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최악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이별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헤어져"
자칭 로맨스 영화 속 비련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생각하였던 날. 지금보면 정말 어렸다는 생각이듭니다. 살다보면 여자와 남자가 만나 연애를 하고, 이별을 고하면 '더 이상 안 보기로' 결단 후에 찾아오는 시림은 어린 마음으로 참기에는 어려웠습니다. 이별 후 고민 상담한다고 기꺼이 기대었던 상대에게 듣는 충고라는 게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릅니다. 삐딱한 심보에는 그런 말을 하는 상대나 충고랍시고 들었던 그 말이 왜 그렇게 싫었나 모르겠습니다. 어렸어요. 참 어렸어요.
이렇게 소속되지 않고 밖에서 외로움을 느끼고나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하고자 합니다. 남녀 로맨스 이야기 아니고요. 로코의 맛을 기대하셨다면 먼저 사과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로코는 없을 겁니다. 로맨스 물은 아닌데 '이별'이 제법 어울리는 곳이 있어서요.
매트릭스 영화에서 빨간 약, 파란 약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죠? 저도 몰랐어요. 말만 빨간 약을 먹겠다고 하던때는 전혀 알 수 없었거든요. 근데 빨간 약을 먹는다는 게 '이별'과 어울릴 줄이야.
며칠 전 광화문 인근 공유 오피스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처럼 데스크에 앉아서 일에 치여, 일만 보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마음도 가라앉히고자 나름 독서도 하였던 날입니다. 믹스가츠동처럼 일과 독서를 같이 했습니다. 비싼 호텔에 놀러가지 않아도 가끔 좋아하는 책을 붙들고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모처럼 마음의 여유를 불어넣은 하루였어요. 노을이 질 때쯤 사무실 근처에서 밥을 먹었어요. 이런 날은, 보면 저 같은 경우에는 밥이 당기더라고요. 밥심이 주는 그 포만감이 좋아서 그런가 봐요. 저녁까지 먹고서 근처 산책까지 하고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서는데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다시 나와서 사무실 건물을 바라봤습니다. 이질감 없는 익숙함이 원인이었습니다. 흘려보내기가 싫은거예요. 기억의 상자를 꺼내서 뒤적이니 익숙함이 어디서 오는지 알았습니다. 10년도 더 된 기억에서 그 익숙함이 고개를 내민 것이었습니다. 그건 바로, 그 건물이 예전에 같이 일하였던 파트너 사가 입주해 있었던 건물이었어요. 손뼉이 딱 쳐지더라고요. 지금은 그 파트너 사와 일하던 회사에 속해있지도 않고, 파트너사 역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거든요. 그러니까, 그곳은 그 파트너 사가 있었던 유적지였던 거죠.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나.
파트너 사와 일하는 시기도 10년도 더 되었고, 파트너 사와 같이 일하던 예전 그곳을 나온지도 오래된지라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파트너 사와 헤어졌던 그 시기에는 굉장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요, 지금은 다시, 연락하라고 하면 제법 재미있는 생각부터 드는 거예요.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하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는 법. 과거의 그림자가 사실 과거가 아닌 현재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분들과 같이 일하지 못 하였다면, 지금쯤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싶더군요. 한참 몰라도 많이 몰랐던 그 시절에 만난 인연이 만들어 준 경험은 지금 돌아보더라도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하지만 다시 연락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때처럼 연락하고 지낼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사실 이별에 대해서 이때 처음 생각한 것도 아니에요. '시간이 약이다' 그 말이 듣기 싫었던 때와 다르게, 이별에 익숙해져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거든요. 그렇다고 악의적으로 아예 연락을 끊어라는게 아닙니다.
경험은 쌓으면 쌓을수록 도움이 된다고 믿고 살아왔는데, 세상에는 그 경험들로 만들어낸 답이 정답이 아닐때도 많이 있더군요. 이별이 꼭 나쁜 의미가 아니라 성장의 관점에서 본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덕목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그동안 이별했던 건, 또는 앞으로 이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1. 기승전결 말하기 방식
저는 인턴할 때도, 정규직으로 직장에 다닐 때도, 기승전결 구조에 대해 많이 들어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도록 교육을 받았거든요. 논리성을 갖추기 위해,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그래야 한다고 배웠어요.
그런데 바깥에 나오니까, 기승전결 말하기 방식이 통하기도 있고,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느꼈던 차이점은 뭐냐면, 말하는 상대가 저와 기본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있느냐 였어요. 사람 대 사람으로 신뢰가 있는 상태라면 기승전결 말하기 방식이 배운대로 잘 통했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기승전결 말하기 방식이 그 사람의 시간을 빼앗는 대개 미안한 방법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처음 만나서, 무언가를 말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귀찮게 느껴지겠어요?
30년 넘게 배운 것이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2. 흔히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사실은 잘 모르는) 자기계발
저는 유튜브 영상도 많이 봤었고, 한동안 자기계발 맹신을 했던 사람이에요. 정말 좋은 정보들이 많이 있고 배우고 싶은 분들도 너무 많아요. 한번 만나고 싶은 분도 꽤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적용하려고 하니까 하나둘씩 오류가 발생하는 겁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어쩌면 제가 알고 있는 자기계발들은, '이미' 성공한 이후에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싶었어요. 그러니까, 현재부터 미래(성공한 시점)까지 잇는 과정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거예요. 아침형 인간으로 살았던 때가 있었는데 일적으로 아침형 인간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현타를 많이 느꼈습니다. 새벽 5시에 잘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아침 6시(1시간 뒤)에 일어나라고 하면 많이 잠이 적당히 많은 저로서는, 쉬울 수 없겠더라고요. 이런 현타 씨게 오는 경험을 하고나니, 그동안 자기계발 좀 안다고 생각했던 저 자신부터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과연 제가 알고 있다는 성공방식이 언제나 통하는 절대 법칙인가?'
3. 영원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 영원한 건 없다
한번 두번 일이 잘 풀리면 성과에 대한 안주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사람 심리가 어떤 인과관계로 정의하려는 습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경험이 쌓이면 성공 법칙으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죠. 하지만 '어느 정도'라고 붙인 건 그만큼 상황에 의해서, 사람에 의해서, 프로젝트에 의해서 깨질 수 있음을 암시하고자 함입니다.
나름(?) 정의를 내린 성공 법칙이 평생 밥을 먹여주면 좋겠지만 언제나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것은 위 2번의 경우와 다르지 않습니다. 머리가 아프고, 대중 속 고독함을 느껴도 변수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더라고요.
내가 쌓아올린 지식과 삶의 지혜라고 자칭하는 것들이 사실 그것을 플레이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비투스>라는 책을 펼쳤습니다. 유용한 내용들이 많이 나오는데 당시엔, 회복 탄력성 자본에 대한 내용이 와닿았던 것 같아요. 변수에 따라 달라진다면, 그로인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달라져서 아프더라도 회복하는 마음의 탄력성을 갖추자고 마음가짐을 다시 했습니다.
이로 인해 달라진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100년 가까이 지나도 살아있는 고전에서, (실체 없는 진리들을) 조금 엿보자는 노력이 있겠습니다. 그것을 또 배워서 절대 법칙처럼 여기는 게 아니라 '엿보는 정도'에서 참고하자는 것에 가깝습니다. 참고 정도는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지금 내가 공부하고 있는 내용도 영원하지는 않다라는 마음가짐이 생기더라고요.
과거 성공 경험에 대한 집착도 좀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성공한 경험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근데 새로운 경험이 목전에 다가와 있는데, 과거 성공했다고, '새로운 경험' 역시 똑같이 성공으로 끝나기를 바라는 건 과욕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성공하겠다는 강한 결단력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주사위를 던져 '행운의 숫자'가 나올 확률은 절반 아니겠어요? 50대 50. 정말 유명한 사업가가 시작해도 그럴 것이고, 이름도 없는 사업가가 도전해도 같은 확률일 것입니다. 과거에 집착해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지 못하면, 그 만큼 마음에 타격도 큰 것 같습니다.
<싯다르타> 책에서 주인공 싯다르타가 어린 아들이 가출한 것을 보고, 급히 아들을 찾으러 따라 나서지만, 옛 기억이 있는 마을 앞에서 들어가지는 못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장면이 있어요. 아버지와 아들 부자 간의 사랑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렇게 보였어요. 과거 젊은 자신이 겪었던 '성공 경험' '실패 경험'에서 자기 자신을 놓아주는 싯다르타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린 아들이란 등장 인물은, 늙은 싯다르타가 과거에 얽매여서남은 여생에 살아가려는 자신을 투영하였다고 본다면. 저 역시 몇 번 눈물을 훔쳤지만, 과거 자신과 결별을 통해서 새로운 자유를 선사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문학해설 또는 독자 후기 측면에서 뜬구름 잡는 생각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약이다) 이별에 익숙해져라는 조언이 최악이었는데, '성장'에서 본다면, 오늘도 작고작은 이별을 경험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니 언젠가 '저' 자신에게도 이별을 고했던 지식, 사람, 모든 것에도 악감정이 들지 않습니다. 끝이 좋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떤 의미에서 이별이 있어서 새로운 인생이 있었습니다.
언제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남산인가(?) 어느 가을날 한참 길을 걸으면서 과거 추억들을 뒤돌아보는 스토리의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결국 끝에는 주인공이 전혀 예상하지 못 하였던 결말로 뛰어 들었는데요, 슬픈 영화구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까 마냥 슬퍼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파트너 사의 옛 근무지에서 불과 10분 거리 내에 있는 거리안에 당시 소속되어 있던 직장 사무실이 있었던 자리가 있는데, 필름명 '30대' 추억 영화 1편 찍어볼까 싶다가, '이별에 익숙해지고 있어서' 다시 뒤돌아 나왔습니다.
이별은 오늘과 내일을 만드네요. '이별에 익숙해져라'는 조언, 누가 해줬는지 기억도 안나지만 감사합니다. 지난 1년간 많은 걸 이별하고, 앞으로도 참 많은 것을 이별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만나면 인사라도 할수 있도록 과거에 대한 아카이브는 다 있으니 이별에 익숙해지고 열심히 살아야 겠습니다.
그렇게 이별하고 어른미 1그램 얻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이상 그 당시의 제가 아니네요.
어디선가 그랬어요.
과거의 그림자도 없다.
미래의 그림자도 없다.
사실 과거, 미래 모두 현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