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 나의 완벽한 하루

by 스톤처럼

최근 JTBC 드라마 <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 방영 종료되었다. 간단히 올라오는 유튜브 클립으로 몇 편을 골라보니 나름 해피엔딩이 엔딩크레딧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몇몇 시청자에게는 도부장과 인사팀장 간의 갈등과 같은 주제가 이어지지 않아 아쉬운 평도 있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린 장면도 많았음은 부인하기 어려워보인다.


이런 클립이 있었다. 형네 세차장에서 일을 하게 된 김부장이, 세차 중 만난 소나기로 인해 방금까지 해온 작업이 무용지물이 되어가는 불길한 상황에서, 많은 걸 내려놓고 편안한 모습으로 쇼파에 기대어 눈을 감는 모습이 있었다. 해당 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 못 했지만 적어도 내가 봤던 그 순간에는 김부장이 행복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완벽한 하루. 살이 아리는 경제적 사회적 분위기에서 찾기 어려운 키워드가 되었다. 누군가는 잠 못 드는 밤을 보내고 있고, 즐거움 속에 숨은 고독은 연말 분위기와 다소 대조되는 면모도 없잖아 있는 듯 하다. 그럼에도 며칠 전 나에게 있던 나의 완벽한 하루가 있어 간략히 공유하고자 한다. 평범하지만 이런 평범조차 찾기 어려운 것 같아, 그냥 나의 이야기를 해본다.


쉬는 날이었다. 전날 야근까지 5일간 쌓인 피로가 허리와 어깨를 짓누르는 가운데 전기매트에서 일어났다. 쉬는 날이 아니었다면 지각 시말서를 작성해야 하는 늦잠이었다. 3일 전 혼자 낑낑 대면서 작업한 뽁뽁이가 다행히 아직도 잘 붙어있다. 오른손바닥을 대보니 이 녀석이 나의 공간에 침입하려던 추위를 밤새 막아준 모양이다.


오늘은 치과 가는 날이다. 6개월에 한 번. 기본적인 스케일링을 통해 이가 깨끗해지는 날로 메모한 날이 오늘이다. 본가 근처 위치한 치과, 그래서 치과 가는 길에 본가 들려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로 며칠 전부터 약속을 해놓은 상태다.


요즘 쉬는 날에는 면도를 하지 않는다. 터프한 수염이 애초 나에게 없지만, 자연스러운 샤프심 같은 털이 삐죽삐죽 나와 며칠 길렀다가 면도하는 그 느낌에 맛들렸다. 머리 감고 샤워하고 아침 양치하고. 치과 가는 날이라 그런가, 돈이 많이 깨질까봐 왼쪽 눈매가 오늘따라 유달리 쳐진 것 같다.


동네 지하철을 이용해 환승 한 번 하고 1시간 넘게 가면 예약한 치과가 있는 역이 나온다. 사람들이 꽁꽁 싸매고 다닥다닥 붙어앉아있다. 지하철문이 열리고 내리는 사람 먼저 내리고 탄다. 다행히 문 옆 구석진 자리에 한 자리가 생겼다. 내가 탈 차례가 되어 냉큼 가서 앉는다. 엉뜨가 되는 지하철이라니, 오늘은 제법 운이 좋다.


에코백에 있는 책 한 권을 읽는다. 한 페이지만 읽자. 딱 한 페이지만 읽자. 언제나 마음은 애독가다. 요즘 이렇게 지하철 안에서 좋아하는 책 몇 줄 읽는 이 순간이 그렇게 편하다. 졸리면 잠시 눈을 붙여도 되고, 말짱하면 책을 읽으면 된다.


목적지인 지하철역에서 내려 치과에 손님이 별로 없어 예약시간보다 일찍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다행히 6개월 전과 특별히 다른 점이 없다. 간단히 의사 선생님 만나뵙고 나온다. 벌써 점심시간이다. 가족과의 만남이 오후 4시에 본가에서 보자고 했기에, 밥은 먹고 들어가고자 자리를 옮긴다.


지하철역 사거리 대각선 건너편 동네 오래된 백화점이 한 군데 있다. 백화점보다 아울렛이, 요즘은 아울렛보다 저렴한 인터넷이 익숙한 나에게 백화점을 갈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 곳에 온 이유는, 백화점 9층 전문식당가에 평일 런치 뷔페 (성인 1인 12,900원)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밥상머리 물가가 너무 높아서, 차라리 뷔페 먹는 것이 돈을 더 아끼는 것 같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피자 뷔페라니, 피자mall 이라고 했던가. 100분 동안 무제한으로 먹고나올 수 있는 곳. 나의 휴일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의미로 제격이다.


삼삼오오 뷔페에서 나랑 몇 사람 빼고, 혼자 오는 사람이 드문 곳이지만 배고프면 눈치가 없어진다. 대담해진다. 먹는다, 또 먹는다. 잠시 쉬다가 또 먹는다. 피자, 파스타, 밥, 떡볶이, 아이스크림, 음료수 등등. 아침 먹지 않고 나와서 다행이다. 편도 아래까지 꾹꾹 눌러 배부르게 먹고 나왔다.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이 일대에서 고등학교 나온 나로서는, 매우 익숙하고 친숙한 거리가 펼쳐진다. 걷다보니 거리가 작아진건지, 내가 커버린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본가에 들어서니 내가 제일 먼저 집에 도착했나보다. 따뜻하다. 부지런한 두 분께서 열심히 관리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 온기가 느껴지는 집이다. 이런 곳에서는 낮잠 맛집이다. 낮잠을 청해본다. 달콤하다. 꿈도 꾸지 않는다. 푹 잔다. 맛있다. 따뜻하다.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 당신이다. 마치 어제까지 이 집에 있던 사람처럼 편히 대해주신다. 당신이 좋아하는 믹스커피 한 잔 타드린다. 취향이 변하지 않는다더니 이 커피가 제일 맛있다고 하신다. 설탕 조절까지 잘 해서 타드린다. 만나면 근황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 이야기 방향은 알 수 없으며 그때그때 달라진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나눈 첫 대화가 무엇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늘 그렇다. 당신은 그렇게 나를 배려해준다.


두 번째 도어락 누르는 소리, 어머니. 당신이다. 친구분이랑 점심을 드시고 커피까지 드셨다는데 내심 내가 잊고 지내던 행복을 일깨워준다. 커피집 소금빵이 맛있다고 하신다. 그래, 커피랑 빵은 또 못 참지. 오시자마자 반찬을 만드신다. 못 보던 털모자, 어디서 샀는지 물어본다. 선물을 받으셨단다. 거실 바닥에 있는 전기매트에 모여 귤 먹방, 일본에는 코타츠라는 게 있다는데 우리집도 '본격 먹방' 위해 이런 게 있어야 하나 싶다.


사실 본가를 방문한 이유가 있었다. 본가 화장실 변기에서 물이 멈추지 않고 차올라 넘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적어도 한 번은 만져보는 습관이 생겨,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내가 고쳐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변기 부속품을 살 수 있다. 변기 부속품이 도착하니, 택배 도착 문자가 울린다.


모든 겉옷을 한쪽에 두고 몇 가지 공구를 들고 문제의 화장실에 들어간다. 변기만 그렇지, 나머지는 가지런히 정리된 화장실 물품 덕분에 불쾌함은 전혀 없다. 아마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있던 변기를 그대로 사용해서 그런지 변기 뒷면과 아랫면에 먼지도 많고 녹도 많이 슬었다. 면장갑을 끼고 이것저것 만지고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고 해본다. 하다 안 되면 화장실 바닥에 앉아서 한숨을 돌린다. 윗옷까지 벗고 누워서 변기 밑면을 바라보고 이것저것 다 해본다. 과정이야 어떻든 정상작동해서 편히 이 화장실을 사용했으면 바람 하나뿐이다.


몽키스패너 내려놓는 소리가 컸던걸까, 바깥에서 잘 안 되냐고 묻는 목소리가 들린다. 꼴에 그래도 일말의 자존심이 있어 해결하고 있는 중이라 답변한다. 이 너트를 풀고 해야 하는 것 같은데, 어느덧 변기 연구자가 되어 이것저것 의문을 갖고 이것저것 만져본다. (가끔 내가 괜히 이걸 한다고 했을까하는 후회도 있었지만) 해결을 본다. 잘 작동한다. 물도 안 샌다. 몇 번이고 테스트해도 잘 된다. 마치 전문기사처럼 고친 변기를 보여주고 2~3일간 잘 작동하는지 모니터링 부탁까지 한다.


벌써 오후 4시 반. 우리의 부모는 저녁을 일찍 드시는 편이다. 조금 있다가 삼겹살 먹으러 나가자고 하신다. 오예, 오랜만에 목에 기름칠 좀 할 수 있겠군. 만약 이런 보상이 있다면 변기 몇 개 정도는 더 고칠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린다.


이번에 방문한 삼겹살집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는데, 불판을 주위로 모여앉아 먹는 삼겹살집이었다. 원형 철판 테이블이 있고 셋이서 어찌저찌 반찬과 합석해 자리를 만들어본다. 초벌 삼겹살이 주류인 이 맛집에서 역시 초벌 삼겹살 몇 줄을 시켜서 먹었다. 바깥은 쌀쌀하고 추운데 안은 아늑하고 따뜻하니, 우리 셋이서 참 좋아하는 감성이다. 고기는 육질이 부드럽고, 첫 판은 직원분께서 구워주셔서 대접 받는 기분도 든다. 된장찌개랑 사이드 메뉴도 추가로 시켜 먹고 있는데 다른 테이블도 슬슬 차기 시작했다. 연말이라 다들 송년회 겸사겸사 모였나보다. 여하튼 다음에 삼겹살 먹을 일이 있다면 우리는 이 집을 찾을 것 같다.


아랫배 두들기면서 가게를 나온다. 이미 캄캄해진 길거리에서 캐롤송이 울린다. 길거리를 걸으며 아버지가 최근 만난 친구가 이런저런 자랑을 했는데 하나도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 나도 그렇다 했다. 이 거리 위는 우리 가족의 추억이 많이 담겨있다. 철없던 철부지 아들이던 시절부터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에피소드는 그대로 남아있는데 그 에피소드가 있는 가게들은 사라지거나 임대문의중이라 붙어있다.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며칠 전 직장동료에게 받은 케이크 쿠폰을 이용해 빵집에 가서 우리 가족이 제일 좋아하는 치즈케이크를 고른다. 다시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요구르트 아주머니에게 요구르트도 몇 개 산다. 겨울이다. 다음 출근일에는 내복을 입고 출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맛난 음식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더 바랄 것이 없는 저녁이었다. 집에 와서 어머니가 내려주는 차 한 잔을 마시고, 오후에 못 다한 이야기를 또 이어간다. 다음에는 동네 새로 생긴 국밥집을 가보자며 후일을 도모한다.


다음 만남을 약속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거리 위 연말 분위기가 피어난다. 연말은 밤에 더 빛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우리 전반적으로 드리운 어둠보다 빛이 이겼으면 한다. 이번 연말이 가면 또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모르지만 우리 가족이 먹은 삼겹살은 잊지 못할 것이다. 참, 그리고 내가 고친 변기 또한.


퍼펙트 데이즈는 복수이니, 퍼펙트 데이라고 해야 하나. 나의 완벽한 하루는 밤 1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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