 그러니 현실은 회사에 휴가를 내고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진다. 어휴. 열심히 일한(일하는 척한) 당신,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맥주나 마셔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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