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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는언니 Dec 21. 2016

42. 벚나무 아래

앉은 자리가 꽃자리


'벚꽃 피는 봄날 교토에서 산책하기'는 오래 전부터 나의 로망 리스트 중 하나였다. 언젠가 때가 되면 꼭 가보리라. 다짐하고 다짐했다. ‘언젠가’라는 말은 아주 위험하다. 하지 못하게 될 확률이 더 크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늘 ‘언젠가’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동북부 지역에 큰 지진과 함께 쓰나미가 몰려 왔다. 바다는 한 순간 거대한 괴물로 변해 시커먼 입을 벌리고는 땅 위의 많은 것들을 삽시간에 마구 집어 삼켜 버렸다. 작고 연약하지만 단단하리라 믿었던 세계가 그렇게 찰나에 사라지는 모습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슬프고 무섭고 허망했다. 몇 날 며칠을 뉴스 화면에서 마음을 떼지 못했다. 하루는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지진과 쓰나미가 모든 걸 집어 삼켜 폐허로 변한 도시에서 누군가 SNS에 올린 글이었다.


“모두들, 지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봐. 수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어. 평소엔 잘 보지 못했는데...”





그로부터 얼마 뒤 나는 어떤 이상한 힘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교토의 벚꽃 나무 아래를 걷게 되었다. 교토는 남쪽이어서 직접적인 쓰나미 피해 지역은 아니었지만 일본 전역이 애도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언제 그런 일이 있기나 했었냐는 듯 하늘은 무정하리만큼 푸르렀고 발 걸음 가는 곳마다 눈길 가는 곳마다 분홍빛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올랐다. 벚꽃 나무 아래서 사람들은 웃었고 연인들은 속삭였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었다. 세상의 그 어떤 힘도, 무슨 이유로도, 봄이 오고 꽃이 피는 순리를 막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일본에서는 벚꽃이 한창일 때 벚나무 아래 모여 함께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꽃을 즐기는 ‘오하나미’를 한다. 오하나미를 하지 않으면 봄을 제대로 맞이하지 않은 거라고 해서 꽃놀이를 위한 자리 쟁탈전이 치열한데 벚꽃이 유명한 공원에서는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돗자리를 들고 뛰어다니는 진풍경도 벌어진다고.


이번 벚꽃 시즌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죽음을 앞에 두고서 현재를 즐기는 것이 가능한가?란 명제 아래 오하나미를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여기 저기에서 꽃은 터지고, 피어나는 봄. 그 아름다움에 취해 솟아나는 감정까지는 차마 막을 수가 없었을 터. 사람들은 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펴놓고 조용하게 봄과 햇살과 꽃과 술을 즐기고 있었다. 돗자리를 미처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 벚꽃 도시락을 까먹었다. 거리에 늘어선 상점 진열대에는 벚꽃 차를 비롯 벚꽃 부채며 벚꽃 떡, 벚꽃 아이스크림까지 어디를 가든 분홍빛 아름다움이 넘실댔다.




어느 날 사라져버린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휑하게 슬프면서도 한편으론 이상하리만치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피어난 꽃처럼 피어난 마음도 애써 감출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덧없는 것 중 하나가 벚꽃이라고 하던데. 어느 순간 피었다가 눈깜짝할 새 지기 때문이다. 인생도 딱 벚꽃 같구나 싶다. 그러니 활짝 피어 있을 때 마음껏 살아내야 한다. 극작가 버나드쇼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하며 후회하기 전에. 잘 알면서도 나는 뭐가 그리 두려워서 그러지 못했는지. 그러지 못하는지. 어쨌거나 지금의 내 삶은 여기. 이 자리에. 벚나무 아래에 있었다. 멀리서 바람이 불어와 파란 돗자리 위로 꽃잎이 떨어졌다.   




그래, 앉은 자리가 꽃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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