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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Mar 31. 2018

이봐, 소크라테스!

-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인간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들 합니다. AI와 사물인터넷, 3D 프린터 등등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기술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살아남으려면 저것들에 대해 공부해야 하나요? 솔직히 내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의 기능도 다 알지 못하는데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질문들을 하다 보면 이 시대가 우리들을 '낙오자'로 만들고 있다는 불안감이 생기기도 하지요. 당장 일을 하면서도 새로운 시스템이나 기기가 도입되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 앞에서 망연자실해지기 일쑤지 않습니까? 언제 이걸 배우나... 오늘 내로 마스터해야 일을 하는데...라고 고민합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뭐라도 배워보려고 하는 동안 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계들과 프로그램들이 내 일을 대체하고 있고, 그로 인해 직업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이때쯤 되면 불안감은 공포감으로 바뀝니다. 이러한 공포감을 테크노포비아(technophobia)라고 하지요. 현대인들은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조차도 이 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자신의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의 기술발전에는 문외한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테크노포비아 증상은 양상이 다를 뿐이지, 고대 시대부터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지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증상은 보다 광범위하고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때문에 그 강도가 남달리 세게 느껴지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공포감이 확산될수록 그것에 과감하게 맞서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자들도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뭐?
So What?


장난 삼아 우리도 이런 말을 많이 던지지요? 그런데 사실 이 말을 잘 뜯어보면 정곡을 찌르는 요소가 있어요. 이 말은 곧,


그래서 그것은 무엇인가?


이지요. 여기서 '무엇'이라는 것은 한 대상이나 사태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본질을 영어로 'essence'라고 쓰지요. 이 단어의 그리스어 어원을 따라 올라가면, 'to ti hen einai'(토 티 헨 에이나이)인데, 이것을 다시 영역하면 'the what it is'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인 what(ti)이지요. 즉 '무엇'입니다. 이를 명사화하면 'whatness', '무엇임'이 되지요.  따라서,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고쳐 쓸 수 있어요.


그래서 그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다는 것은 사태나 대상의 부수적인 것들은 차치하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4차 산업혁명시대의 이러저러한 변화 양상들은 차치하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 핵심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시대가 당연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뭔가 본질을 망각한 상태의 표피적인 변화만이 생겨나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사실 이렇게 느껴지자 마자, 우리는 이미 이 시대에 만연하고 있는 테크노포비아의 '원인'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고, 그 원인을 파고들어가는 탐색과 사유를 진행하면서 이 시대의 '본질'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본질을 알게 되면 더 이상 두려움이나 공포감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어떤 '삶의 자세', '일상의 태도'와 같은 것이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변화무쌍한 시대, 사람들의 좌절, 빈익빈 부익부, 부패한 정치 안에서 우리는 한 나약한 개인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저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는 각자가 완연한 단독자이자, 주체로 서게 되는 것이지요. 이 시도를 최초로 한 사람이 바로, 우리가 잘 안다고 '착각'(?)하곤 하는 소크라테스입니다. 그는 저 질문을 자기 자신과 사람들에게 던짐으로써 지금의 과학기술 전반, 학문 전반을 가능하게 한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을 창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야말로 인간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소크라테스 선생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의 시대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이 '창의적'인지 어떻게 해야만 우리가 이 시대를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그에게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기 가네요... 이봐, 소크라테스!



당신은 누구인가?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그곳을 평생 떠나지 않은 채로 기원전 399년에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일종의 '정치적 타살'이라고 하는 견해들이 많습니다. 좀 있다 더 이야기하겠지만,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아테네 시민들을 교육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소크라테스가 그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었지요. 이 죽음은 당시 아테네 민주정의 타락이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합니다.  소크라테스를 죽이기 위해 그를 미워하던 예술가, 정치인, 학자들이 증인으로 총동원되었지요. 그가 재판을 받았을 당시 죄목은 오늘날로 치면 '국가보안법 위반'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무고에 불과합니다. 이 죽음은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수많은 지식인의 투옥과 사형을 지켜본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석공의 아들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분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직업이 무엇이었든 간에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은 아니었어요.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스파르타와의 전쟁)에 참전했을 때 중무장 보병으로 근무했습니다. 당시에는 징병제가 아니었고 모병제였기 때문에 무기와 갑옷 등은 자신의 돈으로 사야 했는데, 중무장을 할 정도의 돈이면 가난하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을 살 정도로 부유했는지 어땠는지는 불분명해요. 하지만 그가 평생 경제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그에게는 어느 정도의 세습 재산이 있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 많은 철학사가들과 역사가들의 견해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어머니인 파이나레테는 『테아이테토스』(플라톤 지음)에서 산파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전문적인 산파였다고 보는 것은 다소 부정확해 보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묘사된 미술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입니다. 전체 그림의 왼쪽 위에 소크라테스가 있네요. 대머리에 배가 나오고 부리부리한 눈이지요.

소크라테스의 젊은 시절, 아테네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 페르시아인들과의 전투에서 아테네 인들은 490년의 마라톤 전투에 이어, 479년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승리했고,  480년에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이스킬로스(당시의 유명한 비극 작가, 요즘으로 치면 유명 드라마 작가)는 기원전 472년에 『페르사에』라는 작품을 통해 아테네의 영광을 상연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영광들은 이후 이어질 그리스 ‘제국’의 기틀을 놓게 되지요.


플라톤의 『향연』이라는 대화편을 보면 알키비아데스(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30인 참주 중 한 사람)는 소크라테스를 사티로스(반인반수)처럼 묘사하며, 아리스토파네스(아테네의 희극작가)는 그가 물새처럼 점잔을 빼며 걸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소크라테스가 눈동자를 굴리는 버릇을 가졌다고 조롱했지요. 그러나 당시의 이런 우스꽝스러운 묘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특별히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소유한 인물이라는 것을 다른 전거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Nicolas-André Monsiau, <소크라테스와 아스피아스의 논쟁>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당시 가치 기준으로 상당한 ‘괴짜’였음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는 사시사철 똑같은 옷에 맨발로 다녔습니다. 음식과 술은 최소화했는데, 예외적으로 향연이 베풀어지면 술을 많이 마시곤 했습니다. 하지만 향연 내내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하지요. 전하는 말에 따르면 향연의 끝까지 말을 이어가며 술에 취해 쓰러지지 않은 자는 소크라테스가 유일했고, 그래서 새벽에 멀쩡한 채로 먼저 집에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는 유년기부터 줄곧 어떤 신비한 목소리나 신호 같은 것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이런 전언을 들을 때면 넋이 나간 상태로 하루 이상을 있었던 적도 있다고 전해지는데요, 이런 측면도 그가 굉장히 특이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시쳇말로 '멍 때리기'를 하루 종일 했다는 것이 되니까요.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이런 생리적 현상은 정신집중에 따른 상태일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는 20대 초반, 자신이 철학적 사유의 시작에서 ‘인간’이라는 주제보다는 ‘자연’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자연철학자인 아르케라오스에게서 처음 철학을 배웠다고 전해집니다. '자연철학'이란 오늘날로 치면 '물리학'이지요. 당시에는 이들이 철학의 주류였는데, 소크라테스는 그의 스승뿐 아니라 엠페도클레스 등의 자연철학자들(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제가 <원소들의 카니발>에서 이야기했습니다.)에 심취했지요. 그러나 그가 결정적으로 이러한 자연탐구에 실망한 것은 아낙사고라스를 연구하면서였다고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이런저런 자연철학들이 난무하는데 대해 당혹스러워했는데, 그때 아낙사고라스가 모든 자연법칙의 원인이 ‘정신’(누스, nous)이라고 하는 데 감동받았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곧 아낙사고라스가 이 ‘정신’을 그저 이론적인 궁여지책으로만 사용하는 것을 보고는 급격히 실망했다고 하지요. 이렇게 해서 그의 관심은 ‘자연’을 떠나 인간 자체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스승에 대한 실망이 소크라테스를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게 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소크라테스는 평생 학생들을 받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의 소피스트들(당시의 주류 학자들)이 많은 수강생들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에게는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플라톤이 그렇고, 정치가로서의 알키비아데스가 있으며, 상인으로는 크리톤(이 사람이 소크라테스의 동년배 친구였습니다)이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실 때 그 주위에 많은 동료, 제자들이 있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Jacques-Louis David, <소크라테스의 죽음> : 가장 유명한 소크라테스 관련 미술품입니다. 독배를 들기 직전 주위에 많은 동료, 제자들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소위 ‘악처’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악처’라고 불릴 정도로 이해하지 못할 만한 인격은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평생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가정을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한 소크라테스와 같은 인물이 남편이고, 게다가 아이가 셋이나 된다면 어떤 여성도 우리가 바라는 그런 현모양처가 되지는 못할 것이 틀림없겠지요. 또한 소크라테스 자신도 그의 아내를 ‘악처’라는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습니다.


소크라테스 시대의 가치관과 소크라테스 혁명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의 가치관에서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덕'(아레테)이었습니다. 이 말의 어원은 통상 전쟁의 신인 아레스(ares, 라틴 계열에서는 마르스 mars)라고 합니다. 그래서 ‘덕’ 즉 아레테라는 말에는 힘, 용기, 기개, 무력, 전투의 어의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현대적인 뜻으로서의 ‘덕’과 고대적인 의미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아레테'는 그리스의 중심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덕을 지닌, 즉 영혼의 힘을 지닌 탁월한 인간이란 시대에 따라 다르게 규정됩니다. 소크라테스 시대 훨씬 이전인 호메로스 시대(BC.12C-11C)에는 이러한 훌륭함이 주로 ‘용기’였습니다. 용기는 ‘andreia’(안드레이아)인데, 이 말이 또한 아레테(aretê)의 어의와 밀접한 연관을 가집니다. 청동기 시대에는 우리가 『일리아스』와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듯이 전사(戰士)들이 가장 탁월한 인간이었지요. 이 서사시에 나오는 모든 영웅들은 각 부족의 으뜸 전사들, 장군들입니다. 대표적인 두 전사의 말을 들어 보지요.


내게도 똑같은 운명이 마련되어 있다면 나도 꼭 그처럼
죽은 후 누워 있을 것입니다. 하나 지금은
훌륭한 명성을 얻고 싶습니다.      
하나 이제 운명이 나를 따라잡았구나.
하지만 내 결코 싸우지도 않고 명성도 없이
죽고 싶지는 않으니, 후세 사람들도 전해 듣게 될
큰 일을 하고 죽으리라.      

Peter Paul Rubens, <Achilles and Hektor>, 1635

이 두 대사는『일리아스』의 두 영웅, 아킬레우스(위)와 헥토르(아래)의 말입니다. 이를 통해 당시의 사람들이 ‘지혜’보다는 ‘용기’와 그로부터 나오는 ‘명예’를 가장 탁월한 인간의 덕성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지요.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어떤 것을 탐구하고, 지성을 갈고닦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었습니다.


호메로스가 활동하던 BC. 8~9세기 경은 청동기 시대로 도시 정치체제가 막 생겨나던 시기였고, 이로 인해 데모스(demos: 이 말은 ‘민중’이란 의미가 있으나 본래 의미는 ‘부족’, ‘씨족’입니다.) 간의 합종연횡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전쟁도 빈번하던 시기였습니다. 본래 도구가 발전하고, 정착생활을 통해 농사로부터 나온 잉여생산물이 생겨나면, 우선은 종교적인 활동이 강해지지만, 그 후로는 정복활동이 왕성해지는 것이 세계사적인 공통점이지요. 이러한 세계사적 경향은  에게해 지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데모스를 지켜주고 다른 데모스를 차지함으로써 자신들을 풍족하게 해 줄 장군, 즉 '전사'(basileus: 바실레우스)를 영웅으로 칭하게 된 것이지요.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그들이 이상적으로 삼는 것은 다름 아닌 ‘용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용기는 덕 자체가 아니라 덕의 한 부분이 되어 갑니다. 다시 말해 전사의 시대가 지나가면서 헬라스인들은 용기만이 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것은 이 지역의 상공업 발달과 시민의식의 성장과 관련이 매우 깊습니다. BC 8세기경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폴리스(polis, 그리스 도시 정치체제)는 에게해 연안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이들 간에는 지리적인 장벽이 높았으므로, 서로 간에 독립적인 경향을 띠었습니다. 이러한 독립적인 정치체제들 간에는 서로 간의 소통이나 갈등이 빈번하였고, 그로 인해 자의든 타의든 교류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발칸반도 동북부 지방으로부터 페르시아 제국이 남하하기 시작하였고, 이들의 침략은 이들의 결속과 단결을 강제하기에 이릅니다.                       


  그리스 시대 시기구분(좌), 당시의 지도(우)

      

폴리스들 중 가장 큰 폴리스였던 스파르타와 그다음으로 큰 아테네는 이러한 페르시아 제국의 군사적 침략을 막기 위해 연합군을 형성하고, 다른 폴리스들을 참여시켰습니다. BC 490년은 이들 헬라스 연합군이 페르시아를 상대로 첫 번째 대승을 거둔 ‘마라톤 전투’가 종결된 해입니다. 그리고 10년 뒤인 BC 480년은 세계 3대 해전으로도 불리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또한 헬라스 연합군이 페르시안 해군을 커다란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파한 해이기도 하지요.


시민의식의 성장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점은 작은 도시 정치체제가 거대한 제국을 상대로 이런 승리를 두 번이나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폴리스 내의 시민들의 목소리와 권력이 커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겠지요. 사실 이러한 시민권력의 형성은 전쟁에서 전사의 권력 약화와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예전 같으면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일대일 결투에서처럼 한 사람의 영웅이 나서서 전쟁상황을 결정적으로 이끌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페르시아 대군은 그러한 전쟁 스타일을 포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페르시아 코끼리 부대의 공격 모습(좌), 그리스 연합군의 밀집방진 대형(우)

덩치가 큰 코끼리 위에 앉아 돌진해 오는 페르시아 장군을 단신의 기병이거나 보병에 불과한 헬라스의 영웅 한 사람이 상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이때 생겨난 전투대형이 바로 ‘밀집 방진’(Phalanx: 팔랑크스)입니다. 이것은 여러 군사가 하나의 대오를 이루어 스크럼을 짜고, 방패로 사방을 막거나 위를 막고 앞으로 전진하면서 안쪽에 있는 병사가 긴 창으로 공격하는 방식이지요. 이런 전투대형은 실제로 전장에서 효과적이었고, 이로 인해 이제는 한 영웅의 ‘용기’가 아니라 여러 시민들의 단합된 힘, 또는 자신보다 옆에 있는 전우를 생각하는 ‘절제’와 ‘배려’가 더 중요한 덕목이 된 것입니다. 헬라스인들은 전쟁을 통해 용기가 아니라 다른 덕목의 중요성을 배웠고, 이것은 곧 시민권력의 신장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전쟁은 장군 혼자의 힘으로 치를 사안의 것이 아니게 된 것이지요.


이와 더불어 헬라스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과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본래 척박한 땅이라 올리브 외에는 이렇다 할 농작물이 없었던 헬라스인들은 다른 지역들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쌓는 방식을 취하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이들에게는 ‘용기’ 보다는 ‘계산하는 이성’ 즉 ‘지혜’가 필요했고, 물건을 만들어 내는 ‘기술’ 또한 중요한 덕목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체제가 변하고, 특히 그 경제적 토대가 변화하면서 이 지역의 정신적 가치의 기준도 함께 변화하게 된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리스의 주농작물인 올리브 나무와 올리브 열매, 그리고 계산도구인 저울

결과적으로 오랜 시절 동안 ‘용기’만을 탁월한 덕목으로 간주했던 헬라스인들은 이제 시민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어떤 ‘기술’에 대해서는 ‘아레테’라는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고기를 잘 썰면, 그것도 아레테며, 또 노를 잘 저으면 그것도 아레테며, 도기를 잘 만드는 것도 아레테가 된 것지요. 그 결과 ‘아레테’라는 말은 헬라스 전체의 보편적 가치가 되었습니다. 즉 영웅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적, 신체적, 기술적 ‘능력’, ‘기능’(ergon: 에르곤)이 된 것입니다.     


‘아레테’의 이러한 역사적 부침은 철학에도 그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소크라테스에게도 ‘용기’라는 전통적 가치가 부 차화 되거나 주변화됩니다. 그를 이은 플라톤은 덕 중에서 용기를 전사가 가져야 할 덕으로 국한시키게 되지요.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다시 무모함과 비겁함의 중용에 해당된다고 제시합니다(이 두 철학자에 대해서는 다음에 알아볼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와 더불어 이들은 최고의 덕을 ‘정의’와 ‘지혜’에 두지요. 우리는 이 두 철학자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그 연원이 되는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있다는 것을 압니다.


덕을 하나의 철학적 테마로 본격적으로 주제화한 것은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였습니다. 소피스트들은 당대의 ‘교수’들이라고 새기면 무난할 거예요. 이들은 각지를 돌면서 배움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는데, 주로 돈을 받고 그런 일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들이 고향을 떠나 떠돌다가 주로 아테네에 정착하거나 또는 머물면서 강연을 펼치게 된 것은 BC 5세기에서 4세기에 이르는 아테네의 황금기와도 상관이 깊습니다.


이 당시에 아테네는 ‘헬라스의 학교’(고대인들은 '그리스'라고 하지 않고 '헬라스'라고 했어요)라고 불릴 정도로 학술과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많은 학인들이 아테네로 유학을 오거나 이곳에 가르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소피스트들은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궤변론자’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당대의 ‘석학’들이었지요. 즉 그 시재의 정신적 부침의 최첨단에 서서 이론을 펼치던 일군의 학자 집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많은 학생들이 막대한 돈을 주고서라도 이들에게 배우려고 했겠지요. 이들에게 배운 사람들 중에는 유명인사들이 많이 있었고, 그래서 당대의 권력을 잡은 권력가들, 그리고 그들의 자제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헬라스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그리고 특히 귀족 집안의 자제들은 특히나 정치가가 되는 것이 가장 큰 꿈이었습니다. 소피스트들은 이에 부응하여 주로 수사학과 문법, 웅변술 등을 가르치곤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이 덕의 '상대주의'를 펼쳤다는 것이에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의 유명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모든 인간 각자는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이란 ‘인간 일반’이 아니라 ‘인간 각자’라고 새겨야 올바르다는 것이 최근 학자들의 중론입니다. 즉 인간 각자가 만물의 척도라는 것이에요. 프로타고라스와는 대척점에서  “진리는 없다”라고 설파한 고르기아스도 같은 전제를 가지고 의견을 펼쳤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각자 다르다면 거기에는 어떤 보편적이거나 절대적인 진리도 없다고 본 것이지요. 당시의 사람들은 소피스트들의 활동에 힘입어서 주관성의 원칙이 유효함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즉 '내가 곧 진리다'라고 각자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전래된 전통적 가치 그 자체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렸으며, 스스로 검토하여 확인하지 않은 것은 더 이상 참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습니다.

<아테네 학당>을 다시 보면, 맨 오른쪽에 이 분이 바로 프로타고라스입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소피스트들이 아니었더라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소피스트들의 계몽 정신, 그리고 그들의 비판적인 물음과 문제제기를 철저화함으로써 도덕의식의 새로운 기초를 세우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소피스트와의 대결은 꾸준히 이어집니다. 오죽하면 플라톤은 자신의 책에 빈번하게 소피스트들을 등장시키고, [소피스트들]이라는 책도 냈겠습니까?

 

여하튼 이들 시기에 와서 소위 ‘퓌지스에서 노모스로’(자연에서 인위적 법으로)의 전환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덕에 대한 탐구는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때 노모스(nomos)는 법과 자연법칙 둘 모두를 의미하는데, 소피스트 당시만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자연과 인위(즉 문화)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았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을 주도했던 소피스트들에게 문화, 즉 노모스는 자연, 즉 퓌지스와는 상당히 다른 어떤 것이었음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법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사람들이 당시에는 그것이 ‘자연법’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우러나오거나 본래 그러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법을 지켜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많았어요. 하지만 소피스트들은 대개 법이란 인위적인 발명품에 불과하며, 그것을 지키는 것은 다소간의 지적인 게으름을 감안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 당시에 덕에 대한 기존에 존재하던 공통의 합의(용기)가 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아테네가 BC.480년 살라미스 전쟁 이래 에게해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상태가 점점 퇴락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습니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전사 계급이 패하고, 앞서도 말했듯이 ‘용기’라는 덕목이 회의의 대상이 된 것이지요. 새로운 합의가 생겨나기 전의 가치의 혼란 상황,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의 상황과도 흡사하지요. 사람들은 각자의 가치 기준을 가지고 생활하지만 그것이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주장을 감히 하지는 못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사람들은 타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곤란을 겪게 되고, 그 사람이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 모르겠다는 인격에 대한 불가지론이 팽배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곧 상호 간의 불신이나 이기주의를 부추기게 됩니다. 즉 사람들은 ‘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보편적으로 타당한 답변이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개인마다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전통적인 ‘공동체주의’가 무너지고 상대주의, 개인주의가 가치관의 기반으로 자리 잡았으니 이러한 경향의 현재적 의미를 알게 됩니다.

 

(좌) 카울바흐, <살라미스 해전>, 1868; (우)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전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 상상화

어쨌든 이러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 더 나아가 덕에 대한 허무주의가 팽배해 있던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는 매우 특이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세계 4대 성인이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당시의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이런 위대한 힘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로 여기서 그의 '창의성'이 발휘되는 것이기도 하지요. 소크라테스는 당대의 주류 가치관을 뒤엎고 완전히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한 매우 창의적인 인물인 것입니다.


그는 시민계급 출신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도 참전하였습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그는 전장에서도 맨발로 다녔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줄곧 자신의 애국심을 확인받기 위해 이 전쟁 참전을 자랑하곤 했지요. 행색만이 특이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앞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그는 전혀 경제생활을 하지 않았으며, 아침에 일어나 곧장 아테네의 광장, 아고라에 나가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특이한 행동에는 이유가 있어요. 이 이유를 말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의 친구 중 한 사람이 아테네의 아폴론 신전에 가서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가 누구냐고 신에게 묻자 신탁이 왔는데,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하다는 것이 그 신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소크라테스는 과연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지를 시험해 보고자 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의 토론 행각에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토론의 상대자들이 일반 시민일 경우에는 별 일이 없었지만, 당대의 세력가나 유명인사들이라면 사정이 달랐습니다.


그는 주로 사람들에게 ‘~은 무엇인가(ti esti~: 티 에스티~)’라는 질문을 했는데, 이 질문에 대해 소크라테스를 만족시킬만한 대답을 하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질문은 어떤 개별적인 예를 들어 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보편적 본질을 말하라는 어려운 요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공세에 기분이 상하거나 지친 유력인사들은 그에게 앙심을 품기 여사였습니다. 사실 BC 399년의 소크라테스 기소와 그의 사형 선고, 집행은 이들 유력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당대의 권력에 반하는 것이 철학과 학문의 숙명은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남들과 다른 창의적 사고를 하는 인간일수록 권력과는 척을 지기 일쑤라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에는 '관제'(권력을 추종하는)라는 말이 붙을 수 없습니다. 철학자가 그렇게 하는 순간, 그는 철학 자체를 배반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지요. 대표적으로 나치에 부역했던 하이데거가 있을 겁니다(하이데거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좌)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은 아테네의 법정; (우) 법정에서 자신을 변론하는 소크라테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당시의 주류였던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는 ‘덕’의 문제에서 매우 첨예한 대립을 형성했습니다. 소피스트들이 각자 나름대로의 의견을 펼쳤지만, 대개 공통적으로 ‘상대주의’의 입장을 취했는데 반해 소크라테스는 ‘보편주의’의 입장을 취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을 덕의 본질로 파악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사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말이 아니라 아테네 델피 신전의 서까래에 새겨진 아테네인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격언이었어요)은 인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 보편적인 영혼의 소중함과 탁월한 능력을 알아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대의 영혼을 돌보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지요. 소크라테스가 BC 399년의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을 변론할 때, 수도 없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이 말, 그리고 죽기 전까지 그의 친구들에게 했던 이 말은 바로 인간으로서 인간의 본질인 그 지적 능력을 함양하면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런 삶이야말로 가장 탁월하다는 것,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단지 짐승과 같은 삶이라는 것을 경고하는 경구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때 영혼이란 감각적 욕망이나 쾌락이 아닌 정신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이러한 영혼에 대한 주장은 이전에는 낯선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프시케’(psychē, 영혼)란 자연과 그리 구분이 되지 않는 인간의 한 부분이었지, 이렇게 인간만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호메로스의 영웅들을 보세요. 그들은 영혼을 따로 돌보는 것보다 체력을 기르는 것을 선호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최초로 영혼을 정신의 힘으로 파악했으며, 이것이 인간의 덕이라고 본 것입니다. 몸의 건강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영혼의 건강은 스스로 교정하고 닦아 나갈 수 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체육’이 다른 이론적 과목과 대등한 배움의 한 분야였고, 사람들도 ‘정신’이라는 것의 실체에 대해 매우 미심쩍어하였는데, 소크라테스는 대담하게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영혼-정신을 최고의 가치로 높여 놓은 것입니다. 이 당시의 사람들이 학교에서 호메로스를 암송했다는 것은 이들이 아직 그러한 호메로스식 사고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다음과 같은 호메로스의 구절은 당시의 아테네 인들의 영혼에 대한 사고를 잘 보여줍니다.      


파트로클로스는 그[사르페돈]의 가슴에 한 발을 얹고 몸뚱이에서 창을 빼냈다. 그러나 창과 함께 횡격막도 따라 나왔다. 그러니 그는 그의 영혼과 창 끝을 동시에 빼낸 셈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표현은 창이 영혼을 빼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상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영혼에 대한 선입견, 즉 그것이 비물질적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매우 ‘물질적’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즉 영혼을 심장이나 이런저런 신체의 일부로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이 외에도 호메로스는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다”라든지 “사지가 풀어졌다”라고 함으로써 영혼을 어떤 물질적인 요소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유령’이라는 것도 이들 헬라스인들에게는 완전히 비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보다는 약하지만 감각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런 지적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신체와는 다른 어떤 것이고, 그것이 신체를 지배한다든지, 또는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도덕적인 이설을 펼친 것입니다.


이러한 덕론의 특유한 점은 그의 실천론에서도 마찬가지로 도드라집니다. 소크라테스의 ‘덕론’에서 핵심은 영혼론이고 실천적 측면에서 핵심은 ‘지행합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지식과 행위의 일치’라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이 말, 즉 “지식은 곧 덕”이라는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봤기 때문이지요. 소크라테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당신이 진리를 안다면, 즉 진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덕스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에요. 이를 거꾸로 하면 “당신이 덕스럽다면, 그것은 당신이 진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이것을 윤리적 주지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그렇고 매우 당혹스러운 말입니다. 실재와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지요. 도대체 사람들이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이 그것을 곧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이 명제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우리는 건강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 하기보다는 건강하게 되기를 바라고, 용기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용감하게 되기를 원하며, 정의가 무엇인가를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정의롭게 되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 입장에서 볼 때 소크라테스는 이론 철학과 실천철학을 혼동한 것입니다. 덕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답하는 것은 이론 철학의 몫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고, 덕을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실천철학의 문제라고 본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혼동하고 지나친 ‘주지주의’로 흐른 소크라테스를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표면적입니다. 즉 어떤 덕이든지 간에 지혜를 동반하지 않으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아리스토텔레스가 간과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누군가 용기를 실천하고자 한다면, 그 용기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신념이 있어야 하지 그렇지 못하면 그러한 실천은 완전히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악인은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영혼을 더럽힌다는 생각에 대해 무지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이 ‘지행합일’의 덕을 다른 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지식’이라는 것이 그저 문자로 아는 앎이 아니라 ‘영혼을 변화시키는 앎’이라는 뜻으로 새긴다면, 이를 통해 ‘지행합일’이라는 덕이 매우 실천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상 소크라테스에게 영혼은 어떤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신체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에게 지식이란 곧 실천이었고, 이를 통해 영혼=행위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지요. 만약 이런 추론이 타당하다면 앞서 제기된 의문들, 즉 모르고 한 행위에 대한 비난의 가능성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런 행위의 경우 그가 지행합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비난을 감수할 것이 아니라, 더욱더 ‘앎’에 매진하여 그러한 일이 반복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으로 흐릅니다. 이것은 인간이 어리석음에서 지혜로운 상태로 변화할 수 있고, 그것의 결과 진정한 ‘덕’이 완성된다는 신념에 입각한 것이라 하겠지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신념이 드러나는 말을 옮겨 볼게요.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덕을 뒷받침하는 지혜(지식)에 대해 그것을 화폐로 비유하면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보게, 시미아스! 이건 실상 훌륭함(덕)을 목적으로 한 바른 교환은 아닌 것이네. 즐거움들을 즐거움들과, 괴로움들을 괴로움들과, 그리고 두려움을 두려움과, 즉 더한 것을 덜한 것들과, 마치 화폐처럼, 교환하게 된다는 것을 말일세. 하지만 이것들 모두가 교환되어야 할 바른 화폐는 저것, 곧 지혜(phronēsis)만일 게야. 모든 것으로 이것을 그리고 이것과 함께 사고파는 것들이 참으로 용기이며 절제이고 올바름(정의)일 걸세. 요컨대 지혜가 동반된 것이라야 훌륭함(덕)일 것이니, 즐거움과 두려움들 그리고 그 밖의 그런 것들 모두는 덧붙여지기도 떨어져 나가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것들이 지혜와 떨어져 서로 교환된 것들일 경우에, 그런 훌륭함(덕)은 일종의 음영화와도 같은 것이요, 사실상 노예적인 것이며, 건전하고 참된 것이라곤 전혀 없는 것인 반면에, 참된 것은 사실상 이런 것들 모두의 정화된 형태의 것이 아닐까. 절제도 올바른도 용기도 그리고 지혜조차도 일종의 [영혼의] 정화가 아닐까 싶으이.    


다시 말해 어떤 윤리적, 도적적 행위에도 지혜가 수반되지 않으면 '덕'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노예와 같은 행위이고, 영혼을 깨끗하게 만들 수도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당대의 국가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소피스트들의 철학은 이러한 '덕'의 보편적인 측면(지혜)을 간과하고 주관주의로 흐른 것인데, 소크라테스는 이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러한 언급은 당시의 '법'이라고 하는 국가의 틀조차 지혜와 연관되지 않으면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뭔가 우리가 잘 아는 말이 떠오릅니다. 바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지요. 이 말을 소크라테스가 했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토 박아 말 하건데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지혜에 비추어 봤을 때, 법을 지켜 스스로 독배를 드는 것이 타당하다고 봤을 뿐입니다.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아테네 민주주의 법정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논할 때 아주 중요한 논의가 됩니다. 기회가 되면 이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요.  일단 이에 관한 우리나라 저명한 두 학자의 책은 소개하고 넘어갈게요.


이 두 책은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다는 허구를 학술적으로 철저하게 파헤친 역작입니다.



그래서 뭐?

소크라테스 선생의 삶과 그의 시대, 사상을 생각하는 동안 가장 중요한 질문을 빠트릴 뻔했군요. '그래서 뭐?'라는 질문 말입니다. 이 질문은 바로 소크라테스가 하고많은 당대의 지식인들, 권력자들, 예술가들에게 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지식인들에게는 '진리란 무엇인가?', 권력자들에게는 '정의란 무엇인가?', 예술가들에게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고 말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답을 못하거나 미적거리면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것은 이 질문이 어떤 대상과 사태의 핵심, 즉 본질을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겠지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4차 산업혁명의 '대세'를 따라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의존하고, 그것을 통해 많은 것을 하려고 합니다. 물론 발전된 과학기술을 이용하고, 편의에 따라 활용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술 발달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우리의 삶과 일상을 지배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것의 본질이 우리 삶과 일상을 풍요롭게 살찌우는 기능만이 아니라 오히려 황폐화함으로써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그 부정적 본질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4차 산업혁명'을 분석한 유명한 학자인 클라우스 슈밥은 다음과 같이 4차 산업혁명의 폐해를 묘사합니다.


세상이 더욱 디지털화되고 첨단 기술화될수록, 우리는 친밀한 관계 및 사회적 연계에서 비롯되는 인간적 감성을 더욱 갈구하게 된다. 제4차 산업혁명으로 개인과 집단이 기술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게 되면서, 인간이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능력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 역시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더 이상 우려가 아닌 현실이 되고 있다. 2010년 미시간 대학교에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대학생들이 공감능력이 40퍼센트나 떨어졌고(20~30년 전 대학생들과 비교하여), 이러한 공감능력의 저하는 대부분 2000년 이후에 발생했다.
MIT대학교의 셰리 터클 교수에 따르면 10대 청소년 가운데 44퍼센트는 운동경기를 할 때나 가족 혹은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온라인 세상과의 연결을 끊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는 온라인 소통에 밀려났고, 온라인 미디어에 휩쓸린 젊은 세대 전체가 타인의 말을 듣거나 눈을 맞추거나, 타인의 몸짓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공포심이 생기고 있다. (...) 터클 교수는 두 사람이 대화할 때 모바일폰이 단지 테이블 위에 있거나 주변 시야에 있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주제와 유대감의 정도가 잘라진다는 연구 결과에 대해 언급했다. [이는] 우리가 모바일폰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큰 목적'을 갖고 활용해야 함을 뜻한다.


슈밥은 4차 산업혁명에 대해 우호적인 논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와 같이 인간의 감성능력과 소통능력의 퇴화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점점 더 면대면 대화로부터 멀어지고, 그것을 낯설게 느끼면서 불편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세대, 또 그다음 세대로 갈수록 이런 현상은 심화되리라 예상됩니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이 시대에 살아 있다면, '4차 산업혁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다음과 같이 답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감성능력의 퇴화요, 소통의 부재를 의미한다.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의 본질은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 답은 각자가 내려볼 수 있겠지만, 큰 테두리에서 보자면 아주 단순하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과제가 제출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타인과의 공감을 통해 감성을 회복하고, 소통을 통해 합리성을 회복한다.


정도가 되겠지요. 더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을 해야 할까요? 이제 여기서부터는 여러분들의 몫일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들, 이제부터 그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그것이 바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내볼 수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 삶의 아이디어가 아닐까요? 그래서 그것이 곧 우리 시대의 '덕'이 되도록 해 봅시다. 우리는 이를 이미 소크라테스로부터 배웠으니까요.


자, 그럼 소크라테스를 따라 질문을 던져 보도록 합시다.


아니면, 우선 그가 했던 것처럼 신발을 벗고 맨발로 땅을 디뎌 볼까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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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지음, [개념-뿌리들 2], 산해, 2009

권창은, 강정인 지음,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고려대출판부, 2005

강정인 지음,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 문학과 지성사, 1994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일리아스], 숲, 2012; 2015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서광사, 2003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 숲, 2013

클라우스 슈밥 지음, 송경진 옮김, [제4차 산업혁명], 새로운 현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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