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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Apr 06. 2018

그리스 여행, 인문학 가이드북

- 요것만은 알고 가자

벚꽃 만발한 봄입니다. 하지만 비 오면 그뿐. 이 봄의 정취를 더 느낄만한 곳은 더 없을까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분들을 위해 에메랄드빛 지중해 바다가 넘실거리는 그리스를 추천하고 싶군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인문학 가이드-요것만은 알고 가자'훗!


그리스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나시나요? 아마 많은 분들이 철학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음.. 저만 그런가... 요?


아니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도 생각나실 수도 있고요.


아니면 신혼여행지로 각광받고 있산토리니(이 브런치 글의 커버 사진이 이곳입니다)의 아름다운 지중해 풍광이 떠오르실 수도 있겠군요.


또 얼마 전 경제가 디폴트 상황에 빠지면서, 난민들이 생겨나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은 험난한 시기를 겪어 나가고 있지만,  그리스는 자타공인 인류정신의 시원이지요. 현대의 모든 학문과 문화의 대부분이 그리스로부터 연원 하는 것입니다. 철학과 문학, 물리학과 화학, 그리고 생물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수많은 건축물과 그것을 위한 기술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는 인류라는 신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지요.


이러한 학문, 문화의 시원이라는 의미 외에도 그리스는 우리가 어릴 적부터 알게 되는 수많은 서양의 '신'과 '영웅'들이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대단한' 국가는 도대체 어떤 곳일까요? 이제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인들의 성격                                

    

서양의 영웅들이 처음으로 탄생한 지역,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배경이 되는 그리스는 에게해와 지중해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후는 건조하고, 다소 황량하지만 연중 맑은 날씨가 많아 올리브와 포도가 많이 나며 야생화의 천국이기도 하지요. 반도의 해안에는 무수한 섬들이 있습니다. 내륙은 고산지대로 나뉜 각각의 지역이 있어 이곳이 바로 국가(고대 '폴리스') 형성의 모태가 되지요. 바다와 산지로 분산된 지역에서 사람들은 자급자족을 추구하면서 살아갔으며, 어업, 농업, 수공업이 주요 산업이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한 사람이 하나의 직업을 가지며 살아가기보다는 어업과 농업을, 병행하거나 수공업을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의 사람들은 생활이 획일적이지 않고 다각적이며 다면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따라 그리스인들의 성격도 매우 다면적인 방향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BC 5~4C 경의 그리스


이런 다면적이고 열정적이며 자유분방한 그리스인들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난 소설이 바로 앞서 말했던 [그리스인 조르바]입니다. 이 소설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다.

(좌) [그리스인 조르바] 초판본(1946); (우)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


이러한 자유로운 다면성은 이들의 독특한 신화에서도 드러납니다. 다른 민족의 신화와는 달리 신의 형상이 선악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누어지는 경우가 드뭅니다. 각각의 신은 선과 악 양면성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서슴없이 저지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맡고 있는 역할도 다양합니다. 예컨대 아테나 여신은 아테네의 수호신이면서, 농업과 동시에 수공업의 신이기도 하고, 지혜의 신이며, 또 전쟁의 신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들의 영웅관도 다면적인 측면이 드러나지요. 그리스적 영웅의 모범 중 하나이 오디세우스를 살펴 보지요. 그는 용감하고 또 영리합니다. 그리고 그는 불굴의 의지도 가졌지요. 그는 항해술뿐 아니라 탁월한 농사꾼이기도 했습니다. 또 냉철한 이성으로 아킬레우스를 설득하는가 하면,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체력도 강성해서 권투, 레슬링, 달리기에 능하였습니다. 사실 그리스인들에게 올림픽의 꽃은 마라톤이 아니라 5종 경기(달리기, 창던지기, 씨름, 원반던지기, 높이뛰기)였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요컨대,


그리스인들에게 이상적인 인간상은 바로 ‘만능인’, ‘전인’입니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상당히 낙관적이고 탐구정신이 강하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 현인의 말을 들어 보시죠.


하고 많은 놀라운 것들이 있지만,  일찍이 인간보다 놀라운 것은 없었거니

모든 것을 이룩할 수 있도다. 무슨 일이 닥치든 감당 못 할 일 없도다. 오직 죽음만을 피할 길 없을 뿐이로다

사람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단언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라


이 경구들은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BC 5C경)가 그의 작품인 [안티고네]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말한 것들입니다. 인간에 대한 경외와 그 능력에 대한 낙관성이 드러나지요.

그리고 철학자인 크세노파네스와 데모크리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리스인들의 탐구정신을 표명합니다.

   

결코 애당초부터 신들이 모든 것을 인간에게 밝혀 주지는 않았다. 탐구함으로써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보다 나은 것을 찾아냈다

나는 페르시아의 제왕이 되느니보다는 단 한 가지나마 원인 구명(aitiologia)을 해내고 싶다


잠깐, '그리스'라는 국가명에 담긴 오해를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라는 이름은 본래 이들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본래 이 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을 ‘헬라인’이라고 불렀지요. ‘그리스’라는 말은 로마인들로부터 유래됩니다. 로마인들은 처음 ‘그라이키’Graeci를 이들을 지칭할 때 썼는데, 이는 당시 그라이아Graia 지역에 그라케Grace라는 그리스인 식민도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라케의 라틴어식 표기가 바로 그라이키아Greicia에요. 이후 이탈리아어인 그래키아Grecia, 영어의 그리스Greece가 된 것입니다. 호메로스는 서사시에서 이 지역 사람들을 여러 호칭으로 부르는데, 아카이이오이, 다나오이, 아르게이오이가 그것입니다. 호메로스가 ‘헬라스’라는 말을 쓰는 경우가 한 번 있었는데, 그것은 아킬레우스의 고향을 가리킬 때입니다. 따라서 호메로스 시기(BC 9C경)에도 ‘헬라스’는 총칭이 아니라 지역의 명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것이 총칭이 된 것은 암흑시대(BC 12C~BC 8C로 역사적 사료가 거의 없는 시기) 끝에 융성한 ‘헬렌족’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지역을 확대해 갈 때가 바로 6, 7세기였는데, 이때부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통 ‘그리스(인)’이라고 한 것은 단지 통상적으로 쓰던 말을 굳이 달리 부를 때 생기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고대 그리스의 일상생활  


그리스의 지형과 기후와 연관하여 고대인들의 일상을 살펴보도록 할게요. 그리스는 반도와 바다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바다가 그들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기후 자체가 지중해성 기후로서 열대와 온대의 중간 지대이지요. 5월 중순에서 9월 중순까지 그리스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여름 날씨가 지속됩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그리스인들의 주요 사회활동이 집중되어 있기도 합니다. 9월 말부터 비가 내리면 우기(雨期)가 시작됩니다. 이때에 사람들은 철학과 정치활동은 접고, 양치기들은 하산한다고 합니다. 또한 겨울에 접어들면 스포츠 경기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극장과 법정은 겨울에도 열었지요. 겨울에는 차가운 겨울비가 자주 내립니다. 하지만 강수량은 매우 적습니다(약 400ml). 그러므로 대부분의 강은 흐르지 않고 메말라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의 나일강을 보고 경탄했고, 알렉산드로스는 인도의 갠지스강 근처에서 원정에 좌절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기후와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원정을 그린 회화작품,  Alexander The Great Battling An Indian Army , Tom Lovell


그런데 그리스가 해상제국으로 상공업이 발달했다고 보는 것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제국 시기에 상업이 융성했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농업 중심을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리스는 기본적으로 농업국가라고 해야 하지요. 그들의 지중해 식민지들도 농업 식민지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보리와 밀의 곡류와 포도, 레몬, 무화과, 올리브 등의 과실류를 주로 재배했습니다. 토양 자체가 석회암류라 배수가 잘 되기 때문에 과실류가 더 많이 재배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중에서 올리브는 그리스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지요. 올리브는 식문 후 7~8년이면 열매가 열리고, 15년에서 30년 간에 가장 소출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 수령은 적게는 300년에서 많게는 1000년에 이르지요. 그리스인들은 이 올리브를 먹기도 하고, 기름을 짜서 사용하기도 하며, 이 기름은 화장품, 연료 등으로 활용됩니다. 그래서 올리브는 그리스인들에게 신성한 식물이었습니다. 올리브 잎은 평화를 상징했고, 올림픽 우승자에게는 올리브 잎으로 만든 ‘월계수’를 씌웠다는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의 현재 국화도 올리브입니다.


그리스의 지형은 고지대, 가경(加耕) 지대, 경사지대, 해안지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지대는 산악지대로서 주로 광산이 산재해 있지요. 가경 지대와 경사지대가 그리스인들에게는 주요 생산지대인데, 여기서 목축과 농사가 이루어집니다. 해안지대는 어업이 성했고요. 나중에 상업이 발달하게 되면서 해안지대의 중요성이 커지게 됩니다. 그리스인들이 주로 섭취한 육류는 양이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오디세이아』에 보면 제사를 지내면서 소를 태우고, 또 소고기를 많이 먹는 것 같지만, 그것은 실제로 드문 일이었답니다. 이들에게 일상적인 육류는 ‘양’이었지요.


사실상 다른 지역에 비해서 그리스의 지형과 기후는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날씨가 쾌청하다는 것은 이들의 일상 경제를 풍요롭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들은 건기에 경제적인 풍요가 아니라 정신적, 철학적 풍요로움을 즐겼던 사람들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다른 지역보다 가난했지만, 장수를 누리면서 삶을 더 행복하게 보냈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테나이의 철학자인 플라톤조차 자신의 폴리스가 속한 그리스 지역을 팔레스타인 지역과 더불어 가장 가난하다고 보았고, 헤시오도스의 『역사』나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들로 보이오티아 농민들을 듭니다. 하지만 이들은 평균보다 더 오래 살았으며, 척박한 땅을 맨발로 다니면서 더 건강한 신체를 기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의 수명이 짧았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역병이 돌거나, 정치적인 살해를 당하지 않는 이상, 80세는 거뜬히 넘기는 경우가 많았지요. 유명한 사람들의 몰년을 보면, 아이스킬로스는 71세, 소포클레스는 91세, 에우리피데스는 78세, 아리스토파네스는 68세(이상 비극, 희극작가들), 플라톤은 87세, 이소크라테스는 98세였습니다. 소크라테스도 모함으로 사형당했을 때 나이가 70세였지요(이상 철학자). 게다가 아이스킬로스는 사고로 죽었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이 사람도 90세는 너끈히 넘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선주민들과 이주민들


그리스에 원래 있던 사람들은 신석기시대와 소아시아계 원주민들이었습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주민들이었지요. 이들은 반도의 위에서부터 세 부류로 나뉘어 들어왔는데, 이들을 이오니아인, 아카이아인, 도리스인이라 부릅니다. 이에 따라 언어도 세 가지 방언으로 나뉩니다. 이오니아인은 대략 기원적 20세기, 아카이아인은 16세기, 도리아인들은 12세기에 들어온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들의 유입경로는 자세히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원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아리아 계통의 그리스인들은 발칸반도와 크레테, 남서부 소아시아에 널리 분포하던 선주민들을 무력이든 평화로운 방법이든간에 복속시키면서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이들이 처음 형성한 문명을 보통 ‘미케네 문명’이라고 부릅니다. 청동기 문명이 발달한 미케네는 이주민들의 문화와 선주민들의 문화가 융합한 결과이지요. 특히 산술에 능했던 크레테인들은 이주민들에 비해 높은 수준의 지성을 갖추고 있었고, 이주민들은 이들의 문화를 흡수했습니다.


(위) 고대 그리스 3대 문명도, (아래) 미케네 문명 유적지 복원도


그 결과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400년(또는 1100년)에 찬란한 기술문명을 꽃피웠습니다. 초기 그리스 문자가 발명된 시기도 이때입니다. 미케네 문명은 1100년 경 도리스인의 침입으로 사라집니다. 미케네 문명이 사라지고 난 후 약 400년 동안을 역사가들은 ‘암흑시대’라고 부르지요. 역사가들이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이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문화적으로 쇠퇴한 시기라는 판단 때문입니다. 이 주장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리스어의 모태인 선상문자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잦은 전쟁으로 왕궁들이 폐허로 변해갔다는 것을 유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철기 혁명이 일어났고, 야금술도 계속 발전했습니다.    

  


폴리스의 형성과정과 규모


암흑시대가 종료된 BC. 9~8세기는 폴리스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그리고 페니키아로부터 유래한 ‘알파벳’이 유래되면서 문화적 재생도 시작되지요. 하지만 초기 그리스인들은 어떤 통합된 ‘국가’라는 것을 형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헬라스’라는 명칭도 상당히 추상적인 범역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헬라스가 제국을 형성하면서 이 지역의 도시가 연대감을 넘어 단일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민족성과 유사한 것이 구성됩니다. 즉 ‘단일문화’에 대한 ‘귀속의식’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헤로도토스는 이를 “동일 인종이면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통의 신전과 동일한 관습을 가졌다”라고 논합니다. 이러한 자의식이 습관화되면서 헬라스는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에서 풀어놓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렇게 보면 플루타르코스는 호메로스의 고대 영웅들을 이어받아 폴리스 기와 제국 시기의 영웅들을 소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역사 시기 이전이고, 플루타르코스의 영웅들은 역사 시기 이후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위) 고대 그리스 아테네 유적지 전경, (아래) 아테네 시내 일상 상상도

폴리스는 이들 그리스 영웅들이 활약한 터전입니다. 그런데 폴리스는 지금 우리가 ‘국가’(state)라고 부르는 실체와는 다소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도시국가(city state)라고 부르는 것도 부정확하지요. 당시에는 ‘시민’이라는 개념도 희박했고, 대다수가 농민이거나 어민이었습니다. 가장 큰 지역을 차지한 스파르타의 경우에도 ‘도시국가’라기보다는 ‘촌락 공동체’라고 부르는 편이 훨씬 정확하다 하겠습니다. 역사적 맥락이 이렇게 때문에 도시국가 대신 그냥 ‘폴리스’라고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polis'라는 말은 흔히 도시국가(city-state)로 번역되는데, 이는 성채(akropolis) 또는 시민 전체를 가리깁니다. 일종의 공동체(koinōnia)이지요.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공동체'가 그냥 오순도순 사는 그런 모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 1권 2장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polis적(정치적) 동물이다

         

폴리스의 규모를 전성기(BC 5C 경, 펠로폰네소스 전쟁기)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아테네가 2,600 km2 정도의 영토에 30만 명 정도가 살았고, 스파르타는 8,500 km2 넓이에 40만 명 정도가 살았습니다. 현재 서울이 605.52km 2에 2002년 기준 1028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니까, 인구밀도는 지금과 비교하면 현저히 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조건이 폴리스를 ‘국가’가 아니라 ‘촌락 공동체’ 이게끔 한 것이기도 하지요. 게다가 이 두 폴리스는 가장 강성한 지역이었고, 나머지 지역은 대개 5만 명 이하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좌) 고대 스파르타 지형도, (우) 고대 스파르타 유적지


그런데 이러한 폴리스가 다른 민족의 경우처럼 전쟁을 통해 병합되거나 하지 않는 것은 아직도 수수께끼라고 합니다. 혹자들은 이를 그리스 지역의 지형조건에서 이유를 찾지요. 다시 말해 에게해의 복잡한 해안선과 수많은 섬들, 산악지형으로 나뉜 지역들이 폴리스의 분립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와 비슷한 조건인 히타이트족은 큰 왕국을 형성하였고, 미케네 시대의 그리스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왕국을 형성했습니다. 그러므로 지형조건이 폴리스 분립의 절대적인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이 이유를 추론해 볼 수도 있는데, 그것은 당시의 그리스인들이 마땅히 통합할만한 뚜렷한 이유를 스스로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보통 민족통합은 외세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루어지거나 그것에 저항하면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통합을 이루어내는데 당시의 그리스 주변에는 그만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아시아에서는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했고, 이후 들어선 리디아는 제국 확장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 리디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는 제국이 되기 이전이며, 이집트는 쇠퇴기였지요. 페니키아인들의 유입이 잦았지만 그들은 그저 상인들일뿐이었고요.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는 당시에는 아직 미개 부족에 불과했습니다. 요컨대 폴리스 분립기의 주변 정세는 그저 잔잔한 지중해 바다 같았던 것입니다.    
 


스파르타의 성립과 발전


(좌) 스파르타 군사훈련장 상상도; (우) 스파르타 폴리스 영웅인 레오니다스(재위 BC 487~BC 480) 상

이제 그리스 도시 국가 중 가장 강성했던 스파르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 보지요. 암흑시대 이후, 미케네 왕국이 몰락한 자리에 폴리스가 형성되는 과정은 세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첫째로는 남하한 그리스인들이 미케네 잔류인들을 지배하여 폴리스를 세운 경우, 둘째로 남하한 그리스인들이 기존 그리스인들과 동화한 경우, 셋째로 잔류한 그리스인들이 남하한 그리스인들의 침입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전한 경우가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에 스파르타와 크레테의 폴리스가 속하며, 둘째 경우에 아르고스 지역의 폴리스가 속하고, 세 번째 경우에 아테네가 속합니다.


그래서 스파르타는 남하한 도리스인들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라코니아 지방에 기존 그리스인들을 침범, 지배하면서 성립한 폴리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도리스인들은 기원적 13~12세기경에 북쪽으로부터 이주한 민족이지요. 이들은 처음에 네 개의 부족으로 흩어져 있다가 기원전 800년 경에 통일됩니다. 지배와 침범의 과정에서 부족 간 계급관계가 형성되는데, 스파르티아타이(spartiatai, 스파르타 시민), 페리오이코이(perioikoi), 헤일로타이(heilotai)의 세 가지 신분이 그것이에요. 앞의 두 계급 구성원들은 '라케다이몬인'이라 부릅니다.

고대 스파르타의 계급 구성

그런데 스파르타 시민을 제외한 두 계급은 피지배 집단이라고 보는데, 상대적으로 페리오이코이는 스파르티아타이의 통제권 내에 있기는 했지만 자치가 허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정치적 권력이 허용되지는 않았지요. 이에 비해 헤일로타이는 비참한 노예 신분이었습니다. 실제로 스파르타의 경제는 이들이 담당했다고 봐도 무방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이들을 물건처럼 취급했습니다. 헤일로타이 살해가 공공연히 벌어졌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이지요. 하지만 스파르타 시민들의 변덕이 드러나지 않는 한 이들은 다소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고 보입니다. 전시에 병역의무와 공납 외에 별도의 세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자유민의 노래나 춤이 허용되지 않았고, 노예의 옷을 입었으며, 주인의 처분에 따라 팔려가기도 했습니다.

          

(위) 각종 노역에 시달렸던 헤일로타이, (아래) 헤일로타이의 반란

BC. 740~700년 사이에 스파르타는 메세니아 정복을 실행했는데, 이 시기에는 다른 폴리스들도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렸습니다. 주요 원인은 ‘토지’ 때문이었지요. 척박한 토지였던 만큼 생산력이 인구를 따라잡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메세니아는 타이게로스 산 너머의 비옥한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스파르타가 이 땅을 보유함으로써 번영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메세니아인들은 스파르타 본국 인구의 10배에 달했는데, 이 말은 곧 헤일로타이들이 넘치고 넘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현상은 스파르타에게 이익이자 위험을 동시에 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경제적인 측면에서 메세니아 헤일로타이는 스파르타에 막대한 이윤을 가져다주었지만, 반란의 가능성이 늘 존재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메세니아 헤일로타이들은 기원전 7세기 초에 아리스토메네스의 지도하에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 반란은 거의 20년간의 내전으로 이어지지요. 하지만 끝내 메세니아인들은 패배했고, 이후 스파르타인들은 이들은 철저히 탄압하면서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이후에도 반란은 지속되어 스파르타의 정체에 위기를 불러오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되지요. 학자들은 스파르트 주도하에 기원전 6세기에 맺은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사실은 이들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스파르타 정체(政體)는 헤일로타이를 진압하기 위해 형성된 측면이 없지 않은 것이지요.       

 


아테네의 성립과 발전, 테세우스와 그 이후

                       

폴리스의 역사에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더불어 가장 핵심에 위치합니다. 아테네는 아티카 반도 내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지요. 이 아티카의 최초의 왕은 케크로프스로 전해지는데, 당시에는 아테네 중심이 아니었고, 12개의 소국(실재로는 소부족)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이들 소부족을 통합하여 아테네 중심의 폴리스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 테세우스입니다.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는 테세우스 상

테세우스가 실존인물인지 아닌지에 대해선 여러 이론이 있으나, 그가 활동했다고 전해지는 기원전 13세기는 거의 모든 폴리스가 그 맹아도 발생하지 않은 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래서 테세우스 이야기는 그것이 전설이든 실재 역사든 아테네 인들에게는 자부심을 준 것임에는 틀림없지요. 플루타르코스의 ‘테세우스 전’은 현존하는 테세우스 이야기의 가장 자세한 판본이에요. 이 이야기의 핵심은 테세우스가 아티카를 통합하고, 민주정을 실시했다는 것입니다(그 와주에 켄타우로스라는 괴물을 물리치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나오지요).


테세우스는 아티카 통합 후에 새로운 회의체를 만들었고, 지방 귀족들(지금으로 봐서는 지역유지들)을 불러모았습니다. 하지만 귀족들은 테세우스의 회의체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귀족정이 아니라 민주정을 위한 제도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테세우스는 자신은 군사권만을 가질 것을 선언했습니다. 그제야 귀족들은 회의체에 참석하게 됩니다. 이 회의체가 바로 ‘시노이키아’(synoicia)에요. 이를 역사가들은 ‘집주제례’라고 부릅니다.


이런 전거로 학자들은 아테네 폴리스의 성립사를 테세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그것을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기원전 8세기로 보기도 합니다. 후자의 입장에서 아테네 폴리스의 성립은 왕정에서 아르콘 제도(집정관 제도)로 넘어가는 과정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테세우스가 폴리스의 시초로 우상화되는 것은 기원전 4, 5세기의 지식인들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지요.


하지만 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측에서도 일정한 역사적 근거를 내놓습니다. 그들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근거로 미케네 시대에 아티카가 아테네 중심의 폴리스를 형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제3의 입장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아테네 중심의 폴리스가 미케네 시대에 이루어졌지만, 암흑시대에 그 통합이 느슨해졌다가, 8세기에 다시 통합되었다고 합니다. 이 2차 통합 때 비로소 ‘민주정’이 틀을 갖추게 되며, 엘레우시스와 테트라폴리스(네 개의 폴리스)도 폴리스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유적지에서 출토된 수많은 도기에 테세우스 전설이 채색되어 있습니다. 테세우스에 대한 고대 아테네인들의 애정을 볼 수 있지요.


이 설이 다소 설득력이 더 있는 이유 중 하나는 플루타르코스를 제외한 어떤 역사가나 철학자도 테세우스가 민주정의 시조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헤로도토스와 플라톤은 테세우스 이야기를 하지 않으며, 투키디데스조차 테세우스의 아티카 통합은 논하지만, 그를 민주정의 시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테세우스 치세에서 아티카의 통합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해 보이며, 그 통합의 과정도 스파르타의 메세니아 복속처럼 폭력적이 아니라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이러한 통합과정의 결과가 바로 아테네의 ‘공동체적 특성’을 고취했음도 분명해 보입니다.

 

암흑시대 이후 아테네는 왕정이었는데, 이때 왕은 바실레우스(basileus)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바실레우스는 어떤 절대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했어요. 그럴만한 조건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왕은 반드시 불레(boule)라는 자문회를 두고 견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자문회는 고문이나 장군으로 구성되었고, 이들이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기능을 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왕의 권한은 더 축소되어, 아르콘(archon)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아르콘은 한 명인 경우보다 여러 명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 정체는 왕정이라기보다는 귀족정에 더 가까워진 것이지요. 아르콘이 들어서면서 바실레우스는 군사권을 상실하고, 종교적인 행사만 관장하는 권위로 축소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아르콘의 권력도 점차 축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즉 처음에는 아르콘이 종신직이었지만, 이후 10년(BC. 753), 1년(BC. 683)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이런 변화 와중에 아르콘은 분화되는데, 군사권을 관장하는 ‘아르콘 폴레마르코스’와 행정권을 관장하는 ‘아르콘 에포니노스’그 그것이지요. 여기에다 6명의 ‘아르콘 테스모테타이’가 선출되어 사법권을 관장하게 되면서 아르콘의 권력은 9명의 관직(‘아르콘 바실레우스’까지)으로 분점 됩니다. 이들은 현직이었고, 현직과 예비역들로 구성된 ‘아레오파고스 회의체’가 또 생겼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현직 아르콘의 권력보다 아레오파고스 회의의 권력이 더 커지게 됩니다. 게다가 이 회의체를 구성하는 100명의 회원은 종신직이었습니다. 결국 종신직인 왕에서 시작하여 종신직인 아레오파고스 회의로 권력이 유전된 것입니다. 이것은 귀족정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귀족정은 바로 민주정으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아테네의 역사는 대체로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의 이행 궤적이 뚜렷한 역사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이행의 과정에서 유명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을 ‘킬론의 반란’이라고 합니다. 킬론은 35회 올림피아에서 우승한 젊은 귀족으로서 메가라의 참주 테아게네스의 사위였습니다. 메가라가 상업도시임을 감안하면, 그는 귀족이면서 부자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의 정치적 야심은 스스로 왕, 즉 참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야심을 실행에 옮기면서 그는 장인으로부터 군대를 빌렸고, 아크로폴리스를 단숨에 점령했지요. 하지만 아테네 민중은 한갓 외국인에 불과한 킬론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민중들은 반 킬론의 편에 서서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하는데 가담했고, 결국 킬론은 식량과 물 부족으로 패퇴하게 됩니다.


이때 이 포위의 선두에 섰던 귀족이 알크메오니다이에요. 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그는 한 가지 중대한 실수를 범하게 되는데, 킬론 파들을 신전으로부터 끌어내지 않고, 신전 안에서 살육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아테네 민중들은 반란을 일으킨 킬론이나 신전을 더럽힌 알크메오니다이나 다 같이 좋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알크메오니다이도 추방당합니다. 하지만 알크메오니다이 가문의 사람들은 그 이후 아테네 정국을 좌우하는 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하게 됩니다. 아테네 민주정을 이룩한 유명한 지도자인 클레이스테네스, 페리클레스가 이 가문 출신들이지요.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 귀족들 간의 다툼에서 민중들의 선택권이 강화된 것입니다. 귀족들은 그들만으로는 정국을 주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이 사건 이후 ‘드라콘의 법’이라는 성문법이 제정되는데, 드라콘이 역사적 인물인지 아닌지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있지만 여기서는 뭐 지나치도록 하지요. 하여간 드라콘의 법은 가혹하기로 유명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도 이 법의 가혹함을 논합니다. 법이 이토록 가혹해진 이유를 역사가들은 킬론의 반란 이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1843년에 아테네에서 발견된 ‘드라콘의 살인법’(BC. 408)을 보면, 살인을 두 종류로 나누어 처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인데, '정당방위가 입증되면 보호받는다. 둘째로 고의와 과실치사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의 살인은 아레오파고스 회의의 판결을 받고, 과실치사는 추방된다'라고 되어 있지요. 이 런 법률 규정은 대체로 ‘사적 복수’를 억제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외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채권자가 채무자의 신병을 인수할 수 있는 규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채무자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이 법은 사적 복수를 방지하고, 귀족들의 자의적인 판결을 사전에 봉쇄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되지만, 여타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입법자-영웅, ‘솔론’이 등장해야 했지요.


자, 이 정도가 그리스에 대해 제가 소개할 수 있는 분량입니다.


이것 말고도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이 있지만 우선 이번 브런치 글에서는 마치도록 할게요.

다음번에는 '솔론'과 그 이후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 여행 가시는 분들, 잘 다녀오세요~

아, 마지막으로 그리스의 분위기(그 지적이면서도 시적인 분위기)를 한껏 담은 영화 한 편 소개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바로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원과 하루](1998)입니다.


51회 칸느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입니다.


Have a nice trip ~~

έχετε ένα ωραίο ταξίδι ~~

(échete éna oraío taxídi~~)



 

                          


□ 참고문헌

김진경 지음, 『고대 그리스의 영광과 몰락』, 안티쿠스, 2014

W.K.C. 거스리 지음, 박종현 옮김, 「희랍적 사고방식」, 『희랍 철학 입문-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서울; 서광사) 2000, 1장 pp. 11-38.

박종현 지음, 「희랍인들의 탐구 정신의 전개과정」, 『희랍 사상의 이해』(서울; 종로서적) 1985, 1부, 1장, pp. 7-50; 「희랍 비극의 특징과 그 철학적 의미」 3부, 10장, pp. 273-90.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호메로스의 작품과 세계」, 『일리아스』 (서울;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6, pp. 6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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